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관은 고려·조선시대에 시정(時政)의 기록을 관장한 관서이다. 고려 초기에는 사관(史館)이라고 불렀는데 문한서(文翰署)를 병합해 예문춘추관이라고 했다가 독립기구로 분리되었다. 1389년에 예문춘추관으로 통합하였는데 조선 건국 이후 분리되었다. 이때 예문관 관원은 녹관(祿官), 춘추관직은 겸관(兼官)으로 하였다. 『경국대전』의 직제에 따르면 영사, 감사(監事), 지사, 동지사, 수찬관, 편수관, 기주관, 기사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문관을 임용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유망한 청년들이 임명되는 전임사관은 국가의 중대회의에 모두 참석하는 등 매우 중요한 직임이었다.
고려 초기에는 사관(史館)이라고 불렀다. 관원으로는 시중(侍中)이 겸임하는 감수국사(監修國史), 2품 이상의 관원이 겸임하는 수국사(修國史)와 동수국사(同修國史), 한림원(翰林院)의 3품 이하의 관원이 겸임하는 수찬관(修撰官), 그리고 직사관(直史館) 4인이 있었다.
직사관 4인 중 2인은 권무(權務)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사관을 문한서(文翰署)에 병합해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 하였다. 1325년(충숙왕 12)에 이를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다시 분리해 독립시켰다. 이 때의 관원은 수찬 1인, 주부 1인, 검열 2인이었으나, 뒤에 공봉(供奉, 정7품) · 수찬(정8품) · 검열(정9품)로 바뀌었다.
또 수상이 겸하는 영관사(領館事)와 감관사(監館事), 2품 이상이 겸하는 지관사(知館事)와 동지관사(同知館事), 3품 이하가 겸하는 충수찬관(充修撰官) · 충편수관(充編修官) · 겸편수관(兼編修官)이 있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사관이라 고치고, 관원도 편수관(정7품) 1인, 검열(정8품) 1인, 직관(정9품) 2인으로 바꾸었다. 그러다 1362년에 또다시 춘추관으로 복구하고, 관원도 전처럼 공봉 · 수찬 · 검열로 복구하였다. 그 뒤 1389년(공양왕 1)에는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을 합쳐 예문춘추관이라 했다. 이속(吏屬)으로는 문종 때 서예(書藝) 4인, 기관(記官) 1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해 교명(敎命)의 논의 · 제찬(制撰)과 국사(國史) 등의 일을 관장하는 예문춘추관을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시중(侍中) 이상이 겸임하는 감관사 1인, 대학사(大學士, 정2품) 2인, 자헌(資憲, 정2품의 下階) 이상이 겸임하는 지관사 2인, 학사(學士, 종2품) 2인, 가선(嘉善, 종2품의 下階) 이상이 겸임하는 동지관사 2인, 충편수관(充編修官, 4품 이상) 2인, 겸편수관(4품 이상) 2인, 응교(應敎, 5품 겸임) 1인, 공봉관(供奉官, 정7품) 2인, 수찬관(修撰官, 정8품) 2인, 직관(정9품) 4인을 두었다. 이속으로는 서리(書吏) 4인을 두었다.
1401년(태종 1)에 다시 이를 예문관 · 춘추관으로 분리하여 예문관 관원은 녹관(祿官), 춘추관직은 겸관(兼官)으로 하였다. 이후 세조대까지 조선 초기에는 대체로 춘추관에 영관사 · 감관사 · 지관사 · 동지관사 및 충수찬관 · 편수관 · 기주관(記注官) · 기사관 등의 관직이 설치되어 있었다.
1466년(세조 12)에 영관사가 영사(領事), 지관사가 지사(知事), 동지관사가 동지사(同知事), 충수찬관이 수찬관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경국대전』의 춘추관 직제는 영사(영의정이 겸임) 1인, 감사(監事 : 좌 · 우의정이 겸임) 2인, 지사(정2품) 2인, 동지사(종2품) 2인, 수찬관(정3품 堂上官), 편수관(정3품 堂下官∼종4품), 기주관(정5품 · 종5품), 기사관(정6품∼정9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되, 다른 관부의 관원이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지사는 정2품의 관원, 동지사는 종2품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수찬관 이하의 관원은 승정원의 관원,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의 관원, 의정부의 사인(舍人) · 검상(檢詳), 예문관의 봉교 이하의 관원, 시강원(侍講院)의 당하관 2인, 사헌부의 집의(執義) 이하의 관원, 사간원 · 승문원 · 종부시 · 육조(六曹)의 당하관 각 1인이 겸하도록 했다.
이러한 춘추관직을 겸한 관원을 넓은 의미의 사관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사관은 그 수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예문관의 참하직인 봉교 2인, 대교 2인, 검열 4인, 도합 8인이 전임사관으로서 날마다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들이 좁은 의미의 사관으로서, 이들을 가리켜 ‘사관’이라고 했다. 사관은 대개 새로 문과에 급제한 유망한 청년들이 임명되는 벼슬이었다. 그 직위는 낮았지만 항상 왕 곁을 떠나지 않고 국가의 중대회의에 모두 참석했기 때문에 그 직임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사관의 임무 중 중요한 것은 사초(史草)의 작성이었다. 이들은 매일매일의 시사(時事)를 있는 그대로 써서 사초를 작성하고 이를 종합해 시정기(時政記)를 편수하였다. 또한 인물의 현부득실(賢否得失)과 비밀을 사실대로 기록해 개인적으로 보관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사초는 국왕도 볼 수 없는 것으로, 실록 편찬의 중요 자료가 된다. 한편, 춘추관직을 겸한 관원들은 실록의 편찬실무를 담당했다. 춘추관에서는 편찬된 실록을 각지의 사고(史庫)에 보관하고 자신이 1부를 보관하였다.
춘추관 직제는 연산군 때 기사관이 녹고관(錄考官)으로 개칭되었으나 중종 즉위 초에 다시 기사관으로 복구되었다. 중종 때는 제도(諸道)의 도사(都事) 및 문관수령(文官守令)이 기사관을 겸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정조 때는 규장각의 직제학 이하의 관원이 수찬관 이하의 직을 겸하게 했다. 고종 때는 양사(兩司) 및 형조의 당하관이 춘추관직을 겸임하던 제도를 폐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