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 ()

조선시대사
제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왕과 신하들이 유학 경전, 역사서 등을 강론하면서 학문과 시무를 논하던 일.
이칭
이칭
경악(經幄), 경유(經帷)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고려시대~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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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경연(經筵)은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유학 경전, 역사서 등을 강론하면서 정국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자 행해졌다. 같은 용어로 경악(經幄), 경유(經帷) 등이 있다. 경연에는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이 정규 강의에 해당하는 법강(法講)으로 하루 세 차례 열렸고, 비정규로는 소대(召對) · 야대(夜對)의 양대(兩對)가 간소하게 행해졌다.

정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왕과 신하들이 유학 경전, 역사서 등을 강론하면서 학문과 시무를 논하던 일.
시행 목적

경연은 국왕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강론함으로써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경연을 통해 국왕의 인의(仁義)를 배양하고 국가 체제의 안정을 모색한 것이다.

변천사항

경연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五經)을 강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는 한림원(翰林院)에 시강학사(侍講學士), 시독학사(侍讀學士)를 두는 등 어전 강의가 제도화되었다. 유학이 발달한 송나라 때는 경연관 직제가 더욱 정비되어 강의 교재가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원·명·청나라 때는 황제 권력이 강화되면서 경연이 점차 형식적인 의례로 변해갔다.

우리나라는 고려 예종 때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활발하게 시행되지 못하였고, 무신 집권기에는 아예 폐지되기도 했다. 원 간섭기 때는 명칭이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명맥만 유지하였다.

조선 건국 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하면서 경연은 점차 활성화되었다. 태조 즉위 후 매일 경연을 열자는 제안이 나왔고, 사서(四書)를 비롯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 『정관정요(貞觀政要)』 등을 강론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태종 때까지는 경연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하였고, 세종 대에 이르러 거의 매일 경연이 열리게 되었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립하여 경연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성종 대에는 사림(士林)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경연이 더욱 중시되었고 제도적으로도 완비되었다. 집현전에서 이뤄지던 경연 관련 업무는 홍문관(弘文館)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에 여러 차례 경연을 시행하는 관례도 생겼다. 성종은 하루에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의 세 차례 경연을 시행하였으며 밤에 경연관을 불러 공부하는 야대(夜對)를 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종 대부터는 소대(召對)라는 약식의 강론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항상 경연이 잘 시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세조연산군은 경연을 한때 폐지하였고, 연이은 사화(士禍)임진왜란, 병자호란은 경연을 위축시켰다. 이후의 국왕들은 자신의 정치 운영 방식에 따라 경연을 중시하기도 했지만, 일부는 배제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경연을 거의 열지 않았다. 반면,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인조는 즉위 초 매년 100회 내외의 경연을 개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확고히 하려고 했지만, 전란을 겪으며 경연에 몰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 국왕들도 경연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한 편이나, 3강과 야대를 철저하게 지키기보다는 국정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시행하였다.

직제와 운영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경연관은 당상관(堂上官)낭청(郎廳)으로 구성되었다. 당상관은 영사(領事) 3인, 지사(知事) 3인, 동지사(同知事) 3인, 참찬관(參贊官) 7인이다. 영사는 삼정승이 겸하고 지사와 동지사는 정2품과 종2품에서 각각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였다. 참찬관은 여섯 승지와 홍문관 부제학이 겸직하였다. 성종 때는 특진관(特進官)을 두었다. 1·2품의 대신 중에서 임명했으며, 정원은 없었다. 중종 대 이후에는 특진관에 재야의 명망 있는 유학자를 초빙하기도 했다.

낭청에는 시강관(侍講官) · 시독관(侍讀官) · 검토관(檢討官)이 있었으며, 모두 홍문관원이 겸임하였다. 시강관은 직제학(直提學) · 전한(典翰) · 응교(應敎) · 부응교(副應敎), 시독관은 교리(校理) · 부교리(副校理), 검토관은 수찬(修撰) · 부수찬(副修撰)이 겸하였다. 그리고 사경(司經) · 설경(說經) · 전경(典經)은 참외직(參外職)으로 홍문관의 박사(博士) · 저작(著作) · 정자(正字)가 각각 겸하였다.

경연 참석 인원이나 좌석 배치 등도 세종 · 성종 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었다. 경연에는 영사 · 지사(또는 동지사) 이하 10인 이상의 관료가 주로 참석하였는데, 상황이나 장소에 따라 일부만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종 즉위 직후 예조에서 제안한 경연에서의 좌석 배치를 보면, 왕이 북쪽에 남향해 앉고, 영사는 동편에 서향, 지사는 서편에 동향, 참찬관 이하는 남쪽에 북향하여 앉게 되어 있다. 이상의 규정들은 대체로 조선 후기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일부 규정은 수정되기도 했다. 효종 때는 북벌(北伐)을 추진하면서 무신(武臣) 당상관 1인을 경연에 교대로 입시하게 하였고, 숙종 대에는 종친 1명이 교대로 참석하도록 했다.

강의 교재로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경전과 『자치통감(資治通鑑)』,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같은 역사서가 주로 활용되었다. 이외에 『대학연의』, 『정관정요』, 『성리대전(性理大全)』, 『근사록(近思錄)』, 『소학(小學)』,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다양한 교재가 쓰였다.

경연 절차는 정조 대 간행된 『홍문관지(弘文館志)』에서 취품(取稟), 현두(懸讀), 습강(習講), 입시(入侍) 등의 순서가 확인된다. 취품은 매일 아침 승지가 왕에게 이튿날의 경연 시행 여부를 물어 결정하는 것이다. 이는 조강·주강·석강에 해당하는 절차로, 소대·야대는 아무 때나 왕의 명령이 있을 때 행해졌다. 다음의 현두는 강독 교재를 준비하는 것이다. 강독 범위가 정해지면 어람용 서적에 토(吐)를 달아서 예습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 습강은 경연을 예행 연습 하는 것이다. 좌장(영사 혹은 지사) 앞에서 홍문관 관원들이 강독 교재를 읽으며 경연을 준비하였다. 마지막으로 입시는 실제 국왕 앞에서 강독하는 것이다. 경연관이 교재의 원문을 음독, 번역, 설명하고 나면, 왕이 질문도 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국정 현안들도 논의되었다.

의의 및 평가

경연은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 정치 운영의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하고자 시행되었다. 또한 국가의 각종 현안을 논의하고 국왕의 권력 남용을 예방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홍문관지(弘文館志)』

단행본

논문

권연웅, 「조선 영조대의 경연」(『동아연구』 17,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89
정재훈, 「조선중기의 經筵과 帝王學 : 光海君∼顯宗년간을 중심으로」(『역사학보』 184, 역사학회, 2004)
윤훈표, 「승정원일기 경연 기사의 특징」(『史學硏究』 100, 한국사학회, 2010)
정재훈, 「경연(經筵)·서연(書筵)과 조선의 군주학」(『복현사림』 30, 경북사학회, 2012)
윤훈표, 「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경연의 변모와 그 의미」(『역사와실학』 51, 역사실학회, 2013)
이인복, 「金宇顒의 「經筵講義」의 저술과 특징」(『조선시대사학보』 99, 조선시대사학회, 2021)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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