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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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춘추관에서 각 관서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한 국정 기록물.
내용 요약

조선시대 춘추관에서 각 관서들의 기록을 모은 파일로, 예문관 전임 사관이 관리한 기록물이다. 시정기 편찬의 시작은 1434년(세종16) 11월로, 관청에서 보고한 문서, 국정 운영과 제도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연월일 순으로 편집·정리하고, 송나라의 고사에 따라 ‘시정기’라고 명명하도록 하였다. 시정기는 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춘추관에서 각 관서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한 국정 기록물.
내용

조선시대의 시정기 편찬의 시작은 1434년(세종16) 11월로, 춘추관(春秋館)의 건의에 따라 모든 관서에서 보고한 문서의 내용 및 국정 운영과 제도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연월일 순으로 편집 · 정리하고, 송나라의 고사에 따라 ‘시정기’라고 명명하도록 하였다. 시정기는 춘추관에서 전임 사관인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 · 대교(待敎) · 검열(檢閱)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에 소속된 겸임 사관(춘추관 관직을 겸임)들이 작성한 해당 관서의 업무 기록 등을 종합하여 편찬한 것으로, 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시정기에 대해 “ 『승정원일기』 및 각 관아의 중요 문서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고, 매년 연말에 책 수를 왕에게 아뢴다.”라고 규정하였다. 즉, 시정기는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서 작성한 문서들과 각종 국정 기록들을 모아서 정리한 책이었다. 하지만 『경국대전』에서는 편찬과 인쇄를 전제로 하였는데, 주8 사초가 아닌 공적 문서이므로 정리만 잘하고 있다면 굳이 편찬, 인쇄할 이유가 없는 것이 시정기였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서 3년마다 인쇄한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사문(死文)이 될 가능성이 큰 규정이었다. 실록이 편찬, 간행되는데 굳이 시정기를 간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정기는 ‘정리와 관리’가 문제이지 인쇄를 전제로 한 ‘높은 수준의 편찬’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초기나 그 이후 시정기 편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8명의 한림이 늘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476년(성종 7) 시정기 편찬에 대한 논의에서 시정기 편찬의 주체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관리 책임자만 언급되었던 것은 그것이 사관의 일상 업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관의 사초에 해당하는 입시설화(入侍說話), 주5, 졸기(卒記)를 빼면 시정기 찬수범례는 『승정원일기』의 그것과 같았다. 실록 편찬 때 『승정원일기』를 가져와서 자료로 사용한다면, 사관의 사초를 제외한 시정기는 중복되는 자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1678년(숙종 4)에 편찬된 『한원고사(翰苑故事)』에는 시정기 편찬의 지침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시정기는 단순한 문서의 집성이 아니라 문서의 내용을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선별 · 정리한 편집 자료인 것처럼 보인다. 숙종 대 『한원고사』의 시정기 편찬 지침에 따르면, 시정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다. ① 연 · 월 · 일과 간지(干支), ② 날씨와 기상 이변, ③ 국왕의 동정과 상참(常參) · 경연(經筵) 현황, ④ 국왕에게 보고된 중요 사건 내용, ⑤ 대간(臺諫)과 신하들의 상소문, ⑥ 주요 왕실 의례, ⑦ 과거 시행 내역, ⑧ 고관(高官) · 현직(顯職)의 임명, ⑨ 각 관청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은 문서. 이상과 같은 시정기 편찬 지침은 현전하는 실록청의궤(實錄廳儀軌)들에 수록된 『실록찬수범례(實錄撰修凡例)』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이는 시정기를 작성할 때부터 이미 실록 편찬을 염두에 두고 각종 문서들을 그 형식에 맞게 편집했음을 보여 준다. 시정기는 실록의 예비 원고 수준으로 정리 · 편찬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실록 편찬의 가장 중요한 핵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정기는 매년 편찬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완성된 시정기는 춘추관에서 보관되다가 실록청이 개설되고 실록 편찬이 결정되면 실록청으로 이관되었다. 실록청에서는 실록 편찬의 첫 단계로 ‘시정기 산절(刪節)’을 실시했는데, 시정기 산절은 실록청 관원들이 시정기의 기사들을 검토하면서 주4 등을 이용하여 실록에 들어갈 내용과 제외할 내용들을 구분하여 시정기 자체에 표시하는 작업이다. 산절을 마치면 실록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표시한 내용들을 다른 책자로 옮겨 주9 이것이 실록의 주1이며, 여기에 여타 자료들을 참고 · 보완하고 체재를 정리하여 주2를 작성하였다. 이런 과정을 볼 때, 시정기는 실록 편찬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였다고 할 수 있다. 시정기는 실록 편찬이 완료되면 다른 원고들과 함께 세초(洗草)되었으며, 따라서 현재까지 남아 전하는 시정기는 없다. 시정기는 조선시대에 국정 관련 기록과 문서들을 종합 · 정리하여 매년 편찬한 국가 기록물로서,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한원고사(翰苑故事)』(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K2-2046)

단행본

金慶洙, 『朝鮮時代史官硏究』(국학자료원, 1998)
오항녕, 『한국사관제도성립사연구』(일지사, 2009)
오항녕, 『실록이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 2018)

논문

오항녕, 「조선시대 시정기 편찬의 규정과 실제」(『한국사학사학보』 8, 한국사학사학회, 2003)
김현영, 「조선시대의 문서와 기록의 위상 : 사초, 시정기에 대한 재검토」(『고문서연구』 32, 한국고문서학회, 2008)
강문식, 「의궤를 통해 본 『영조실록』의 편찬 체계」(『조선시대사학보』 54, 조선시대사학회, 2010)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주석
주1

사초(史草)를 뽑을 때 처음의 것. 우리말샘

주2

사초(史草)를 뽑을 때 초초(初草)를 보충ㆍ수정하여 다시 쓴 원고.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실록을 편찬한 뒤 그 초고를 없애 버리던 일. 자하문 밖 조지서에서 그 사초(史草)를 물에 씻고, 그 종이를 제지 원료로 다시 사용하였다. 우리말샘

주4

붉은 빛깔의 먹. 우리말샘

주5

역사에 관한 주장이나 이론. 우리말샘

주6

글씨를 흘려 쓰지 아니하고 또박또박 바르게 씀. 또는 그렇게 쓴 글씨. 우리말샘

주7

글씨를 흘려 쓰지 아니하고 또박또박 바르게 씀. 또는 그렇게 쓴 글씨. 우리말샘

주8

물건 따위를 집에 간직함. 또는 그 물건. 우리말샘

주9

글씨를 흘려 쓰지 아니하고 또박또박 바르게 쓰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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