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은 조선후기 제1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674∼1720년이며, 현종의 외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숙종 재위기는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러 당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 시기였다. 숙종은 정치주도세력을 일거에 뒤바꾸는 환국정치로 이를 타파하고 왕권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으나 이 와중에 송시열 등 수많은 명사들이 화를 입고 죽었다. 역설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어 숙원사업이던 대동법이 백 년 만에 전국으로 확대 적용되었고, 전국에 걸친 양전사업도 마무리되었다. 상평통보를 발행해 상업활동도 지원했다. 능호는 명릉으로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
재위 1674(숙종 즉위년)∼1720(숙종 4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순(李焞),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이며,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黨弊)가 심화되고 붕당 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때의 정국 형세를 살펴보면, 왕의 즉위 초는 앞서 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 허견(許堅)의 역모와 관련,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1689년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왕자(후일의 경종)에 대한 세자 책봉 문제가 빌미가 되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그러다가 1694년 남옥(濫獄)이 문제되고 폐출되었던 민비(閔妃)의 복위를 계기로 남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되었다. 그 대신 이미 노론 · 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연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 뒤에도 노론 · 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 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춰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잦은 정권 교체와 함께 복제(服制)에서 송시열(宋時烈)의 오례 문제(誤禮問題)를 둘러싼 고묘논란(告廟論難), 김석주(金錫胄) · 김만기 · 민정중(閔鼎重)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사류(士類)의 공격에서 비롯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공방, 존명의리(尊明義理)와 북벌론(北伐論)의 허실을 둘러싼 노론 · 소론 사이의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야기된 왕과 신료(臣僚)들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송시열 · 윤증(尹拯) 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회니시비(懷尼是非), 왕세자와 왕자(후일의 영조)를 각기 지지하는 소론 · 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 역사상에 저명한 정치 쟁점으로 인해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前代)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격심하였다. 남인이 청남(淸南) · 탁남(濁南)으로, 서인 역시 노론 · 소론으로, 그리고 노론이 다시 화당(花黨) · 낙당(駱黨) · 파당(坡黨)으로 분립하는 등 당파내의 이합 집산이 무성하였다. 이러는 와중에 윤휴(尹鑴) · 허적(許積) · 이원정(李元楨) · 송시열 · 김수항(金壽恒) · 박태보(朴泰輔) 등 당대의 명사들이 죽음을 당하는 화를 입었다.
정쟁 격화는 붕당정치의 말폐가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앞서 현종 때의 예송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을 행사, 환국(換局)의 방법에 따라 정권을 교체,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치세 기간 신료 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 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우선 경제적인 면을 보면,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에까지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선조 말년이래 계속된 사업을 일단 완성하였다. 또 전정(田政)에 있어서 광해군 때의 황해개량(黃海改量)에서 시작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속 추진, 강원도(1709)와 삼남 지방(1720)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전(鑄錢)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 호조 · 공조 및 훈련도감 ·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 전라 · 경상 감영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 왕의 치세 기간에 이루어진 이러한 경제 시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 대외적인 특별한 긴장 관계는 없었지만,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처가 취해졌다. 먼저 대흥산성(大興山城) · 황룡산성(黃龍山城)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였다. 특히 영의정 이유(李濡)의 건의에 따라 1712년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효종 대 이래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된 군제 개편이 사실상 완료되었다. 당시 민폐의 제1요인이던 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호포제(戶布制) 실시를 한때 추진하다가 양반층의 반대로 좌절되자 그 대신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 이에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하여 1필에서 3,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는 양정(良丁) 1인의 군포 부담을 일률적으로 2필로 균일화하였다.
대외 관계로는 일찍부터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郡地)에 관심을 보여 무창(茂昌) · 자성(慈城) 2진(鎭)을 설치, 옛 땅의 회복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압록강 연변 출입이 잦아졌는데 마침내 인삼 채취 사건을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倭館貿易)에 있어서 왜은(倭銀: 六星銀) 사용의 조례(條例)를 확정지었다.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정치적으로 명분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여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大報壇)이 세워지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다. 또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왕권 강화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 개소의 서원 사우가 건립되고 131개소가 사액되는 남설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璿源系譜)』 · 『대명집례(大明集禮)』 · 『열조수교(列朝受敎)』 · 『북관지(北關誌)』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大典續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등이 간행되었다.
왕은 민비와 희빈 장씨의 예에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고 그것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신료 간의 붕당정치 하에 견제 받고 손상되었던 왕권의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양역변통 문제에 대한 해결 시도에서 나타나듯 민생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민폐의 제거와 민생 안정책의 시행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인 면에서, 임진왜란 이후 동요된 사회에 대한 수습과 재정비 과정을 일단 마무리지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