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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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주요관서의 정1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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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주요관서의 정1품 관직.
내용

그 부서의 서무를 총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의정부 · 중추부(中樞府) · 돈녕부(敦寧府) 등의 정1품 아문과 경연(經筵) · 홍문관(弘文館) · 예문관(藝文館) · 춘추관(春秋館) · 관상감(觀象監) 등의 특수 부서에 두었다.

정원은 경연에 3인, 기타 부서에는 각 1인씩이었으나 대부분 겸직이거나 명예직이다. 영사 · 판사 · 지사 등의 직명은 보통 관서에 붙여서 영의정부사 · 영중추부사 · 영돈녕부사 · 판중추부사 등으로 호칭하였다.

의정부 영사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개칭하고 문하부(門下府)를 통합 재편한 1401년(태종 1)에 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처음 설치했고, 영의정부사로 불렀다. 그러나 1466년(세조 12) 관제 경정 이후에는 영의정으로 불리었다.

영중추부사는 1432년(세종 14) 중추원을 설치할 때 두었던 영원사(領院事)를 1466년 중추부로 개칭하면서 영사로 고친 것인데, 영부사 혹은 영중추로도 불렀다. 중추부는 소관사무가 없는 명목상의 부서로서, 영중추부사는 의정에서 물러난 대신이 관례적으로 받던 대우직이었다. 그러나 물러난 의정이 많을 경우 1인 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영돈녕부사는 1414년 돈녕부의 설치와 함께 두었는데, 역시 맡은 사무가 없는 명예직으로서 보통 왕비의 아버지가 당연직으로 임명되었다. 통상 영돈녕으로 불렸다. 국구(國舅)가 여러 명일 경우에도 모두 영돈녕부사에 임명되었고, 국구가 없을 경우에는 왕실의 먼 친척이나 외척 가운데에서 임명되기도 하였다.

춘추관 · 관상감의 영사는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임명되었고, 홍문관 · 예문관의 영사는 3의정 중에서 1인이 겸직했으나 관례적으로 영의정이 임명되었다. 경연의 영사는 3의정이 모두 겸직하였다. 명예직인 중추부와 돈녕부의 영사를 제외하면 영의정이 경연 · 홍문관 · 예문관 · 춘추관 등의 영사를 독점하였으므로 그 상징성과 권한의 집중도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초기(朝鮮初期) 의정부(議政府) 연구(硏究)」(한충희, 『한국사연구』 31·32, 1980·1981)
「朝鮮議政府考」(末松保和, 『朝鮮學報』 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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