대간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 조선시대, 탄핵과 감찰을 맡은 대관(臺官)과 간쟁과 봉박을 맡은 간관(諫官)의 합칭.
이칭
이칭
언관(言官), 이목관(耳目官)
제도/관직
설치 시기
982년(성종 1)
소속
어사대(고려), 중서문하성 낭사(고려)|사헌부(조선), 사간원(조선)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대간은 고려 · 조선시대 탄핵과 감찰을 맡은 대관(臺官)과 간쟁과 봉박을 맡은 간관(諫官)의 합칭이다. 대간의 기원은 중국의 주(周)나라이다. 고려시대에 대관은 어사대(御史臺), 간관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郎舍)에 소속되었고, 조선시대에 대관은 사헌부(司憲府), 간관은 사간원(司諫院)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의 대간과 비교하여 조선시대의 대간은 직책과 정원은 줄었으나 감찰의 규모는 늘려 신료를 감찰하는 기능을 강화하였고, 간관보다 대관의 위상이 확실히 높았다. 국왕과 신료의 잘못된 언행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정의
고려 · 조선시대, 탄핵과 감찰을 맡은 대관(臺官)과 간쟁과 봉박을 맡은 간관(諫官)의 합칭.
설치 목적

고려와 조선은 왕조 국가로서 국왕은 국정 운영의 중심에 있었고 신료는 국왕을 보좌하여 국정 운영에 참여했으므로 이들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 국왕과 신료의 잘못된 언행을 비판하고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국왕의 잘못된 명령과 행위에 대한 간쟁(諫爭)과 부당한 인사 명령에 대해 비판하는 봉박(封駁)서경(署經), 그리고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고, 신료의 잘못된 행위를 탄핵(彈劾)하고 감찰(監察)하는 일을 담당시킬 목적으로 대간(臺諫)을 설치하였다.

연원

대간의 기원은 중국의 주(周)에서부터 나타나지만 제도가 정비되는 것은 진(秦) · 한(漢) 때이며, 고려 ·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형태로 정립된 것은 당(唐) · 송(宋)에서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대간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신라의 경우 544년(진흥왕 5) 사정경(司正卿)을 두면서 관료에 대한 감찰이 시작되었고, 이를 발전시켜 659년(무열왕 6) 사정부(司正府)를 설치하고 영(令) · 경(卿) · 좌(佐) · 대사(大舍) · 사(史)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 지방관을 감찰하는 외사정(外司正)을 지역의 주 · 군(州郡)에 두었다. 746년(경덕왕 5)에는 왕실 관부를 감찰하는 내사정전(內司正典)을 따로 설치하고 의결(議決) · 정찰(貞察) · 사(史)를 두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대간 제도는 신라의 감찰 기구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사정부 · 외사정 · 내사정전 등은 감찰을 담당하여 대관(臺官)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후대의 감찰 기구에서 감찰에 더하여 탄핵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것과는 비교된다. 이와 달리 간관(諫官)은 관부가 따로 없었다. 사정부가 간관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 않다. 간관의 관부가 독립하여 설치되지 않았던 것은 신라가 전제 왕권을 시행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그보다는 골품제(骨品制)가 시행되어 왕권이 커다란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을 견제할 독립 관부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고구려와 백제도 대간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자료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대관과 간관의 구분은 발해에서 처음 나타난다. 발해는 감찰 기구인 중정대(中正臺)에 대중정(大中正) · 소정(少正) 등의 대관이 있었고, 선조성(宣詔省)좌상시(左常侍) · 간의(諫議) 등의 간관이 있었다. 그러나 대간 제도의 본격적인 발전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졌고 조선이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때까지 운영되었다.

임무와 직능

고려의 대간 제도

(1) 변천 과정

고려는 건국 초부터 대간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대관은 내봉성(內奉省) 소속의 이결(理決) · 평찰(評察)이 있었고, 간관은 내의성(內議省)내의사인(內議舍人)이 있었다. 하지만 내봉성은 감찰을 위한 전담 기구가 아니었고 탄핵 기능도 없었다. 내의성의 간관도 규모가 작아 효과적으로 간쟁을 행하기가 어려웠다. 고려 초기의 대간 제도는 국왕과 신료에 대한 견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간의 본격적인 발전은 982년(성종 1) 중국 제도를 수용하여 관료제를 정비하면서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사헌대(司憲臺)를 설치하면서 이루어졌다. 995년(성종 14) 사헌대를 어사대(御史臺)로 고쳤고, 1014년(현종 5) 무신 김훈(金訓)의 정변(政變)이 일어나 금오대(金吾臺)로 개편했다가 다음 해에 사헌대로, 1023년(현종 14)에 다시 어사대로 개편하였다. 1061년(문종 15)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개편하였다.

대관의 관부인 어사대는 탄핵과 감찰을 위한 전담 기구이나, 간관의 관부인 중서문하성은 상급 관료인 재신(宰臣)과 중급 관료인 간관이 함께 구성되어 있어 간쟁과 봉박을 위한 독립 기구는 아니었다. 간관이 독립 기구를 갖는 것은 조선시대에 사간원(司諫院)이 설치된 이후의 일이었다.

문종(文宗)예종(睿宗)의 제도에 따르면 어사대의 대관은 판사(判事) 1인, 대부(大夫, 정3품) 1인, 지사(知事) 1인, 중승(中丞, 종4품) 1인, 잡단(雜端, 종5품) 1인, 시어사(侍御史, 종5품) 2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정6품) 2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종6품) 10인 등 8직책 19인을 두었다. 중서문하성의 간관은 좌 · 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 정3품) 각 1인, 직문하(直門下, 종3품) 1인, 좌 · 우간의대부(左右諫議大夫, 정4품) 각 1인, 급사중(給事中, 종4품) 1인, 중서사인(中書舍人, 종4품) 1인, 기거주(起居注, 종5품) 1인, 기거랑(起居郎, 종5품) 1인, 기거사인(起居舍人, 종5품) 1인, 좌 · 우보궐(左右補闕, 정6품) 각 1인, 좌 · 우습유(左右拾遺, 종6품) 각 1인 등 10직책 14인을 두었다.

대관 중에 대부 · 중승 · 시어사 · 전중시어사 · 감찰어사와 잡단은 당의 제도를 수용한 것인데, 판사 · 지사 등 송의 제도도 수용하여 고려의 필요에 맞게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당에서는 산기상시 · 간의대부 · 보궐 · 습유만 간관이었고, 기거주 · 기거랑 · 기거사인은 사관(史官), 중서사인 · 급사중은 판관(判官)으로 운영되었으나, 고려는 이들 모두 간관으로 운영하여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대간은 당 · 송이나 조선과 비교해도 규모가 매우 컸다는 특징이 있었다. 한편 서경(西京)양계(兩界)에는 분대어사(分臺御史)를 두었는데, 중앙의 감찰어사가 파견되어 근무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간 제도는 원(元)나라에 복속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대관은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압박을 받아 어사대를 감찰사(監察司)로 개편하면서 대부는 제헌(提憲), 중승은 시승(侍丞), 시어사는 시사(侍史), 감찰어사는 감찰사(監察史)로 고쳤다. 그러나 대관 제도의 커다란 변화는 충선왕(忠宣王)에 의해 이루어졌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감찰사를 사헌부(司憲府)로 개편하였다. 제헌을 대부(종2품)로, 시승을 중승(종3품) 2인으로, 시사를 내시사(內侍史), 전중시어사를 전중내시사(殿中內侍史)로 고쳤고, 감찰사를 감찰내사(監察內史) 6인으로 줄였다. 지사와 잡단을 폐지하고, 주부(注簿, 정7품) 1인을 새로 두었다. 어사대의 위상이 높았던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대부와 중승의 지위를 높이고 관제를 개편한 것이었다.

곧이어 충선왕이 퇴위하면서 감찰사로 복구했으나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다시 사헌부로 고쳤다. 이때 대부를 대사헌(大司憲, 정2품)으로, 중승을 집의(執義, 정3품)로, 시어사를 장령(掌令, 종4품), 전중시어사를 지평(持平, 정5품)으로 고쳤고, 감찰어사는 규정(糾正, 종6품) 14인으로 늘렸다. 사헌부의 위상을 더욱 높인 것으로 충선왕의 관료제 정비 방향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원의 제도를 수용한 것이어서 정치적 견제를 받아 1310년(충선왕 복위2)에 대사헌은 정3품, 집의는 종3품으로 내렸다. 이어 사헌부가 감찰사로 개편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反元改革)의 일환으로 어사대로 복구하였고, 1362년(공민왕 11)에 감찰사, 1368년(공민왕 17)에 사헌부로 고쳐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간관의 관부는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되었고, 1293년(충렬왕 19)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바뀌어 계속 운영되다가 1356년(공민왕 5) 중서문하성으로 복구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도첨의부(都僉議府)로 바뀌었고 1369년(공민왕 18) 문하부(門下府)로 개편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2) 임무 및 역할

고려의 대관과 간관은 소속 관부가 달랐던 만큼 기능도 달랐다. 대관은 시정의 잘잘못을 논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신료의 잘못된 언행에 대해 탄핵하고 감찰하는 일을 하였다. 간관은 국왕의 잘못된 명령과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간쟁과 국왕의 잘못된 인사 명령을 비판하는 봉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대간은 인사 명령이 적절한지 심사하거나 법률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것이 타당한지 검토하는 서경을 하였다.

간관이 주로 군주를 대상으로 견제 활동을 했다면, 대관은 신료를 대상으로 비판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대관이 간관의 기능을, 간관이 대관의 기능을 하기도 했고, 대관과 간관이 합쳐 대간이 되어 공동으로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대간이 국왕과 신료를 모두 비판하고 견제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고려는 골품제가 작동하지 않은 사회로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지배층의 범주가 넓어졌고 이들의 이해 관계를 조정할 국왕의 역할과 위상도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초기에 국왕과 신료의 권력 남용으로 지배층은 커다란 정치적 위기를 경험하였다. 그래서 국왕과 신료 어느 쪽이든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견제할 필요가 생기면서 대간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대간의 규모가 매우 컸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국왕과 신료의 잘못된 언행을 견제하는 대간의 역할이 중요하게 인식되자 대간의 임명을 신중하게 하였다. 대간에 임명되려면 본족(本族) · 외족(外族) · 처족(妻族)의 신분에 흠이 없어야 했고, 국왕의 천첩(賤妾)의 딸과 혼인한 국서(國壻)나 승려의 후손, 부곡(部曲) 출신이나 공장(工匠)의 후손 등이 임명되기는 어려웠다.

여러 가지 특권도 주어졌다. 대간은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식되어 재직 중에 함부로 체포하지 못하는 특권, 국왕에게 직접 아뢰는 권한, 곧바로 지방관으로 옮기지 않는 특권, 전쟁에서 장수로 임명되지 않는 특권 등을 가졌고, 신료들 사이의 통행 의례인 피마식(避馬式)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조선의 대간 제도

(1) 변천 과정

조선의 대간 제도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것이나 조선의 입장에서 변화 발전시켰다. 1392년(태조 1) 조선을 건국하고 관료제를 제정하면서 문하부와 사헌부를 설치하였다.

대관은 사헌부의 대사헌(종2품) 1인, 중승(종3품) 1인 · 겸중승(兼中丞, 종3품) 1인, 시사(정4품) 2인, 잡단(정5품) 2인, 감찰(監察, 정6품) 20인으로 구성되었다. 간관은 문하부의 좌 · 우산기상시(정3품) 각 1인, 좌 · 우간의대부(종3품) 각 1인, 직문하(종3품) 1명, 내사사인(內史舍人, 정4품) 1인, 기거주(정5품) 1인, 좌 · 우보궐(정5품) 각 1인, 좌 · 우습유(정6품) 각 1인으로 이루어졌다.

대관은 고려에서 재상의 겸직으로 운영되던 판사와 지사를 없앴고, 대사헌을 종2품으로 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려 사헌부의 위상을 높였다. 고려도 충선왕이 대사헌을 정2품으로 올리기는 했으나 대관의 장관인 대부는 대개 3품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간관보다 대관의 위상이 확실히 높아졌다. 간관은 고려와 비교하여 급사중 · 기거랑 · 기거사인 등을 없앴으나 문하부에 재상과 간관을 설치했던 방식은 그대로 계승하였다.

1401년(태종 1) 대관은 태조(太祖)의 관제에서 중승을 집의로, 시사를 장령으로, 잡단을 지평으로 고쳤는데, 고려 충선왕이 만들어낸 명칭을 사용한 것이었다. 또한 문하부를 없애고 의정부(議政府)사간원(司諫院)으로 개편하고 재상은 의정부에, 간관은 사간원에 소속시켰다. 이렇게 되면서 사간원은 비로소 독립 기구로 운영되었고 이는 고려와는 다른 간관 제도의 커다란 변화였다. 간관으로는 산기상시를 없앴고, 간의대부를 사간대부(司諫大夫)로, 직문하를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보궐을 헌납(獻納)으로, 습유를 정언(正言)으로, 내사사인을 내서사인(內書舍人)로 고쳤다. 이러한 대간 제도는 약간의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어 조선의 제도로 정착하였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대관은 사헌부의 대사헌(종2품) 1원(員), 집의(종3품) 1원, 장령(정4품) 2원, 지평(정5품) 2원, 감찰(정6품) 24원 등 5직책 30원을 두었다. 간관은 대사간(정3품) 1원, 사간(종3품) 1원, 헌납(정5품) 1원, 정언(정6품) 2원 등 4직책 5원을 두었다.

고려의 제도와 비교하면 대관은 8직책 19인에서 5직책 30원으로 바뀌었는데, 직책의 규모가 작아졌고, 순대관(純臺官)은 9인에서 6원으로 줄었으며, 감찰은 10인에서 24원으로 늘어난 것이다. 간관은 10직책 14인에서 4직책 5원으로 직책의 규모와 정원이 모두 줄었다. 조선의 대간 제도는 고려에 비해 감찰의 숫자가 늘어난 것 외에는 직책과 정원의 숫자가 모두 줄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제도의 변화가 있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에서 제도가 개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2) 임무 및 역할

대간의 기능은 태조 관제에 따르면, 사헌부는 시정의 잘잘못을 논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공로와 과실을 살펴 포창하고 탄핵하는 일을 하였다. 문하부의 간관은 국왕의 잘못된 언행을 비판하는 헌납과 간쟁, 잘못된 인사 명령을 반박하여 바로잡는 일, 교지(敎旨)의 수발과 계전(啓箋)의 진달(進達)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헌부와 문하부 간관의 직능은 고려 대간의 기능과 비슷하다. 특히 대간은 언론을 담당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언론 양사(言論兩司)로 불렸다. 다만 교지의 수발과 계전의 진달과 같은 출납(出納) 기능은 고려에서는 없던 기능으로 태조 때에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사간원이 독립하면서 승정원(承政院)에 통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대간의 기능은 약간의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사헌부는 시정의 잘잘못을 논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하였고, 이에 더하여 원통하고 억눌린 것을 펴 주며 문란하고 거짓된 것을 금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간원은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기능이 국왕과 신료의 잘못된 언행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성격을 가졌음은 고려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고려에 비해 조선은 감찰의 숫자를 늘려 신료를 감찰하는 기능을 강화하였다.

대관의 기능과 간관의 기능이 서로 달랐지만 대관이 간관의 기능을, 간관이 대관의 기능을 하기도 했고, 대간이 함께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던 것은 고려와 같았다. 인사 명령이 적절한지 심사하는 서경을 대간이 행한 것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고려는 1품에서 9품까지 관료에 대해 서경을 했으나 조선은 5품 이하에 한정하여 시행하였다. 이렇게 정립된 대간의 임무와 직능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부 내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사헌부는 관료들 사이의 의례가 엄격했으나, 사간원은 지위의 높낮이에 따른 예의가 없었고 자유로웠다. 간관의 직책이 갖는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주어진 반대급부라고도 할 수 있다.

대간은 규정된 임무와 직능 외에 조계(朝啓) · 상참(常參) · 윤대(輪對)에 참여하였고, 경연(經筵) · 서연(書筵)에 입시(入侍) 했으며, 정책의 논의에 참여하였다. 국왕의 행차에 호종하기도 하였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관인을 국문하거나 소송 사건을 처리하는 일도 하였다.

의의 및 평가

대간은 고려와 조선에서 국왕과 신료의 잘못된 언행을 비판하는 기능을 하였다. 국왕과 신료를 견제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지만 국왕과 신료의 정당한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 이후 국가의 운영에서 국왕의 위상이 높아지고 역할이 중요해졌으며 신료들의 이해 관계도 더 다양해졌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일탈을 견제할 필요가 생겨나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事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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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經國大典)』
『삼봉집(三峰集)』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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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운, 『고려시대 대간제도연구』(일지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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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조선시대 언론사 연구』(지식산업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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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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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춘영, 「고려 어사대에 관한 일연구」(『대구사학』 3, 대구사학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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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렬, 「대간제도의 법제사적 고찰」(『사총』 5,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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