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조선시대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반포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이다. 어려운 한자를 빌려 문자로 사용할 경우 민족의 정서는 물론이고 정확한 정보 기록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일반 민중은 말 이외에 의사를 기록하고 전달할 방법이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글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뜬 자음과, 천지인의 모양을 본뜬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적인 음운학 연구를 토대로 누구나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로,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문자이다.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 없이 생활하면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들 민중은 관청에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억울한 재판을 받아도 바로잡아 주기를 요구할 도리가 없었으며, 편지를 쓰려고 해도 그 어려운 한문을 배울 수가 없었다. 또한, 농사일에 관한 간단한 기록도 할 방법이 없었다.
세종은 백성들의 이러한 딱한 사정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던 성군으로, 주체성 강한 혁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문은 남의 글이므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더라도 매우 어색하여 뜻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그 밖의 다른 나라 글자들은 도저히 빌려 쓸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당시의 상황은 새 글자를 만들어 낼 만한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고려 말기 몽고에게 당한 곤욕으로, 그리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갈음 시기에 즈음하여, 나라 안에서는 자아 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주위의 민족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는 한자를 빌려 썼는데, 그것으로 우리말을 적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정인지의 표현을 빌리면, 한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었던 이두글[吏讀文]은 “막혀 잘 통하지 않고, 비단 품위가 없고 체계가 없어 상고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제대로 전달하지를 못한다(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훈민정음 해례) ”고 하였다. 이처럼 일반 백성의 글자 생활은 극도로 빈곤 상태에 있었다.
셋째, 세종의 개인적인 역량은 새 글자를 만드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여 성군으로서의 도리를 깊이 체득하였고, 외국 세력에 대하여 우리를 지키려는 주체성이 강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민본 정신이 투철했던데다 혁신적인 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과감한 성격을 겸비하고 있었다.
넷째, 집현전에는 세종의 이러한 정책을 도울 만한 많은 학자들이 모여 있었다.
다섯째,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중국말의 통역을 길러야 했는데, 그들을 과학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중국말의 소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 운학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운학의 체계는 새 글자를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 세종은 ‘훈민정음’이라는 새 글자를 만들어 냈는데(세종실록과 훈민정음해례의 끝에 실린 정인지의 꼬리글에 따름), 이러한 독창적인 글자를 만든 일은 세계 역사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다.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원본 『훈민정음』은 설명문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 훈민정음 본문이 실려 있고, 다음에 훈민정음 해례가 있다. 해례는 ‘제자해(制字解)’ · ‘초성해(初聲解)’ · ‘중성해(中聲解)’ · ‘종성해(終聲解)’ · ‘합자해(合字解)’ · ‘용자례(用字例)’로 다섯 가지 ‘해(풀이)’와 한 가지 ‘예 (보기)’로 되어 있다.
본문은 ‘國之語音(국지어음)’으로 시작되는 세종의 서문과 훈민정음 28자의 발음법을 한자로 풀이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풀이 방법은 다음과 같다.
“ㄱ은 어금닛소리니 ‘君’자의 처음 나는 소리(첫소리, 초성)와 같다. 나란히 쓰면 ‘虯’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 ” ㄱ소리는 한문글자 ‘君’의 처음에서 나는 소리를 적는 것이라 하여, 이 글자의 소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나란히 쓰면 ‘ㄲ’이 되는데, 이 글자는 ‘虯’자의 처음에서 나는 소리를 적는 것이라 하였다(지금 소리로는 虯는 ‘규’인데, 당시 사람들은 이 글자의 첫소리는 된소리로 내는 것이 옳은 발음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첫소리( 초성) 17글자(ㄱ ㅋ ᄠᅳᆷ ㄷ ㅌ ㄴ ㅂ ㅍ ㅁ ㅈ ㅊ ㅅ ㆆ ㅎ ㅇ ㄹ ᅀᅠ)와, 그 중의 ‘ㄱ ㄷ ㅂ ㅈ ㅅ ㅎ’ 여섯 글자를 나란히 쓴 ‘ㄲ ㄸ ㅃ ㅉ ㅆ ㆅ’ 글자의 소리를 풀이하고 있다.
가운뎃소리( 중성)는 ‘ ·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의 열하나인데, 이에 대해서는, “ · 는 ‘呑’자 가운뎃소리와 같다. ”와 같은 방법으로 풀이하고 있다. 곧, ‘呑’자는 세 소리로 되어 있는데, ‘ · ’는 그 가운데에서 나는 소리를 적는 글자라는 것이다.
끝소리( 종성, 받침)는 첫소리 글자를 그대로 가져다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첫소리나 끝소리에, 23가지의 첫소리 글자 이외의 글자가 쓰이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입술가벼운소리(脣輕音)’는 ‘ㅂ’과 ‘ㅇ’을 내리써서 ‘ㅸ’로 적도록 하고, 첫소리나 가운뎃소리나 끝소리에 둘 이상의 소리가 날 때는, 각각 두 글자 이상을 한 자리에 가로 나란히 쓰도록 하고 있다(예:ᄡᆞᆯ · ᄆᆡᆼᄀᆞᆯ · ᄃᆞᆰ).
첫소리 글자와 가운뎃소리 글자가 어울릴 때는, 가운뎃소리 글자의 놓이는 자리가 모든 경우에 똑같지 않아서, ‘ · ’와 ‘ㅡ’ 및 ‘ㅡ’를 가진 글자는 첫소리 글자의 밑에 쓰고, ‘ㅣ’와 ‘ㅣ’를 가진 글자는 그 오른쪽에 쓰도록 하였다(이것은 모아쓴 글자의 모양을 한문글자의 모양에 어울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첫 · 가운데 · 끝 글자가 한데 모여야 소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모인 소리에는 다시 소리의 높낮이가 얹히게 된다. 높낮이는 세 가지이다. 높은소리(거성)는 왼쪽에 점을 하나 찍고, 낮은소리(평성)는 점을 찍지 않고, 낮다가 높아가는 소리(상성)는 점 둘을 찍어 구별하도록 하였다.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해례가 나타남으로써 그 원리가 밝혀졌다. 제자해에 “초성은 17글자인데, 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꼴을 본뜨고, 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꼴을 본뜨고, 입술소리 ㅁ은 입 모양을 본뜨고, 잇소리 ㅅ은 이의 모양을 본뜨고, 목소리 ㅇ은 목의 모양을 본떴다. ”라고 하였다.
그 때의 언어학자들은 닿소리(초성)를 그 내는 자리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혓바닥의 뒤쪽을 여린입천장에 붙여 내는 소리를 ‘어금닛소리’, 혀끝을 잇몸에 붙여 내는 소리를 ‘혓소리’, 입술에서 나는 소리를 ‘입술소리’, 공기가 이끝에 닿아 부스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리는 ‘잇소리’, 목 안에서 나는 소리는 ‘목소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 다섯 가지 소리 가운데서 한 소리씩을 가려, 그 소리를 적는 글자 다섯을 만들었다. 첫째, 어금닛소리는 /ㄱ, ㅋ, ᄠᅳᆷ/음소들인데, 그 가운데서 /ㄱ/ 음소를 적는 글자를, 그 소리 낼 때의 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둘째, 혓소리는 /ㄴ, ㄷ, ㅌ/ 음소들인데, 이 가운데서 /ㄴ/ 소리를 적는 글자를, 역시 같은 원리에 따라 만들었다.
셋째, 입술소리는 /ㅁ, ㅂ, ㅍ/인데, 그 가운데서 /ㅁ/ 소리를 적는 글자를, 입술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넷째, 잇소리는 /ㅅ, ㅈ, ㅊ/ 음소들인데, 그 가운데서 /ㅅ/ 소리 적는 글자를, 이가 나란히 박혀 있는 줄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다섯째, 목소리는 /ㅇ, ㆆ, ㅎ/ 음소들인데, 그 가운데서 /ㅇ/소리 적는 글자를,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ㅇ/은 소리 없는 글자이나 그들은 이것도 목구멍에서 나는 어떠한 소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를 만들어내고, 다음으로는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다가 획을 하나씩 더하여 아홉 글자를 만들었다.
ㄱ→ㅋ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
다른 글자들은 획을 하나씩 덧붙여 나간 것이 분명하나, ‘ㅁ’ 계통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ㅁ’에 획을 더해서는 글자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그 꼴을 약간 바꾼 것이다.
나머지 세 글자인 ‘ᄠᅳᆷ ㄹ ᅀᅠ’은 각각 ‘ㅇ ㄴ ㅅ’의 꼴을 약간 바꾸어 만들되, 여기에는 소리의 세기에 따라 획을 더하는 원리가 적용된 것은 아니다.
된소리는 현대국어 음운론에서는 대개 한 독립된 음소로 보는 것이 상례이다. 그 때에는 이 소리들을 전탁(全濁)이라 하고, 이것을 적기 위해서는 전청(全淸)이나 차청(次淸)의 글자를 나란히 쓴 ‘ㄲ ㄸ ㅃ ㅉ ㅆ(ㆅ)’으로 하였다. 그 이유는 전청의 소리가 엉기면 전탁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다만 ㆅ은 예외). 또, 한 가지 입술가벼운소리를 적는 방법으로 ‘ㅂ’에 ‘ㅇ’를 내리써서 ‘ㅸ’를 만들어 내었다.
이리하여 첫소리(초성)를 적는 글자를 다 만들고, 이것을 내는 자리에 따라 아 · 설 · 순 · 치 · 후의 다섯 ‘음’으로 나누고, 그 내는 방법에 따라 전청 · 차청 · 전탁 · 불청불탁의 네 가지로 나누었다.
닿소리는 모두 입안의 어떠한 자리에서 특별한 막음이 있으므로, 그 막음의 방법과 자리를 지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한 음성기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서 닿소리(첫소리) 글자를 만들어 내었다.
홀소리(가운뎃소리, 중성)는 입안에 아무런 막음도 생겨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홀소리가 나누어지는 것은 혀의 여러 가지 모양에 의해서이다. 이것을 그려 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대 음성학에서 혀의 이러한 모양을 잡을 수 있는 것은 X-선 사진에 의해서이므로 한글을 만들 때 닿소리 글자보다 홀소리 글자를 만드는 데 힘이 들었을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홀소리 글자 만드는 원리는 완전히 다른 데에서 구하였다. 홀소리와 닿소리는 서로 그 성질이 다르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이 방법은 성공적이었다. 닿소리 글자의 기본을 다섯으로 정했듯이, 홀소리 글자의 기본은 셋으로 정하여, ‘ ·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이렇게 세 소리의 글자를 먼저 만든 것은, 홀소리를 세 종류로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계통→‘ · ’ 계통→‘ㅗ, ㅏ’ (하늘)
‘ㅡ’ 계통→ ‘ㅡ’ 계통→ ㅜ, ㅓ’ (땅)
중립→‘ㅣ’ (사람)
다른 모든 글자는 이 세 글자를 맞추어 만들었다.'ㅗ, ㅏ’ 위와 바깥 쪽에 있는 것은 이 두 소리는 하늘에 속해서 양(陽)이기 때문이고, ‘ㅜ, ㅓ’ 아래와 안쪽에 있는 것은, 이 두 소리는 땅에 속해 음(陰)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점을 하나 찍는데도 그 철학적인 이유를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ㅣ’에서 시작하는 겹홀소리는 점을 둘로 해서 그 소리가 겹임을 암시하고 있다.
스물여덟의 글자는 한 줄로 쓰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이것들은 한 음절을 한 묶음으로 하여 모아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한자와 아울러 썼을 때에 한자의 꼴과 균형이 잡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우리말의 표준발음으로는, 소리의 길이만 있고, 높낮이는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각 낱말의 각 음절은 높음 · 낮음 · 높아감의 세 가지 높낮이를 일정하게 가지고 있었다.
낮은 소리는 평성(平聲)으로 점을 찍지 않고, 높은 소리는 거성(去聲)으로 글자의 왼쪽에 점을 하나 찍고, 또 낮다가 높아가는 소리는 상성(上聲)으로 점을 둘을 찍도록 하였다.[예:활(平), · 갈(거), :돌(상)]
훈민정음을 만들고, 그 원리를 풀이한 사람들은 사람의 소리나 글자까지도 단순한 물질적인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이것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 원리란 음양과 오행(五行)이다.
사람의 말소리가 음양과 오행에 근본을 두고 있고, 우주의 모든 현상이 또한 그 원리에 따라 운행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소리와 계절의 운행, 소리와 음악과의 사이에 일치점이 있음은 당연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소리를 오행에다 결부시킨 이유를 설명하되 각각 두 방면으로 보고 있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한 방면으로는 그 소리가 나는 자리, 곧 목구멍 · 어금니 · 혀 · 이 · 입술 자체의 성질이 각각 물 · 나무 · 불 · 쇠 · 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목구멍은 깊고 윤택하고, 어금니는 착잡하고 길고, 혀는 날카롭고 잘 움직이고, 이는 단단하고 부러지고, 입술은 모나고 합해져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 다른 방면으로는 그 소리 자체가 다섯 물질의 성질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목소리(ㅇ, ㆆ, ㅎ, ㆅ)는 비고 통하니, 물이 비고 밝고 흘러 통함과 같고, 어금닛소리(ᄠᅳᆷ, ㄱ, ㅋ, ㄲ)는 목소리와 비슷하나 실(實)하니(비지 않으니), 나무가 물에서 나서 형체가 있음과 같고, 혓소리(ㄴ, ㄷ, ㅌ, ㄸ)는 구르고 날리니, 불이 구르고 펴고 날림과 같고, 잇소리(ㅅ, ㅈ, ㅊ, ㅆ, ㅉ)는 부스러지고 막히니, 쇠가 부서져서 불림을 입어 이루어짐과 같고, 입술소리(ㅁ, ㅂ, ㅍ, ㅃ)는 머금고 넓은데, 이것은 흙(땅)이 만물을 머금어서 넓고 큼과 같다는 것이다.
나는 자리의 성질로 보나, 그 소리의 성질로 보아, 모두 오행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 물론 견강부회된 점이 없지는 않으나, 우주의 모든 현상을-사람의 소리마저도-하나의 원리로 통일시키려는 동양적인 철학사상이 배여있기 때문에 나타난 논증이다.
가운뎃소리는 음양에 붙였으니, 하늘에 속하는 소리는 양이고, 땅에 속하는 소리는 음이라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홀소리어울림( 모음조화)의 현상으로 분류한 과학적인 홀소리 분류법과 일치한다.
한글을 일컫는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당시에는 ‘훈민정음’이라 불렀는데,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 때의 소리는 글자와 통한다. ‘바른’이라는 꾸밈말을 붙인 이유는, 한자를 빌려 쓰는 것과 같은 구차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글자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훈민정음』은 바로 이 이름을 쓴 책이고, 그 밖의 여러 문헌에도 이 이름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훈민정음’을 줄여 ‘정음’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이름은 훈민정음 해례의 끝에 있는 정인지의 글에 이미 나타나 있다.
‘언문(諺文)’이라는 이름은 최근까지 쓰였는데, 이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말이다. 원래 ‘언’이란 ‘우리말’ 또는 ‘정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에 보면, “문(文)과 언(諺)을 섞어 쓸 때는……” 또는 “첫소리(초성)의 ㆆ과 ㅇ은 서로 비슷하여 언에서는 가히 통용될 수 있다. ”라고 하였고, “반혓소리 ㄹ은 마땅히 언에 쓸 것이지 문에는 쓸 수 없다. ”고 하였는데, 여기서‘언’은 우리글 · 우리말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실록』에는 언문청(諺文廳)이라는 말이 나오고(28년 11월조), 또 바로 ‘언문’이라는 말도 나타난다(25년 12월조). 또, 그 뒤로는 ‘언서(諺書)’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한문을 ‘진서(眞書)’라 한 데 대립시킨 말이다.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반절(反切)’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초 · 중 · 종성을 따로 분리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정음이 초 · 중 · 종성을 분리하여 표기하는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고 보아 붙인 이름인 듯하다.
‘암클’이라는 이름도 쓰였으니, 이는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이다. 선비가 쓸 만한 글은 되지 못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1908년 주시경(周時經)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가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바로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고친 후, 1913년 4월에는 다시 그 이름을 ‘한글모’로 고쳤다. 이 때부터 ‘한글’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듯하며,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27년 한글사에서 펴낸 『한글』(7인의 동인지)이라는 잡지에서부터이다.
‘한글’의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니, 우리글을 ‘언문’이라 낮추어 부른 데 대하여,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권위를 세워 준 이름이다. 이는 세종이 ‘정음’이라 부른 정신과 통한다 할 것이다.
정음을 만들던 당시에 한글 낱 글자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 부르는 ‘기역, 니은, ……’등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6세기에 나온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이다.
최세진은 ‘ㆆ’을 없애고 나머지 27자를 ① 첫소리에만 쓰이는 8글자, ② 첫소리 · 끝소리에 두루 쓰이는 8글자, ③ 가운뎃소리에만 쓰이는 11글자로 나누고, ②와 ③ 에 대해서는 지금과 같은 이름을 붙이고 ①에 대해서는 ‘ㅈ(지), ㅊ(치), ㅎ(히)……’와 같이 한 음절 이름을 붙였다. 첫소리로만 쓰이므로 첫소리로 쓰인 예만 보인 것이다.
1933년 조선어학회( 한글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내면서 모든 닿소리 글자는 받침으로 쓸 수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①도 ②처럼 두 음절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28글자 가운데 지금 쓰이지 않는 ‘ㆆ, ㅿ, · (ᄋᆞ)’의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고, ‘ㅇ’과 ‘ㆁ’의 구별이 없어짐에 따라 그 이름도 하나로 통일되었다.
인류의 참된 역사는 언어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록이 없는 시기는 역사 시기가 되지 못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의 우리 나라에도 언어의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으며, 수많은 비석문을 비롯하여 개인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록들이 있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어 놓은 기록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 한아버지(할아버지)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바로 전해 주기에는 부족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한 언어는 그것을 모국말로 하여 자라는 겨레의 생각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여러 민족의 생각하는 방식이 모두 조금씩 다른 것은 여기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한문은 그 어휘나 문법의 체계에 있어 중국의 말이지 우리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아버지들에 대한 한문으로 된 기록은 바로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중국 사람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참된 모습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기록들은 그 양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기록 당시의 언어를 복원하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아버지들에 대한 참된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 때부터 우리 한아버지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게 되며, 그 생생한 감정의 움직임을 바로 피부로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참된 역사 시기가 열리며, 참된 국문학이 시작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말 자체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부터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참된 우리 겨레의 역사 시대의 출발을 의미하는, 우리 겨레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사실이 기록에 난 것은 『세종실록』 25년(음력 1443년)이다. 그 해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몸소 언문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내니……이것을 훈민정음이라 부른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 ”라는 기록이 있다. 즉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이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음력 12월이다.
그러나 이 때 아직 책으로서 국민에게 반포되지는 않았던 듯하여, 『세종실록』 28년(1446년) 병인 9월조에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是月訓民正音成).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만들어진 것을 말함이니, 1443년 음력 12월에 일단 완성된 훈민정음 글자를 다시 다듬고 그 자세한 풀이를 하여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라는 책으로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40년 7월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해례본)의 끄트머리에 붙인 정인지의 글에 있는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臣鄭麟趾 拜手稽首謹書”라는 말로 보아 더욱 분명해진다. 정통 11년은 1446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는 것을 총칼로 누르는 ‘어문 말살 정책’을 썼다. 당시의 우리 겨레에게는 우리말을 쓰는 것이 민족 정신을 가다듬는 한 방편이었고, 우리글을 쓰는 것을 일종의 독립 운동으로 여겼으니, 그 때에는 ‘한글’이 곧 우리 민족 정신의 의지할 곳이었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80년이 되던 1926년 조선어연구회에서는 음력 9월 끝날인 29일을 양력으로 고쳐 10월 28일을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정하고, 이날을 ‘가갸날’이라 하였다. 당시로서는 반포의 날을 정할 수 있는 기록은 『세종실록』 28년의 기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나 좀더 가까운 날짜를 알게 되었다. 정인지의 글에 훈민정음 반포가 9월 상순의 일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는 반포한 날을 음력 9월 10일로 잡고,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세종 때의 언어관은 바른 정치는 바른 소리(正音)에서 나온다는 성리학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즉, 올바른 소리를 모르고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사상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홍무정운(洪武正韻)』이었다.
이 두 책은 모두 그 이전 운서의 음이 어느 한 지방의 음만을 대표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중국 어느 지방에서나 통할 수 있는 정음(正音, 標準音)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언어관을 따르면 언어의 방언적 분포나 변천은 잘못된 것이고 고쳐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비단 고유어의 표기 수단을 만든다는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훈민정음을 만든 뒤 시행한 최초의 여러 사업 가운데 상당히 비중이 높았던 『동국정운(東國正韻)』과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편찬에서도 드러난다.
『동국정운』은 그 당시 우리의 한자음을 중국음과 비교해 볼 때 왜곡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다. 물론 바로잡는다고 해도 완전히 중국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지만, 이러한 목적 때문에 『동국정운』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게 편찬되었으며, 당시의 중국음에 근접시키려는 노력을 담고 있었다.
요컨대, 『동국정운』은 당시의 한자음을 통일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나, 현실 한자음과의 거리로 인하여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30년 만에 쓰이지 않게 되었다. 『홍무정운』은 명나라 홍무제(洪武帝)가 중국의 한자음을 통일시키려는 목적으로 편찬한 책이었는데, 『동국정운』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조에는 이 책의 음을 중국의 표준 발음으로 믿고 있었고, 따라서 『홍무정운역훈』은 중국 표준 발음을 교육시키려는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정음사상(正音思想)’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한 동인(動因)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또 건국 초부터 인근 여러 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중요한 국가 시책의 하나로 대두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능통한 역학자(譯學者)의 양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조정에서는 1393년(태조 2) 9월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학(四學)이라 하여 한학(漢學) · 몽학(蒙學) · 왜학(倭學) · 여진학(女眞學)을 교육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한학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외국어를 교육하는 데에는 정확한 발음 기호가 필수적이었고, 이러한 필요에 부응한 것이 훈민정음이었다.
훈민정음과 그와 관련된 사업(『동국정운』 등의 편찬과 여러 가지 번역 사업)을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공식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던 세종은 여러 개의 사설 기관을 마련했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언문청이었다(문종 때의 기록으로는 正音廳). 실록에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 곳에서 훈민정음과 그와 관련된 사업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책방(冊房) · 묵방(墨房) · 화빈방(火鑌房) · 조각방(彫刻房) 등을 사설 기관으로 두었는데, 이들도 훈민정음의 편찬 및 그에 이은 번역 사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음 문자인 훈민정음이 어느 문자의 계통을 이어받아 창제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설명이나 학설을 훈민정음 기원설이라고 한다.
1940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여러 갈래의 기원설이 존재했으나, 원본 『훈민정음』의 제자해(制字解)에서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라고 하여 훈민정음의 창제가 ‘상형’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밝히고 있어 다른 문자로부터의 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해의 “各象其形而制之(각각 그 꼴을 본떠 만들었다).”와 원본 『훈민정음』 끝 부분의 정인지 서문에 “象形而字倣古篆(상형을 하되 글자가 고전과 비슷하다. 또는 고전을 본떠 상형하였다)”이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여러 기원설이 주장되고 있다.
음소 문자인 훈민정음은 그 문자적인 성격에 있어 한자와 다르나, 그 제자(制字)의 기본 방식에 있어서는 한자의 제자법을 따를 수도 있다. 한자 제자법의 바탕이 되는 것은 육서법(六書法)이며, 그 중에서도 상형과 지사(指事)가 기본이 된다.
따라서, ‘各象其形而制之’와 ‘象形而字倣古篆’은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가 한자와 마찬가지로 ‘상형’이며, 이렇게 해서 자형(字形)이 고전(古篆)과 비슷하게 되었음을 설명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 중에 나타나는 “글자의 꼴이 비록 옛날의 전자(篆字)를 본떴으나(字形雖倣古之篆文)”라는 구절도 어디까지나 자형에 대한 것이지 제자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면 위와 같은 설명은 합리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象形而字倣古篆’은 ‘고전’을 참고로 하여 먼저 제자한 다음 상형설을 결부시켰음을 설명한 글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에는 원나라의 파스파 글자까지 결부시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파스파 글자를 참고하되 고전 글자와 비슷하게 생긴 파스파 글자와 마찬가지로 훈민정음도 고전 글자처럼 제자하고, 여기에 상형설을 결부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음소 문자인 훈민정음은 글자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몽골 글자나 파스파 글자와 같고, 음절 단위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보아서는 한자나 파스파 글자와 같은데,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기원설은 제자 방식이나 자체(字體)의 유사성에 더 중점을 두고 설명해 온 느낌이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지금까지의 기원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발음기관 상형기원설 : ‘정음자(正音字)’가 모두 발음할 때의 발음 기관의 상태나 작용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신경준(申景濬) · 홍양호(洪良浩) · 최현배(崔鉉培) 등 가장 많은 학자들이 이 설을 주장하였다.
② 고전기원설(古篆起源說) :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조(권 제102, 42장)에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가 고전을 본떴다(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고전 기원설이 나오게 되었으며, 역시 『세종실록』에 기재되어 있는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문에도 “글자의 꼴이 비록 옛날의 전자를 본떴으나(字形雖倣古之篆文)”(세종 26년 2월)라고 되어 있어 이 설을 더욱 뒷받침하였다.
또, 세종 28년 9월조에 실려 있는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 가운데 ‘象形而字倣古篆’이라고 구절도 이 기원설의 근거로 내세워지고 있는데, 다만 ‘象形而字倣古篆’에서 ‘상형’과 ‘자방고전’을 분리시켜 ‘상형’은 제자 방식을 말한 것이고, ‘자방고전’은 최만리가 지적한 대로 자형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기원설은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실려 있는 「앙엽기(盎葉記)」나 일부 서양학자들의 저술에서 주장되었으며, 최근의 국내 학자 가운데에도 이 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③ 범자기원설(梵字起源說) : 조선 성종 때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훈민정음을 ‘其字體 依梵字爲之’라고 말한 이후로 광해군 때 이수광(李睟光)이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8에서 “우리 나라 언서는 글자의 꼴이 전부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 ”라고 한 데서 범자기원설이 비롯되었는데, 이는 주로 자체의 유사성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 뒤 영조 때의 황윤석(黃胤錫), 1930년대의 이능화(李能和) 등 국내외 몇몇 학자들이 이 설을 주장하였으나 근래에는 이를 주장하는 이가 없어졌다.
④ 몽골자 기원설 : 조선 숙종 때 이익(李翼)이 『성호사설』에서 훈민정음이 몽골글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순조 때 유희(柳僖)도 『언문지(諺文志)』에서 ‘몽골의 글자모양(蒙古字樣)’을 따라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⑤ 범자와 몽골자 기원설 : 이 기원설은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주장한 것이다.
⑥ 고대문자 기원설 : 영조 때 신경준이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서문에서 “우리나라(東方)에는 옛날에 민간이 쓰는 문자가 있었다(東方舊有俗用文字).”라고 한 것과, 기타 비문(碑文) 등의 글을 근거로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도 고대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다.
⑦ 역리 기원설(易理起源說) : 훈민정음 창제 당시 그 학문적 배경이 되었던 성리학을 확대 해석, 훈민정음이 성리학의 바탕이 된 역학의 원리에 따라 창제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등이 이에 속한다.
⑧ 창문 상형 기원설 : 서양학자 에카르트(Eckardt, P. A.)가 주장한 것이다.
⑨ 기一성문도 기원설(起―成文圖起源說) : 자체(字體)의 유사성보다도 제자 방식을 가지고 훈민정음의 기원을 설명한 것이다. 정초(鄭樵)의 『육서략(六書略)』에는 한 항목으로서 ‘기一성문도’가 있는데, 여기에서 상형의 기본이 되는 자획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 때 이것을 참고로 하여 한글의 자형을 제자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이다.
⑩ 기타의 기원설 : 서장문자(西藏文字) 기원설, 팔리 문자(Pali 文字) 기원설, 거란문자 · 여진문자기원설, 일본 신대문자(神代文字) 기원설, 악리(樂理) 기원설 등이 있으나 모두 참고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는 견해들이다.
다만, 훈민정음과 같은 음소 문자를 창제할 때 15세기 당시의 이웃 나라들의 글자는 물론,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던 모든 글자들을 참고했을 것임은 짐작할 만한 일이다.
중국 음운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중세 국어를 우선 음절 단위로 파악한 다음, 이를 다시 초성(음절 첫 자음) · 중성(음절 안의 모음) · 종성(음절 끝 자음)의 세 단위로 분석하고, 이들을 기준으로 하여 제자하였다.
제자 방법은 상형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초성 글자는 발음 기관을 상형의 대상으로 삼되 조음 부위(調音部位)별로 한 음(즉 한 글자)씩을 기본 글자로 삼고 이들의 조음 상태를 상형 대상으로 했으며, 기본 글자 5자 이외의 나머지 12글자들은 ‘여(厲:소리의 세기)’를 음성 자질(音聲資質)로 삼아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해 가는 방법을 취하였다.
중성(모음) 글자는 중세 국어의 7단 모음 체계를 전설모음(前舌母音) · 중설모음(中舌母音) · 후설모음(後舌母音) 계열의 대립으로 보고, 이들 각 계열에서 주로 중모음(中母音) 하나씩을 골라 천(天) · 지(地) · 인(人) 삼재(三才)를 상형하여 제자했으며, 나머지 모음들은 이들의 결합으로 제자하였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을 제자할 때 상형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발음 기관과 천 · 지 · 인 삼재였다. 발음 기관을 상형하여 기본적인 자음 글자를 만들고 천 · 지 · 인 삼재를 상형하여 기본적인 모음자를 만든 것이다. 상형 방법에 있어서는 송대 문자학과 이웃 나라들의 글자를 참고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창제된 훈민정음의 자음자(초성 글자)와 모음자(중성 글자)는 〈표 1〉 · 〈표 2〉 · 〈표 3〉과 같으며, 종성 글자는 따로 만들지 않고 초성 글자를 그대로 쓰도록 하였다.
자리 \ 방법 | 전청 | 차청 | 전탁 | 불청불탁 |
---|---|---|---|---|
어금닛소리 | ㄱ | ㅋ | ㄲ | ᅌ |
혓소리 | ㄷ | ㅌ | ㄸ | ㄴ |
입술소리 | ㅂ | ㅍ | ㅃ | ㅁ |
잇소리 | ㅅ, ㅈ | ㅊ | ㅆ, ㅉ | ᅀ |
목소리 | ᅟᅳᆼ | ㅎ | ᅘ | ㅇ |
〈표 1〉 첫소리 글자(초성) |
하늘 | · | ||||||||
---|---|---|---|---|---|---|---|---|---|
땅 | ㅡ | ||||||||
사람 | ㅣ | ㆎ | |||||||
〈표 2〉 홀소리 글자(중성) |
그런데 훈민정음 창제자가 파악한 15세기 중세 국어의 자음 체계는 23이었으므로 가획법으로 만들어 낸 자음글자 17자 이외에 각자병서(各自並書)에 의해 6자(ㄲ, ㄸ, ㅃ, ㅉ, ㅆ, ㆅ)를 더하여 23자모체계를 갖추도록 했고, 23자모체계에 포함되지는 못했으나 15세기 중세 국어에서 실제로 발음되고 있었던 유성 양순마찰음(有聲兩脣摩擦音)의 표기를 위해 연서법(連書法)을 마련하여 따로 ‘ㅸ’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는 조선한자음(朝鮮漢字音)의 정리 사업도 함께 진행되었는데, 이 정리 사업의 결과 파악된 조선한자음의 자모 체계, 곧 『동국정운』의 자모 체계는 훈민정음과 똑같은 23자모체계였다.
15세기 중세 국어 및 한자음에는 7개 단모음 이외에 여러 개의 중모음(重母音)이 있었는데, 이를 표기하려면 재출자(再出字)와 합용법(合用法)을 이용하여 7개 단모음 글자를 다시 합하여 쓰도록 하였다 〈표 2〉.
또한 15세기 중세 국어는 성조 언어였으므로, 이 성조를 나타내기 위해 방점법(傍點法)을 마련하고, 평성(平聲)에는 무점(無點), 상성(上聲)에는 2점, 거성(去聲)에는 1점을 표기된 음절의 왼쪽에 찍도록 했으며, 중세 국어의 어두자음군(語頭子音群)과 종성의 자음군 역시 초성 글자의 합용으로 표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글자의 성격으로는 표음 문자이며 음소 문자인 훈민정음을 실제 사용할 때는 초성글자 · 중성글자 · 종성글자(초성글자를 그대로 사용)를 합하여 음절 단위로 표기하도록 규정함으로써 마치 음절 문자처럼 쓰이게 하였다.
세종이 표기 수단이 없는 백성들에게 이를 마련해 주기 위해 15세기 중세 국어를 토대로 하여 국어의 문자화(文字化)에 성공하고, 이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화 사업(敎化事業)을 실시한 것을 훈민정음에 의한 훈민 정책이라고 한다.
실지로 애민 사상이 남달리 강했던 세종은 조선 건국 초부터 표방해 온 왕도정치사상(王道政治思想) · 천도사상(天道思想) · 예치주의사상(禮治主義思想) · 법치사상(法治思想) 등을 바탕으로 하여, 유교 국가로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정신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훈민정음은 대개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된 이래, 새 글자의 음가와 사용법을 설명한 한문책 『훈민정음』(1446년 간)과 『훈민정음국역본』(1447)에 이용된 것을 비롯, 경서 · 불서(佛書)의 번역, 『동국정운』과 같은 운서 편찬, 『농사직설(農事直說)』 ·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과 같은 실용 위주의 책, 『유합(類合)』과 같은 한자 교과서, 『내훈(內訓)』 같은 교화서(敎化書), 「용비어천가」와 같은 문학 작품 표기에 이용되었다.
이들을 분야별 · 시대별로 개관해 보면, 훈민정음은 창제된 뒤 조선 건국을 찬양하기 위해 편찬된 『용비어천가』(1447년 간) 안의 국문 가사를 표기하는 데 가장 먼저 쓰였고,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1481년 간) 표기에 쓰였다.
훈민정음 창제 사업과 함께 『동국정운』(1447년 간)을 편찬하고, 새로 바로잡은 우리 나라 한자음(漢字音)을 보이기 위하여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도 백성을 위한 하나의 교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표준 중국 본토자음(本土字音)을 나타내기 위해 편찬된 『홍무정운역훈』(1455년 간)의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또, 15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유합』과, 1527년(중종 22) 최세진이 편찬한 『훈몽자회』, 그리고 이보다 앞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천자문(千字文)』과 같은 아동용 한자 입문서에서도 훈민정음으로 석(釋: 새김)과 음(音)을 표기하여 학습 효과를 거두도록 했는데, 이러한 예가 훈민정음이 교화 사업에 쓰인 가장 좋은 본보기에 속한다.
이상과 같은 아동용 계몽 서적 이외에 훈민정음 창제 직후부터 한문으로 쓴 교화 서적을 번역하여 백성들이 쉽게 읽도록 하려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먼저 세종의 명에 따라 1434년에 편찬,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세종 때부터 성종 때(1481년경)에 걸쳐 번역, 간행되었고, 부녀 훈육에 필요한 대목을 『소학(小學)』 등 4책에서 뽑아 편찬한 『내훈』도 1475년 번역문과 함께 간행되었다.
이러한 교화 서적으로는 본받을 만한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행실을 담은 내용을 모아 1518년 편찬, 번역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가 있으며, 『삼강행실도』의 속편인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도 1514년에 편찬, 번역, 간행되었다.
또,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지침서로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1518년 간)과 『정속언해(正俗諺解)』(1518년 간), 『경민편(警民編)』(1519년 간) 등이 번역, 간행되었다.
훈민정음은 의서와 농서(農書) 등 일반 대중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야에 있어서도 훈민용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의서 분야로는 『구급방언해(救急方諺解)』(1466년 간), 어디서나 구급용으로 쓸 수 있도록 편찬, 번역된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1489년 간)을 비롯,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1538년 간), 『간이벽온방』(1525년 간), 『우마양저염역치료방(牛馬羊猪染疫治療方)』(1541년 간),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1542년 간) 등이 있고, 농업 분야 서적으로는 강희맹(姜希孟)이 편찬한 『금양잡록(衿陽雜錄)』(1492년경 간)과, 세종 때 한문으로 편찬하고 후대에 번역한 『농사직설』 등이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국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이를 널리 읽히려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부터 사서오경의 번역이 추진되어, 먼저 구결(口訣)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다음 16세기 후반 선조 때에 이르러 그 번역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경서의 번역(언해) 사업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유교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이상에서 열거한 경서 · 의서 · 농서 · 계몽서 이외에도 사회 교화를 위한 서적의 간행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러한 서적들은 대개 교훈을 위주로 한 내용이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광해군 때에 이르러 효자 · 열녀 · 충신의 행실을 본보기로 보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7년 간)가 간행되었으며, 인조 초에는 『오륜가언해(五倫歌諺解)』, 숙종 때에는 중종 때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이 번역, 간행되었다.
영조 때에는 『삼강행실도』 · 『이륜행실도』 · 『경민편언해』 · 『내훈』 등이 중간되는 동시에 『어제여사서언해(御製女四書諺解)』(1736년 간) · 『어제상훈언해(御製常訓諺解)』(1745년 간) 등이 간행되어 사회적인 귀감을 보였다.
영조 이후 두드러진 특징은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문장을 통해 교훈을 내린 윤음(綸音, 원문은 한문)이 많이 간행된 것이다. 영조 때부터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1757년 간) · 『유중외대소신서윤음(諭中外大小臣庶綸音)』(1782년 간) · 『유호남육읍인민윤음(諭湖南六邑人民綸音)』(1794년 간) 등 수많은 윤음이 간행되었는데, 이러한 윤음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한 『척사윤음(斥邪綸音)』(1839년 간), 임오군란 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내린 『유팔도사군기로인민등윤음(諭八道四郡耆老人民等綸音)』(1882년 간) 같은 것도 있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나 훈민정음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훈민정음은 창제되자마자 불경 번역에 이용되었는데, 이는 어려운 불경(한문)을 쉽게 번역하고 알기 쉬운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1447년에는 벌써 방대한 분량으로 간행된 『석보상절(釋譜詳節)』의 표기에 훈민정음이 이용되었고, 같은 해 간행된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석가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500여 곡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였다.
그 뒤 세조 때에 이르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어 대대적으로 불경의 번역 간행 사업이 진행됨으로써 상당한 분량의 15세기 중세 국어 산문(散文)이 훈민정음으로 표기되었다.
간경도감에서는 『능엄경언해(愣嚴經諺解)』(1462년 간) ·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1463년 간) 등 10여 종의 불경을 번역, 간행하였고, 그 뒤로도 역대 왕 또는 왕비 등에 의해 불경이 여럿 간행되었으며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이 밖에 훈민정음은 『오대진언(五大眞言)』(1485년 간)과 같은 범어(梵語)로 된 불경의 음을 표기하는 데에도 쓰였다.
이상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역대 왕들이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훈민정음을 얼마나 사용해 왔는가를 간략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기까지도 조선의 공용어 및 공용 문자는 어디까지나 한문과 한자였다.
그러다가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1894년 11월 21일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 본(本)을 삼고, 한역(漢譯)을 부하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뒤부터의 일이다.
물론, 이 법령이 바로 널리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이 무렵에 이미 훈민정음만으로 신문 · 문학작품 · 종교서적 등이 간행되기도 했으므로 백성들을 깨우치는 데 훈민정음이 더욱 큰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문 문학의 본격적 개화의 길을 열었다. 정음의 반포에 앞서 1445년 한글로 된 최초의 문학 작품인 「용비어천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역성 혁명을 합리화하고,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총 125장의 악장체 영웅서사시이다. 단편적 사실을 각 장별로 서술하고 있어 본격 영웅서사시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국문 서사시의 선편을 잡은 작품이다.
1447년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석보상절』은 「석가보(釋迦譜)」의 내용을 국문으로 옮긴 것인데, 후대의 불경언해류와는 달리 아름다운 우리 문체로 된 산문 서사문학의 최초의 작품이다. 『석보상절』을 본 세종은 같은 해인 1447년 석가의 공덕을 예찬하여 친히 악장체의 장편시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후에 세조는 1459년 위의 두 작품을 합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한 줄거리의 「월인천강지곡」 몇 수를 먼저 싣고, 그 내용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대목을 그 다음에 실었다. 그러나 두 작품을 합편하면서 권의 편차와 문장에 상당한 수정이 가해졌다.
이상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 국가 혹은 왕가가 주도하여 제작한 국문 문학 작품으로, 국문의 문학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험, 확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문의 문학적 기능이 관의 주도 아래 조심스럽게 실험,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학에 심취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이를 외면하고 여전히 한문을 문학 수단으로 삼았다.
일반 국민의 계몽과 교화를 위한 훈계서류의 언해와 세조와 같은 신심 깊은 군왕의 각별한 배려로 추진된 일련의 불경 언해 사업은 국문의 서사 기능을 더욱 개발하여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 이루어진 『명황계감(明皇誡鑑)』의 언해(1464),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 ·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 『심경언해(心經諺解)』 · 『아미타경언해(阿彌陀經諺解)』 ·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 ·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성종 때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발원으로 인출한 『법화경언해』 · 『능엄경언해』 · 『원각경언해』 등, 그리고 『내훈』의 간행은 그 자체가 반드시 문학적 업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국문의 문학적 기능을 여러모로 확인시켜 주었다.
1481년 『두시언해(杜詩諺解)』가 간행되고, 1484년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집(黃山谷集)』이 언해됨으로써 한시의 국역을 통하여 국문의 문학어로서의 기능이 거듭 확인되었다. 1493년 성현 등이 찬진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은 「동동(動動)」 · 「처용가(處容歌)」 · 「삼진작(三眞勺)」 등 고려의 가요를 국문으로 정착시켜 우리 가요 국문화의 본보기를 보였다.
성종 때 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이 나왔고, 이어 1498년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가 나왔다. 16세기 초두 연산군의 언문 박해가 시작되면서 모처럼의 국문 문학 활동은 한동안 침체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 각종 언해 사업이 재개되면서 국문에 의한 문학 창작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김구(金絿)의 「화전별곡」, 주세붕(周世鵬)의 「도덕가」 · 「오륜가」, 양사언(楊士彦)의 「남정기」 등 가사 작품이 창작되는 한편, 이현보(李賢輔)는 「어부가」 · 「효빈가(效嚬歌)」 · 「농암가(聾巖歌)」 등의 단가를 지었다.
여말 이래의 시조 문학의 전통은 국문의 구사를 통해 조선에서 더욱 그 지반을 다져 나갔다.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비롯하여 송순(宋純)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유희춘(柳希春)의 「헌근가(獻芹歌)」 · 「감군은가(感君恩歌)」, 정철(鄭澈)의 「훈민가(訓民歌)」 · 「장진주사(將進酒辭)」,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早紅枾歌)」, 장경세(張經世)의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 등이 나왔다.
광해군 때 윤선도(尹善道)는 「견회요(遣懷謠)」 · 「우후요(雨後謠)」 · 「산중신곡(山中新曲)」 ·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 「몽천요(夢天謠)」 등 국문 문학의 정수로 일컬을 만한 수작을 내놓아 순수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문학어로서의 국어의 면목을 드러내었다. 이 밖에도 시조를 남긴 이는 이이(李珥) · 권호문(權好文) · 이정환(李廷煥) · 김상용(金尙容) · 황진이(黃眞伊)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다.
가사 문학도 시조에 못지 않게 사대부들이 즐겨 지었던 국문 문학의 장르였다. 조선 초기에 국문이 소외되었던 것과는 달리, 중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나 문학 담당 계층인 사대부들의 국문에 대한 인식이 다소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국문 문학에 대한 문학으로서의 인식은 그다지 철저했던 것 같지는 않고, 득의(得意)의 자리나 실의(失意)의 자리에서 손쉽게 소회의 일단을 토로하고 울적한 심사를 해소할 수 있는 표출 수단, 아니면 ‘몽매한 백성’을 깨우쳐 타이르는 교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들이 부른 국문 가요는 대부분 연향(宴享)의 자리에서 가창했거나 배소(配所)에서 읊조렸던 것이다.
가사 문학에서는 16세기 후기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 「관동별곡(關東別曲」) · 「사미인곡(思美人曲)」 ·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의 작품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관동별곡」을 비롯한 그의 가사 3편은 일찍부터 ‘좌해진문장(左海眞文章)’이라는 극찬을 들을 만큼 가사 문학의 수준을 한 층 높이 끌어올린 작품이다. 정철에 이르러 가사 문학은 국문학의 진수를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명종 때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 양사언의 「미인별곡(美人別曲)」, 이황의 「환산별곡 還山別曲」 · 「금보가(琴譜歌)」, 선조 때 이이의 「자경별곡(自警別曲)」,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 이원익(李元翼)의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휴정(休靜)의 「회심곡(回心曲)」, 허강(許橿)의 「서호별곡(西湖別曲)」, 이현(李俔)의 「백상루별곡(百祥樓別曲)」, 박인로의 「태평사(太平詞)」 · 「선상탄(船上嘆)」 · 「사제곡(莎堤曲)」 · 「누항사(陋巷詞)」 등이 지어졌고, 그 뒤에도 광해군 때 조우인(曺友仁)의 「산새곡(山塞曲)」 · 「매호별곡(梅湖別曲)」 · 「자도가(自悼歌)」 · 「관동별곡(關東別曲)」, 인조 때 박인로의 「영남가(嶺南歌)」 등 사대부의 가사 작품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불교 경전과 유교 경전의 언역 사업에 이어 『삼강행실도』 · 『이륜행실도』 등의 번역(15세기 후기 및 1518년), 『열녀전(列女傳)』의 언해(1543), 불교 영험담류(佛敎靈驗譚類)의 언해 등은 국문에 의한 설화류의 서술 가능성을 더욱 성숙시켜 갔다.
중종 6년(1511) 채수(蔡壽)가 지은 「설공찬전(薛公瓚傳)」(한문)은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왕명으로 금서 처분되었는데, 1996년 그 국역본 「설공찬전」이 발굴(이복규)됨으로써 역어체 국문 소설의 소설사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명종 연간에 보우(普雨)가 찬술한 것으로 보이는 『권념요록(勸念要錄)』은 11편의 불교 영험담을 한문과 국역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짧은 10편은 중국에 원전을 두고 있는 설화이나, 맨 앞에 실린 「왕랑반혼전(王郎返魂傳)」은 고려간본 『아미타경(阿彌陀經)』(1304)에 수록된 「왕랑전(王郞傳)」(한문)이 원전으로 간주되는 바, 이는 『궁원집(窮原集)』 인문(引文)이다. 보우는 한문본 「왕랑전」을 윤색, 증연하고 다시 이를 국문으로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초기 발생의 국문 소설은 한문을 발판으로 하여, 이를 번역함으로써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의 역어체 국문 문체는 문학어로서 아직 미흡한 단계의 생경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격적인 국문 소설의 문체는 광해군 때 허균(許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洪吉童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난정 때의 인목대비(仁穆大妃) 서궁유폐사건의 전말을 그린 「계축일기(癸丑日記)」는 궁인이 쓴 실기인 듯한데, 생생한 묘사와 정감 어린 문체는 국문 서사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역시 궁인의 작으로 보이는 「산성일기(山城日記)」는 국문으로 쓴 실기로, 같은 제재를 다룬 허구적 수법의 전쟁 소설과 그 서술의 사실성에 있어 대조된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문 서사문학 작품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에 이어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 ·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등 비교적 문학성 높은 본격소설이 국문으로 창작되었다. 「구운몽」은 국문 · 한문 양본이 전하는데, 한문 원본설이 지배적이다.
18세기 이후 국문 문학은 괄목할 만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시가 분야에서는 『청구영언』 · 『해동가요(海東歌謠)』 · 『고금가곡(古今歌曲)』 등 가곡집의 편찬에서 보이듯 국문 가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시조에서는 서사성과 풍자성이 강한 사설시조가 출현하게 되었고, 가사에서는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와 같은 장편 기행가사 작품이 나왔다. 한편, 안조환(安肇煥)의 가사 「만언사(萬言詞)」, 이세보(李世輔)의 「신도일록(薪島日錄)」 등 유배 생활의 신고를 다룬 국문 작품도 있다.
소설은 군담류(軍談類) · 염정류(艶情類) · 전기류(傳奇類) 등 각종 작품들이 출현하였다. 궁정문학으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閑中錄)」은 사실적인 필치와 세련된 조사(措辭) 등 실로 국문문학의 백미편이라 이를 만하다.
19세기 중엽 한산거사(漢山居士)의 장편 가사 「한양가(漢陽歌)」는 수도 한양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봉건 사회의 생태를 은연중에 풍자하고 있다. 이 무렵 경판(京板) · 완판(完板)의 방각소설이 간행되면서 국문소설은 독자의 폭을 점차로 넓혀갔다.
1906년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소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언문 일치의 국문 문체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국문 소설도 신소설과 함께 공존하면서 새 인쇄술에 의한 ‘딱지본'으로 꽤 널리 보급되었다.
가곡집으로는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 『여창가요록(女唱歌謠錄)』 · 『가곡원류』 등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국문 가요를 여러모로 총정리한 것이었고, 개인 시조집으로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한 이세보(李世輔)의 『풍아(風雅)』가 나왔다.
시조에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형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담으려 하였다. 가사 문학도 전통적인 국문 문학이 새로운 사회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변신을 경험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새로운 국문 문학 양식이 태어나고 있었다. 신소설 · 신시 · 창가 등이 국문 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늠하며 나타났던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어문 생활은 사대부인 양반층의 한문과 서리인 중인층의 이두로 나누어진 이원 체제였다. 즉 음성 언어로는 국어를 사용하면서, 문자 언어로는 양반층은 한문, 중인층은 이두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어를 발음대로 표기하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니, 문자 생활에서 새로운 문자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언문이라 불린 이 새로운 문자는 주로 신(臣)이 아닌 민(民), 즉 서민의 글이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후, 나라에서는 그 자습서에 해당하는 『훈민정음해례』를 편찬하는 한편, 과거에 훈민정음을 과하고, 『동국정운』을 편찬하여 한자음을 표기할 때 사용하던 반절을 대신하게 하였다.
또한, 개국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와 부처를 찬양하는 『월인천강지곡』 및 『석보상절』을 간행하여 신문자의 효용성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세종대인 1449년 정승을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을 만큼 주효하였다.
신문자의 철자법은 당초부터 표음적인 음소 표기와 표의적인 형태 표기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관여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형태 표기이고 『석보상절』은 음소 표기인데, 특히 음소 표기였던 『월인천강지곡』은 인쇄 후 형태 표기로 고친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민정음해례』 종성해에서 예를 들어 양자를 논하면서 8종성으로 가히 족하다고 단정함으로써 공식적 방침이 천명되었다. 이 결론은 평민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에 평민을 위한 철자법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것이며, 정책적으로도 매우 현명한 판단임에 틀림없다.
한편, 한자음 표기는 1448년 완화된 현실음을 교정한 『동국정운』을 간행하여 시행에 옮겼다. 자모(字母)와 운모(韻母)를 모르는 서민층은 수용하기 어려웠지만, 기록상으로는 1481년 『두시언해』 초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실시되다가 폐지되었고, 1496년(연산군 2)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에 이르러 50년 만에 현실음으로 되돌아갔다.
훈민정음은 애초부터 서민을 위해 창제된 글인만큼 배우기가 어렵지 않았다. 식자층은 『훈민정음해례』를 통해 쉽게 익힐 수 있었고, 서민층은 이를 재조정한 방식으로 배웠다.
1527년 『훈몽자회』 범례에는 반절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성종조 성현의 『용재총화』에 ‘초종성팔자, 초성팔자’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창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반절식이 고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찍부터 식자층은 여성과 서민층을 상대하기 위해, 여성과 서민층은 자신을 위해 각각 신문자를 배움으로써 신문자는 널리 확산되어갔다.
위에 열거한 국어 작품들이 창작되고 한서(漢書)의 언해와 역학서 등 많은 글이 퍼지면서 신문자는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가의 불경 언해, 사대부의 가사와 시조, 교육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한서의 주해 및 번역, 계층을 초월한 전교(傳敎)와 편지 등은 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보아 매우 특이한 일인데, 주로 문자가 없던 평민과 여성층에게 주어져 이들에 의해 전승되며 정착되었다. 당시 한문을 모르는 계층이라는 점에서는 여성은 서민층에 속해 있었다.
연산군 때인 1504년 일어난 투서사건으로 인해 한때 언문은 탄압을 받았으나, 이러한 문자 생활의 3원 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또한, 음소 표기 철자법이나 반절식 문자 교육도 다소 변천을 겪으며 계승되었다. 특히, 순언문의 시가와 소설이 점차 유행하면서 언문은 많은 평민 및 여성층에게 친숙하고 불가결한 글이 되었다.
한글의 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초기의 정음시대와 1504년 연산군의 금란(禁亂) 이후 개화기까지의 약 400년을 기간으로 하는 언문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한글의 변천을 놓고 보면,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크게 양분된다. 17세기는 병자호란이 잇따랐고, 실학파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중세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제 당시처럼 어떠한 어문 정책이 시행되지도 않았고, 철자법이 자연적 흐름에 맡겨져 간소화되면서 규범이 불확실한 양상을 띠었다. 이는 공식적인 언어 문자의 교육이 없었던 시대 상황에 기인한다. 언문은 아녀자와 서민층에게 반절식으로 가르쳐졌고, 그 철자법은 이들 개개인에 의하여 임의로 쓰여지면서 수세기가 흘렀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철자법은 대개 중종 때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지향 없이 표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창제 당시에 규정한 음소 표기의 원칙은 계속 전승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일어난 실학 운동은 새로운 조선학(朝鮮學)이 형성되게 하고, 이 조선학의 형성은 아름다운 근세적 정음문학(近世的 正音文學)의 융성과 함께 정음 연구를 근세적 문자음운학(文字音韻學)으로 부흥시켰다. 실학은 본질적으로 근대적 현실성과 민족적 주체성을 지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실학파의 저술로서 정음에 관한 논술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으나, 그 주류를 이룬 것은 최석정(崔錫鼎) · 이사질(李思質) · 신경준 · 황윤석 · 유희의 저술 등 어디까지나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한 한자음의 이상적 표기를 위한 연구였다.
동시에 청대 고증학의 영향으로 고증학풍이 형성됨에 따라 물보류(物譜類)가 편찬되었다. 이들은 한문을 위주로 하고 있으나 국어 자료가 수록되어 있어 조선사서로 평가된다. 그 요인은 실학파의 실사구시(實事求是), 무징불신(無徵不信)이라는 학문적 방법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휘집뿐만 아니라 방언과 속담의 수집, 어원의 탐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업적이 이루어졌다. 홍명복(洪命福)의 『방언집석(方言集釋)』(1778)이나 이의봉(李義鳳)의 『고금석림(古今釋林)』(1789) 등은 동양어 사전인 동시에 기초 어휘집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우리 방언의 기록, 속담의 주석, 어원의 기술 등도 조선학의 일환으로 축적되었다. 특히, 순조 때 유희의 『물명고(物名考)』 주석 곳곳에 등장한 무려 1,600여 개의 희귀한 우리말 어휘의 기록, 210개의 속담이 실린 정약용(丁若鏞)의 『이담속찬(耳談續纂)』(1820)과 순조 때 300여 개의 속담이 수록된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識)』 등 속담집은 당시의 조선학이 뜻하는 근대 지향의 민족적 성향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업적의 축적은 모두 전례가 없던 것이며, 조선 후기의 조선학이 최초로 이룩한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즉 근대화의 한 전초가 되는 사실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문자 학습이 반절식으로 행해졌음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데, 19세기에 유행하던 반절을 통해 어떻게 학습이 이루어졌는가를 밝혀보기로 한다.
이 반절표는 『훈몽자회』 범례의 언문 자모와 같은 문자 조직에서 유래한 것이나, 지금 전하는 것으로는 일본 이리에(入江萬通) 등의 『화한창화집(和韓唱和集)』 권하에 수록된 일본통신사 종사관기실(從事官記室) 장응두(張應斗)의 조선 언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19년(숙종 45) 9월 일인에게 써 주었다고 하니 약 270년 전의 일이다.
그 뒤 거의 같은 양식의 반절이 문헌에 종종 나타나나, 1869년에 간행된 불서 『일용작법(日用作法)』에 기록된 언본(諺本)은 좀 다르다. 1889년에 간행된 『신간반절』 1장도 이와 같은 종류이나, 신간 이전의 구판이 따로 있어 그 연대는 19세기 중엽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이들은 입문기의 문자 학습을 교육적으로 고안한 실례로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표4] 의 언본은 한자음으로 초성을 표시하고, [표 5] 의 반절은 그림으로 초성을 표시하였다.
「IMGI」83475-00「/IMGI」
가령, 언본은 ‘可’자를 보고 ‘가’행을, 반절은 그림 ‘개’를 보고 ‘가’행을 익히도록 한 것과 같다. 이들은 입문기의 문자 학습을 혼자 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크게 기여했는데, 당시의 교육 방법이 흥미롭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 본문 15행(와워줄 포함)을 익히면, 제2단계는 이 본문에 받침 9자를 받치는 공부를 하고, 제3단계는 이들에 된시옷이 붙는 5행을 익힘으로써 완결된다.
이 방식은 아주 구조적이고 기계적이어서 하루아침에 깨칠 수 있다고 할 만큼 쉽다. 오늘의 교육에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모 구조와 그 철자 원리도 한글이 과학적 문자임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이라는 근대적 대개혁을 단행하는 가운데, 갑오개혁기 조선 정부는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을 공포하여 종전의 한문 대신에 국문을 공문으로 바꾸었다. 450년 만에 언문이 비로소 공식적인 국자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 칙령 제14조에는 국문을 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는 과도적 조처도 규정해 두었다. 1883년 1월 『한성주보(漢城周報)』가 이미 그러한 것이었지만, 1894년 12월의 이른바 「홍범(洪範) 14조」라 불리는 「종묘서고문(宗廟誓告文)」과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는 이에 근거한 공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결정은 점차 변질되어, 본으로 삼는다던 국문보다 과도적인 국한문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원칙은 지나친 이상이었고, 과도적인 3원제는 현실적인 국한문으로 낙착된 것이다. 1895년 7월 소학교 국어 교과서인 『소학독본』이 우선 국한문만으로 서술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사실 이 갑작스러운 개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정부의 『관보』를 예로 들면, 갑오개혁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다가 이듬 해 국한문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08년 2월 6일 『관보』 관청사항에서 공문 서류에 국한문을 사용하지 않고 순한문으로 쓰거나 이두를 혼용하는 것은 규례(規例)에 어긋난다고 경고하고, 각 관청의 공문 서류는 일체 국한문을 교용(交用)하고 순국문이나 이두, 외국 문자의 혼용을 부득(不得)함이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이 시대 문자 생활의 혼란상을 말해 주는 동시에, 당초의 칙령 공문식이 사문화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종래의 3원제가 인습적으로 잔존했다는 뜻으로도 이해된다. 여기서 인습이란 양반층의 한문, 평민 상층의 이두, 평민 하층의 국한문, 서민층의 국문으로 구분되던 것을 말한다. 즉 서민층의 국문을 본으로 삼으려던 당초의 이상은 깨지고, 평민 하층의 국한문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된다.
이러한 양상은 물론 당시의 사회 계층과 밀접하나, 근대화와 더불어 갑자기 늘어난 어문 생활의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긴급히 요청된 것은 새로운 질서였다. 이는 바로 일반적인 국어의 근대화, 즉 언문일치(言文一致)였다. 언문일치는 일상 언어로 표현하자는 현실화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시대에 방향을 잡은 국한문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언해(諺解) 법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언문일치가 실현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지만, 1910년 7월에 발표한 이광수(李光洙)의 논설은 이미 그 진수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용문(用文)에 대해 국한문이란 순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에 불과하다면서, 마음으로는 순국문을 쓰고 싶지만 이는 이해하기 어려워 신지식 수입에 저해가 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문으로 된 말만 한문으로 쓰고 그 밖의 말은 모두 국문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 이 방안은 물론 궁책이지만 현실에 입각한 것으로서, 구두어에 한자를 혼용하자는 것이니 언문일치를 주장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한문을 국문으로 엇바꾸는 것과 같은 대개혁을 단행하면서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는 데 있었다.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이 순조롭지 못했던 탓이지만, 당시의 당면 과제는 조선 말기의 혼란 상태에서 하나의 국어 규범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한학자의 힘으로 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국어에 관한 학자나 어떠한 기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부 차원의 정책이 있을 리 없었고,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대안도 없었다. 실제로 받침을 할 것인지 연철을 할 것인지, 또는 아래아가 무엇인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특히 아래아의 정체와 처리를 둘러싼 문제는 이 시대 최대의 의문이었다.
당시 이에 대해 이봉운(李鳳雲) · 주시경 · 지석영(池錫永) 등이 표명한 의견도 빗나가고, 지석영이 개인적으로 상소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은 기묘하게 창조된 신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절차를 통과해 1905년 7월 공식적으로 백일하에 공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래아 대신에 괴상한 ###i:E0061508_P1207###(ㅣㅡ합음)자를 쓰라는 불가능한 명령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학부에 설치된 것이 국문연구소였다.
1907년 7월 최초의 국어 연구기관으로 창설된 이 연구소는 2년 후인 1909년 12월 10제(題)에 걸친 당면 정책 방안을 의결하여 보고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타당한 최종안도 경술국치로 인하여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이능화 · 주시경 · 어윤적(魚允迪) 등이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이 시대는 정책 부재의 상태로 종말을 고하였다. 즉, 새나라의 국어를 가다듬어 일정한 규범을 세우려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고, 어문 생활의 개선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당초의 이상도 빛을 잃고, 국어 순화를 지향한 국어 운동이 개인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져나갔을 뿐이었다.
1886년 4월 창간된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은 순국문에 띄어쓰기를 해서 3년이나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이봉운(李鳳雲)의 『국문졍리』(1897)도 국어 존중에 기여했지만,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한 주시경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국어 규범의 확립에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표의적 형태 표기에 착안하여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중의를 모으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2세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가 독자적으로 초기 국어 문법의 수립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저술을 통해 주장한 새받침이 바로 그것이다.
1909년 『국문연구』에는 새받침 17종 93개가 제시되었으나,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최근 발견된 『한글모죽보기』에 의하면, 그는 1907년 7월부터 학교 이외의 국어강습소에서만도 중등과 300여 명, 고등과 70여 명, 하기강습생 100여 명을 각각 배출했고, 1908년 8월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모의 전신)를 창립하여 그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것은 1930년대 위세를 떨친 뒤 주시경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대 16년간의 국어 정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선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에 치우쳐 순국문을 채택했다가 공식 절차도 없이 전통적인 국한문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신정국문」의 무모한 채택으로 빚어진 문제를 계기로 국문연구소에서 작성한 정부 차원의 「국문연구의정안」은 중요한 국어 규범의 확립 방안이었으나 당초부터 서둘렀어야 했던 이 작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국어의 근대화라는 중대한 소임은 유기되고, 현실에 이끌려 한문을 국한문으로 바꾼 것이 그 하나의 실효가 되었을 뿐이다.
한편, 시기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던 국어 순화는 정책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민간의 국어 운동으로 맡겨져 침략에 맞서는 자주 독립 운동의 한 방법으로 전개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도 현실을 떠난 이성적 이념 아래 이루어졌던 탓에 일반적인 호응이나 사회적인 확산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 시대적 배경에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갑오개혁이라는 개혁 자체가 일제의 강요로 강행되었고, 청일전쟁과 한일공수동맹 및 청일강화에 따른 1895년 일제의 내정 간섭, 러일전쟁과 제1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4년 일제의 고문정치, 러일강화와 제2차 한일협약에 따른 1905년 일제의 통감정치, 고종 양위와 제3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7년 일제의 차관정치, 경찰권 박탈에 이은 1910년 일제의 강점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던만큼, 근대적 신생국 대한제국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스스로의 정책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특히, 1905년 통감정치를 시행하면서 일본어를 병용하기 위한 편의로 국한문의 시행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수립했을 것으로 보이는 국문연구소의 의정안도 일제에 의하여 폐기된 것이 거의 분명하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안정이나 새로운 발전을 뒷받침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일제의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멸망하고 그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강점기는 단순한 강점이 아니라, 민족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려는 흉계를 가지고 철저한 동화정책이 끈질기게 시행된 시기였던만큼, 우리 국어의 수호와 발전은 심각한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흉계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그 식민 정책은 대개 전기인 무단정치시대와 중기인 문화정치시대와 후기인 강력정치시대의 3기로 구분된다.
8대 35년에 걸친 총독정치를 통해 종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어가 민족어로 전락하고, 외국어였던 일본어가 대신 국어로 등장한 것이었다.
일본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에서 성급하게 국민 정신의 함양과 일본어 보급을 교육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그 언어 정책은 출발부터 1국 1국어의 원칙을 악용하여 일본어 교육을 통한 국민 정신의 함양, 즉 노골적인 민족말살 동화예속 정책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식민 정부는 취조국(取調局)에서 해오던 우리 민족 문화의 조사와 함께 1911년 4월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했고, 내무부 학무국에서는 1912년 4월 통일을 목적으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저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최초로 실시된 국어정서법이었다.
이 철자법은 국문연구소에서 이미 작성한 「국문연구의정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따로 실태를 대상으로 성문화한 표음주의 철자법이었으며, 그 뒤 교과서에 채택되어 약 10년간 국어 규범의 기준이 되었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어 교육을 병행했으니, 일본어 위주의 이중 언어 정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조선광문회의 『조선어자전』(말모이)을 비롯한 사전편찬, 김희상(金熙祥)의 『조선어전』을 비롯한 문법서의 저술, 주시경을 중심한 조선어강습원의 국어 강습 등 국어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국어 연구 내지 운동은 그 시대 상황으로 보아 이념적인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정치는 이윽고 민족적 민중 항거에 부딪쳐 난관에 빠졌다.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 · 1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항거한 일대 민중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일제는 부득이 유화정책을 내세워 약 18년간의 문화정치를 시작하였다. 민간 신문의 허가, 관습의 존중과 차별 대우의 철폐, 교육제도의 개선과 조선어 장려 등 표면적인 유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우선, 저들이 계획한 『조선어사전』이 1920년 3월 출판되었고, 이에 따라 1921년 3월 「언문철자법」이 개정되었다. 이것은 표준어와 국어 규범의 재정비라는 의미가 있었다. 어문 생활에서는 3 · 1운동을 고비로 1920년대에 언문일치가 이루어졌고, 민간 신문의 보급, 잡지의 융성, 민간의 계몽 운동 등으로 문자 생활이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저들의 20년 시정 실적은 1930년 통계로 취학률 24%, 문맹률 78%였다. 표면적으로는 문화정책을 내걸었지만, 저들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항 투쟁은 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표면화되었다.
한편, 1920년대에는 미진한 국어 규범의 확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미 1921년의 철자법 개정에서 어윤적 · 권덕규(權悳奎) 등 후주시경파에 의해 제기되었다가 보류된 표의주의 철자법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후주시경파는 1921년 12월 학회를 결성하고 운동에 나섰다.
1930년 2월 개정한 저들의 「언문철자법」에서는 다수 후주시경파의 참여로 표의주의 철자법이 채택되었다.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논쟁은 첫번째 1446년 『훈민정음해례』, 두 번째 1909년 국문연구소 「국문연구의정안」, 세 번째 1921년 개정된 「언문철자법」, 네 번째 1930년의 개정 과정에서 일어난 철자 파동 등 거듭된 대결을 거쳐 비로소 형태 표기로 낙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이로써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후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는 철저하지 못한 「언문철자법」에 대한 반대, 전통적 보수파를 대표하는 박승빈(朴勝彬) 중심의 조선어학연구회는 양자에 대한 반대로 치열한 논쟁이 재연되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 논쟁인 이 대결은 1932년 11월 동아일보사 주최의 토론회,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표, 1934년 7월 재래식 정음파의 반대 성명에 이은 피차의 중상적 비방 등으로 이어지면서 불꽃을 튀겼다.
그러나 많은 학자를 포용한 한글파는 문화계의 호응을 받으면서 1936년 표준어사정, 1940년 「외래어표기법」 제정에 이어 1942년 『조선말큰사전』 출판에 착수하여 1921년의 개정 철자법을 주장하는 정음파보다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2년 창간한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1934년 창간한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 『정음』, 1931∼1934년 민간 신문의 브나로드 운동과 강습회 등은 일제강점하의 현저한 국어 운동으로서 일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30년대 전후의 논쟁 및 출판물의 융성은 식민 정부의 언어 정책을 초월한 국어 운동의 고조와 확산을 자아냈다. 이 운동이 독립 운동의 일환이었던만큼 일제는 이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군벌에 의하여 다시 강력정치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허울 좋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살벌한 분위기의 민족 말살과 저들의 전쟁을 위한 총동원이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1938년 4월의 파멸적 교육령에 의한 조선어과 폐지에 이은 조선어 금지와 일본어 상용의 강요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성전완수(聖戰完遂)라는 미명하에 전국토를 병영화하고 더욱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특히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1920년부터 용인해 왔던 학회 활동을 악랄한 「치안유지법」을 적용, 마구 엄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징(韓澄) · 이윤재(李允宰)가 감옥에서 숨지고, 출판 허가까지 받았던 사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35년, 특히 그 후기 8년간은 문자 그대로 우리 민족사에서 전례가 없는 암흑기였다. 언어 정책이라고는 일본어의 강요뿐이고, 줄기차던 민간의 국어 운동은 뿌리째 뽑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어 해득률은 저들의 통계로 1919년 1. 8%, 1930년 8. 3%에서 1938년 12. 3%, 1943년 22. 1%였고, 1945년에는 27%로 추정된다. 그 통치가 5년 더 연장되었다면 45%로, 10년 연장되었다면 85%로 상승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통계에 포함되어 있는 10세 미만 인구 34.2%를 제외하면, 1943년 22.1%는 33%, 1945년 27%는 역시 41%로 상승된다. 마찬가지로 45%는 68%로, 85%는 128%라는 초과 현상까지 나타날 것이다.
저들의 민족어 말살 정책은 1894년 이후 12년간의 일본어 부식기, 1906년 이후 30년간의 2어 병용기를 거쳐 1937년 일본어 전용기를 만들었다. 60년 기한으로 그 목표 달성을 꾀하였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며 8 · 15광복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따라서 1931년 이후 10년에 걸쳐 혁혁한 업적을 쌓은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그 결정체인 『조선말큰사전』은 완성되지 못한 채 소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사전은 국어 규범을 세우기 위한 맞춤법 · 표준말 · 외래어표기 등을 장기간에 걸쳐 제정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국어 규범 사전이 될 것이었다.
국어 규범의 확립은 국어 근대화의 가장 긴급한 기초 작업인데, 이 중요한 문제가 완성될 찰나에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래서 이미 매듭지은 일련의 국어 규범이 책자로나 존재할 뿐, 소멸 단계에 있는 국어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가장 암담한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강인한 우리 민족은 그들의 계획대로 쉽사리 소멸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총칼 앞에서 겉으로는 복종했지만, 민족 의식을 지닌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한글과 한자를 가르쳤고, 일제 막바지인 1945년 7월에도 대한애국청년당이 부민관(府民館)에 투탄한 무력 투쟁이 있었다. 장하고 거룩한 민족 정기가 끈질기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8 · 15광복은 어문 생활에도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 주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극로(李克魯) · 최현배 · 이희승(李熙昇) · 정인승(鄭寅承)이 광복과 더불어 석방되고, 학회는 이들을 맞이하여 열흘 만인 8월 25일 재건되었다. 당시 최대의 과제는 시급한 국어 회복이었다.
이 학회는 즉시 국어 교과서의 편찬, 국어 강습과 국어 교원 양성, 『한글』지의 속간과 중단된 국어사전의 편찬 등 당면 방침을 정하고, 정부 차원의 국어 정책과 민간 차원의 국어 운동을 동시에 짊어지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8년간의 암흑기를 겪고 난 당시의 상황은 암담하였다. 국어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층은 문맹이었고, 안다는 층도 국어 규범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어 교원은 없었고, 『한글첫걸음』(1945. 11.)은 한때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같은 교재였으니, 당시의 실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학회는 단일 지도 체제 아래 이 난국을 타개해갔다.
조선어학회는 1945년 9월 미군정이 시작된 뒤에도 여전한 권위를 가지고 계속 활동하였다. 군정하의 공용어는 일본어 대신 영어로 바뀌었으나, 정부 차원에서도 국어 순화는 긴급한 시책으로 행해졌다.
1946년 왜색일소를 위한 학술용어 제정, 1948년 같은 목적의 ‘우리말 도로찾기’가 그것이었다. 다만, 1945년 12월 미군정청에서 결정한 교과서의 한자 폐지는 1947년 논쟁을 겪으면서 결국 한자 병기를 취하였다.
한편, 국어 규범은 일제하에 작성된 조선어학회의 규정이 교과서에 채택됨으로써 시행되었으나, 1년여가 지난 1947년 난삽하다는 일선 교단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는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여섯 번째 대결이었으나 역시 학회의 권위로 진정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학회의 『큰사전』인데, 수정 과정이 지연되어 국어 규범 집성을 갈구하는 모두에게 큰 불편을 안겨 주었다. 1947년에 1권이 나오고, 10년 만인 1957년에야 6권으로 완간되었으니, 국어 규범의 혼란은 그만큼 지속된 셈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어 정책은 그대로 계승되어 큰 변동은 없었으나, 국어 규범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1946년 일부 사이시옷과 띄어쓰기를 수정한 「맞춤법통일안」과 『표준말 모음』은 학회 자체의 사전에서 또는 문교부 교과서에서 임의로 계속 바뀌었고, 외래어 표기는 문교부에서 1948년 아예 새로 제정함으로써 일제하에서 이룩된 3대 사업은 크게 변질되었다. 게다가 단일한 규범이 서기 전에 1950년 6 · 25가 일어나, 이번에는 모든 복구가 다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3년 만에 부산에서 환도한 정부는 계속된 대통령의 유시에 따라 1954년 3월 한글 간소화와 국문 전용을 정책으로 결정하였다. 간소화가 강행되자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하여 한글 파동으로 번졌다. 이는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일곱 번째 대립으로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으나, 반 년 만에 대통령의 후퇴로 종식되었다. 그리고 국문 전용은 공문과 간판에 그쳐, 1951년 9월에 제정한 상용 한자를 근거로 하여 국한자 혼용의 2원제가 여전히 지속되었다.
국어를 되찾아 교육한 지 10년이 지난 1956년에는 일선에서 진실한 반성의 소리가 비등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해진 입학 시험과 관련하여 국어 규범과 학교 문법의 통일을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시행 불가능한 1948년 문교부의 「외래어표기법」을 1958년 「로마자의 한글화표기법」과 1959년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으로 개정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외래어의 원음주의가 여전히 지속되어, 이 역시 교과서는 교과서대로, 신문은 신문대로 통일을 기하지 못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은 1961년 5 · 16 이후에 나타났다. 1962∼1963년 문교부 한글전용특별심의회의 한자어 추방 정책, 1963년 문교부의 「학교문법통일안」 공포, 1970년 교과서의 한글 전용 단행 등 계속된 일련의 정책이 그것이나, 모두 현실과 유리된 방안으로 거듭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한자어 추방은 일반에게 백안시되었고, 학교 문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한글 전용은 2년 만인 1972년에 종전대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의 대통령 지시에 따른 1970년의 한글전용촉진책에 담긴 알기 쉬운 표기 방법과 보급 방법은 1969년 상반기 시한을 넘기고 1973년 6월에야 성안되었다. 이것은 「맞춤법통일안」 실시 30년 만에 규정과 실태 사이의 괴리 현상을 현실화하여 역사상 최초로 국정화하는 작업이었으나, 사세의 변화가 겹쳐 1979년에 겨우 연구용으로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준히읗과 사이시옷의 폐기와 같은 이미 사문화된 규정의 폐기, 원형 표기와 띄어쓰기의 축소와 같은 엇갈리는 문제의 규정화 등으로 집약된다. 특히, 밝혀 적기로 되어 있는 준히읗은 가령 규정대로 ‘적당ㅎ지 않다’로 쓰지 않고 거의 ‘적당치 않다’로 쓰고 있으며, 또한 한자어의 사이시옷도 ‘냇과의원’등으로 쓰지 않고 ‘내과의원’등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문화된 규정의 폐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표음화의 경향인 그 어원 표시의 완화는 확실히 현실 타협의 방법이나, 국어 규범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좀더 일찍 서둘러야 했을 것들이다.
한편, 한자 문제는 신문에서는 각기 제한 한자를 사용하는 방침을 취하고, 교육에서는 한글 전용의 모순과 여론에 부닥쳐 1971년 12월에 다시 한문 교육을 시행하게 되어, 기초 한자 1,800자를 제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1970년의 한글전용정책을 번복하여 종전으로 환원했음을 뜻하므로, 국한자 혼용과의 2원제가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신문의 한자 사용은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75년 신문 정치면의 한글 표기가 1974년에 비해 10% 이상 늘었다고 하며, 한 통계는 또 신문 기사 전체의 한자 사용률이 1950년대 46.16%, 1960년대 28.29%, 1970년대 20.12%,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8.21%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12% 이상 줄어든 것은 한글 세대의 등장과 유관하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경향은 잡지나 단행본 등 출판물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이며, 한 나라의 언어 정책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어 순화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개선되지 못하였다. 1962년 한글전용특별심의회 방안이 실패한 뒤, 1963년 문법 파동을 빚은 문교부의 「학교문법통일안」에서도 명사식 용어가 채택되었다. 1949년 이후 교과서에 적용되던 292개의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음으로 된 말과의 두 갈래 용어가 18년 만에 통일되었다.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표현은 허울 좋은 명목일 뿐, 실상은 ‘씨갈(품사론) · 월갈(문장론) · 함께자리(공동격) · 안박인꼴(부정형)’ 등과 같이 부자연한 인조어이므로 폐기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논란에서 나타난 거부 반응을 통하여 국어 순화는 일반화된 한자어까지도 추방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의 이 귀결은 일제하의 국수주의적 운동과 다른, 그 성격과 방향이 잡힌 사실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는 다시 1976년부터 문교부에 국어순화운동협의회를 두어 각 부처에서 의뢰한 용어를 심의, 『국어순화자료』를 책자로 계속 출판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에 대비, 1982년 정부의 국어 및 외래어 표기 통일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우선, 1959년 2월 개정한 문교부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을 1983년 12월에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으로 개정하여, 종전의 내국인 위주의 형태주의에서 매큔라이샤워 표기체계와 같은 외국인 위주의 표음주의로 전환하였다. 한 나라에서 문교부는 형태표기를, 건설부는 매큔라이샤워 표기에 의한 표음표기를 취하던 모순이 이로써 해소되었다.
또, 1958년 10월 개정한 문교부의 「로마자의 한글화표기법」을 1985년 12월 「외래어표기법」으로 개정하여 미진하나마 현실음에 접근시키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각각 이론이나 이상보다도 현실과 편리의 존중을 지향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으며, 어문 생활의 실제와 공식적인 규정 사이의 괴리 현상을 훨씬 좁히게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런데 1984년 공포된 문교부의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은 ‘˘’(반달표)와 ’(어깻점) 등 특수부호를 사용함으로써 컴퓨터에서 입력과 검색이 불편하여 다시 개정에 이르게 되었다.
2000년 7월 문화관광부 고시 제2000-8호로 제정된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은 정부에서 고시한 네 번째 표기법이다. 이 표기 체계는 국어의 발음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특수 부호는 사용하지 않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특수 분야에서 한글 복원을 전제로 표기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자법안을 따로 마련하였다.
「한글맞춤법」은 1933년 공표 이후 부분적 수정을 거쳤으나, 1950년대 후반에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사문화되거나 사정을 기다리는 사항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아 거의 그대로 사회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사전 및 교과서에까지 반영되었다.
그 동안 표준어 사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79년 문교부에서는 「표준말재사정시안」 및 「한글맞춤법개정시안」 · 「외래어표기법개정시안」 등을 마련했다가 1981년 학술원으로 이 작업이 이관되었고, 1985년 국어연구소(1990년 국립국어연구원으로 격상됨)가 발족하면서 다시 이 연구소로 이관되어 문교부 국어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1988년 1월 「표준어규정」과 함께 「한글맞춤법」이 문교부 고시 제88-1호로 관보 제10837호에 고시되었으며, 1989년 3월 1일부터는 이 새로운 맞춤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한글의 인쇄 활자는 세종 25년(1443)부터 제정에 들어가 세종 28년(1446) 10월 9일 반포된 훈민정음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인쇄 활자는 세계 으뜸의 역사를 가진 상정예문자(詳定禮文字, 1234)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으나, 이것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1377년 놋쇠 활자로 인쇄된 청주 흥덕사 경판(興德寺 經板)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그 실물이 프랑스의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 우리 인쇄 활자의 역사가 독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보다도 70여 년 이상 앞서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뒤에도 계미자(癸未字, 1403) · 경자자(庚子字, 1420) · 병진자(丙辰字, 1436) 등 금속 인쇄 활자로 여러 책들을 인출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한자로 된 것이었다.
한글이 인쇄 활자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447년 7월에 펴낸 『석보상절』 · 『월인천강지곡』 등에서라 할 수 있다. 이 두 책은 한자와 한글을 섞어 인쇄한 것인데, 한자는 1434년 놋쇠로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활자체에, 한글은 나무로 만들어진 목활자로 짜여져 있다. 이 한글 활자체를 갑인자체 한글자라 이름하기도 한다.
그 뒤 1455년 을해자(乙亥字)와 더불어 놋쇠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한글 활자는 1465년 을유자(乙酉字)를 비롯하여, 1580년의 경진자(庚辰字), 1603년부터 50년간 사용한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 그리고 1668년 갑인자체를 본뜬 무신자(戊申字)와 1693년의 원종자(元宗字), 목활자인 1778년의 정유자(丁酉字)와 1895년 『소학독본』 등을 인쇄한 학부활자(學部活字)로 그 맥을 이어왔다.
한글 활자체는 초기에는 한자체와는 달리 오늘날의 고딕체와 같이 직각 모서리를 가진 딱딱한 형태였으나, 차차 붓글씨의 영향을 받으면서 부드러운 형태의 체로 바뀌었다.
인쇄 문화는 초기의 수동 방식에서 점차 기계화되면서 고성능의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책의 인쇄는 문자에 의한 활자가 기본이 되는데, 한글은 한문과 더불어 로마자에 비해 기계화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1980년대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컴퓨터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인쇄는 물론 일반 문서에까지 널리 이용되면서 한글의 기계화 · 전산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글의 기계화 · 전산화는 한글 타자기 · 한글 식자조판기 · 한글 텔레타이프 · 한글 모노타이프에서 한글 컴퓨터로 그 발전이 진전되어 왔다.
과거 한글의 기계화는 한글 글자를 빠른 시간 안에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는 한글을 매체로 하는 각종 한글 기계들의 글자판을 과학적인 배열을 통해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커다란 과제로 등장했다. 하나의 자판을 익힘으로써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는 물론, 식자기나 컴퓨터 등을 손쉽게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글은 풀어쓰기 형태인 로마자와는 달리 자음과 모음을 합쳐 한 글자가 이루어지므로 기계화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과거의 인쇄 활자는 ‘가’ · ‘각’ · ‘나’ · ‘낙’ · ‘다’ · ‘닫’ 등과 같이 미리 만들어져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문선이나 식자를 통해 찾아서 나열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으로 인쇄를 하려면 이론상으로 자음 19개×모음 21개×받침 28개로 모두 1만 1,172자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많은 수의 글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반 인쇄소나 사진식자기는 그보다 약 2,300자 내지 3,000자 정도 많은 숫자의 활자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원래 한글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의 자음 14자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모음 10자, 도합 24자 자모의 낱자로 적게 되어 있으며, 이들 낱자로 적을 수 없는 소리는 ㄲ, ㄸ, ㅃ, ○, ㅉ, 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처럼 2개 이상의 낱자를 함께 적도록 되어 있다.
컴퓨터 인자(印字)의 경우는 앞의 자모 24자에 이중자모 16자를 합쳐 40자면 어떤 글자라도 모두 처리할 수 있다. 물론 한 문장을 만들려면 ‘, · ! “” ‘’ ( ’ 등의 부호나 숫자, 로마자 등이 있어야 하므로 그 이상의 것이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한문을 쓰지 않는 한글만의 경우는 문서 입력의 능률을 몇십 배 이상으로 제고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글은 전통적으로 기본 자모의 형태가 아닌 네모꼴 속에 들어가는 형태의 글자에 익숙했기 때문에 각각의 낱글자를 이용하여 모든 인쇄 매체를 조판, 인쇄해 왔다.
문자의 기계화는 금속 활자의 발명에 따른 인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으나, 한글의 기계화를 개발, 발전시킨 것은 타자기와 텔레타이프, 사진식자기 등이었다.
종래의 일반 인쇄 조판에서 수천 개의 낱글자를 일일이 문선, 식자하던 방식을 벗어나, 한글의 기본 자모만을 준비해 놓고, 필순에 따라 인자하면 찍는 순서대로 자모가 모아져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내는, 한글의 자 · 모음 조합식 방법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조합 방식으로는 한글의 기본 자모만 있으면 어떤 글자든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 방식은 과거의 타자기는 물론 사진식자기와 텔레타이프 등에서 이용되어 왔는데, 타자가 용이하고 속도도 대단히 빠르며 익히기가 쉬웠다.
지난날의 인쇄는 대부분 납에 의한 활자식 인쇄(hot type system, HTS)였으므로 문자 조판 분야는 인쇄 기계화의 사각지대로 여전히 종래의 활자에 의존하였다. 그러던 중 1924년 세계 최초로 일본의 모리사와(森澤信夫)가 발명했다는 모리사와식 사진식자기와 샤켄(寫硏) 사진식자기 등이 1960년대 초반경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면서 문자 조판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식자기의 글자 배열이 비과학적 · 비능률적이었으므로 편집 · 교정 등의 어려움은 물론 3,000여 자의 자판을 일일이 외워 타자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특히 숫자와 로마자, 약호와 한자 등은 자판을 다시 갈아 끼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결과적으로 한글 활자의 기계화를 가로막았을 뿐더러, 글자체조차 일본에서 도안된 것을 그대로 써야 했으므로 인쇄 문화의 일본 예속화가 우려되기도 했다.
이 사진식자는 인쇄를 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 콜드 타입 방식(cold type system, CTS)의 촉진에는 어느 정도 공헌했을지 모르나 한글의 인쇄 활자 기계화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한글의 글자 원리와 모양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도 없이 기계만을 팔고자 했던 일본의 사진식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의 인쇄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글 기계화와 글자 모양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첨단 과학의 발달은 빠른 속도로 문자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오늘날의 컴퓨터 식자 방식(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CTS)은 인쇄에 있어 문선 · 식자 · 교정 · 조판 작업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미 1960년대에 서독의 디지셋(Disiset), 미국의 라이노트론(Linotron) · 비디오콤프(Videocomp) 등의 출현으로 실용화되고 있었다.
이 컴퓨터 입력 방식은 종래의 일본식 사진식자기와는 달리 편집과 교정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한번 입력된 문자의 크기와 행간 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문자 인쇄의 혁명적 기계로서, 인쇄 공장의 수많은 재고 납활자와 핫 메탈(hot metal)을 추방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이 컴퓨터 식자기의 도입 초기에는 한글의 글자 모양에 따라 입출력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일본을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초기의 컴퓨터 식자기는 잘못된 문자 배열 방식 때문에 26자만을 이용하는 로마자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입력 속도가 느렸다.
당시에는 한글의 모양이 로마자와 같이 네모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그림 1]. 한글이 네모꼴을 벗어날 경우에는 문자 입력의 속도가 빨라지며 가독성(可讀性)도 높아지리라는 것이었다.
팅커(Tinker, M.A.)는 고전적 스타일의 숫자가 모던 스타일의 숫자보다 가독성이 높다는 연구를 발표한 바 있는데, 그 까닭은 고전적 스타일의 숫자는 어센더(ascender)와 디센더(descender)가 숫자의 꼴을 서로 다르게 보이도록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림 2].
한글이 네모꼴을 벗어날 때 인쇄의 기계화는 가속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한글의 표준 글자꼴이 갖추어져야 수평 기계간, 즉 타자기는 타자기끼리, 통신용 텔레타이프는 텔레타이프끼리, 그리고 컴퓨터는 컴퓨터끼리의 조형적 원칙과 인자 원칙 등이 지켜질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타자기, 워드프로세서에서 컴퓨터에 이르는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져 상위 기종과 하위 기종이 일정한 규칙 아래 불편 없이 사용될 수 있다.
컴퓨터의 경우는 표준 글자꼴의 구비와 통일 못지않게 한글 코드(부호)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국내에는 19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컴퓨터 한글 부호 체계가 운용되고 있어, 기종이 다른 시스템 간에는 한글 정보 교환이 불가능하여 정보 사회의 기본 요소인 데이터 통신망 구축에도 많은 장애 요인이 되어 왔다.
한편, 플로피 디스크나 프린터 등 컴퓨터 주변기기도 제조회사가 다를 경우 호환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제조 회사들이 각기 다른 시스템에 따라 기기들을 생산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르게 된다.
또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도 동일한 기능의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기종에 따라 달리 개발해야 하는 등, 한글 부호가 통일되지 않은 컴퓨터 시스템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글 코드의 통일이 요망된다.
한편, 현재 한글 컴퓨터의 입력 방식은 2벌식 글자판과 3벌식 글자판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입력 방식은 글자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로마자는 입력 방식이 자모 방식만으로 되어 있어 크게 중요하지 않으나, 한글은 자모 입력 방식에서 2벌 · 3벌 · 4벌 등 여러 가지가 있어 그 방식에 따라 글자꼴에 미치는 영향이 각기 다르다[그림 3].
날로 대중화되어 가고 있는 컴퓨터의 자판 배열은 한글의 기계화 · 전산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 통일된 글자판의 보급이 중요시된다. 2벌식과 3벌식은 자판을 인식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2벌식은 한글의 초성과 받침으로 쓰는 종성을 구별하지 않는 자판 체계이며, 3벌식은 같은 ‘ㄱ’ 이라 하더라도 초성이냐 종성이냐에 따라 자판의 키를 달리 배정해 놓고 있다.
이미 한글 타자기에서는 자음 1벌과 모음 1벌로 구성된 2벌식(외솔식)과 초성 자음 1벌과 모음 1벌, 받침 자음 1벌로 된 3벌식(공병우식), 그리고 초성 자음 1벌과 모음 2벌, 받침 자음 1벌로 구성된 4벌식(종래의 표준 자판)과 이 밖에 초성 자음 2벌, 모음 2벌, 받침 자음 1벌로 된 5벌식(김동훈식) 등이 사용되어 왔는데, 정부는 1969년 7월 4벌식을 타자기의 표준판으로 정하는 한편, 2벌식은 텔레타이프의 표준판으로 확정한 바 있다.
그 뒤 다시 1985년 5월 타자기의 표준 자판을 2벌식 입력에 4벌식 출력 방법으로 바꾸었다. 1982년 6월에는 당시 공업진흥청(KSC-5715)에서 컴퓨터 표준 글자판으로 2벌식을 KS로 고시,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들 표준판은 네모꼴에서 다소 벗어난 자형이기는 하나, 컴퓨터의 소프트 프로그램으로 글자 모양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어 별 문제는 없다.
과거 한 자씩 문선, 식자, 조판하던 때의 한글 글꼴이 명조체와 고딕체 두 가지에 불과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50종 이상의 한글 자체가 개발되어 컴퓨터 소프트에 내장되어 있으므로 편집자가 임의대로 글자체를 선정할 수 있게 되었다[그림 4].
출판 · 인쇄 산업은 컴퓨터에 의한 입력, 생산 방식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데, 한글의 기계화는 첨단 과학 발전과 더불어 이미 ‘조판’이라는 용어에서‘입력’이라는 전자화(電子化)된 용어로 옷을 갈아입고 미래의 정보화 사회에 도전하고 있다.
컴퓨터가 우리 나라에 도입된 이래 점차 대중화되면서 컴퓨터에서의 한글 처리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외국의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술이 축적되면서 한글 전산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일상에서의 문자 생활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정도가 되었다.
1바이트로 처리될 수 있는 영문자와는 달리 한글(음절)은 글자의 특성상 2바이트 이상의 부호 체계로 구성되는데, 이를 국가 표준화한 것이 KSC 5601이다. 국제표준화기구의 정보 교환용 부호 체계인 ISO 2022에 맞추어 1987년 처음 제정된 이 표준은 ‘완성형 한글 코드’로 불리며, 사용 빈도가 높은 한글 2,350자와 한자 4,888자 및 특수 문자 986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체계는 제정 이후 행정 전산망 등에서 사용되었고, 「윈도 95」 등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계의 코드로도 사용될 정도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완성형 한글은 모든 한글 글자를 전부 지원하지는 못하며, 그 구성 방법도 한글 음절의 조합 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민간에서 사용되던 코드 체계를 발전시켜 1992년 소위 ‘조합형 한글 코드’를 복수 표준화하였다.
조합형은 초성 · 중성 · 종성자들에 일정한 값(5비트로 정해짐)을 정해 두고, 여기에 한글 구분 비트를 보태어, 그 값들을 조합한 2바이트 값을 코드값으로 가진다. 이 부호계는 일부 문서처리기(워드프로세서)에서 내부 정보 처리 부호계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세계 각국의 모든 문자를 한 체계 안에서 사용하기 위한 연구가 계속되어 ISO 10646-1이라는 국제표준부호계가 마련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1995년 이를 국내표준(KS C 5700)으로 받아들였다.
이 부호계에서 한글 음절자 11,172자는 완성형으로 처리되며, 한글 옛 글자를 포함한 자소도 들어 있기 때문에 조합의 과정을 거쳐 거의 모든 한글 음절자를 구현할 수 있다. 이외에도 우리 문헌에 등장하는 구결자도 처리할 수 있으며, 한자도 2만여 자까지 쓸 수 있다. 장차 이 부호계는 컴퓨터 사용 환경에 등장하여 정보 처리나 정보 교환 등에서 편리하게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 표준으로써는 학술적인 용도로 사용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민간에서 정보처리용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부호계도 있다. (주)한글과컴퓨터사의 문서 처리기인 「ᄒᆞᆫ글」의 부호계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 부호계는 KSC 5601-1992 조합형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여기에 ISO 10646-1의 확장 기호를 비롯하여 한글 옛 글자와 소위 ‘확장 한자’ 10,880자까지 포함하고 있다. 「ᄒᆞᆫ글」은 문서 처리용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문헌 자료의 입력 및 처리용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17세기 국어사전』은 바로 이 체계로 입력 처리되고 출판까지 이루어졌다.
통일을 대비하여 『국어대사전』을 편찬하고 있는 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이와는 별도로 모든 글자를 4바이트 체계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여 사전 편찬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문자 자료를 처리하는 데 첫 관문이 되는 한글 입력은 흔히 자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판은 타자기 시대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컴퓨터 자판의 구성은 그에 적합한 한글 입력용 프로그램과 결부되어 있다. 국가 표준은 KS C 5715로 규정되어 있으며, 그 특징은 영문 자판과 혼용하여 사용된다는 것, 2벌식으로 입력한다는 것 등이다.
컴퓨터의 한글 운영 체계나 한글 응용 프로그램에서는 오토마타(automata)라 불리는 한글 입력 원리를 사용한다. 2벌식이란 자음 한 벌, 모음 한 벌의 글쇠만으로써 모든 한글 음절을 입력한다는 것으로, 글자를 구성하고 있는 자음과 모음을 초-중-종성의 순서대로 누르기만 하면 적절한 입력 오토마타가 음절 모아쓰기를 자동으로 실현한다. 예를 들어 ‘나랏님’을 입력하기 위해서는 ‘ㄴ-ㅏ-ㄹ-ㅏ-ㅅ-ㄴ-ㅣ-ㅁ’을 순서대로 입력하면 된다.
자판을 사용하지 않고 입력하는 방식으로는 문자 인식 · 음성 인식 방법도 연구되고 있으며, 문자 인식의 경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이미 상업적인 프로그램도 나와 있다. 문자 인식은 이미 인쇄된(혹은 쓰여진) 글자를 인식하는 오프라인 인식과, 컴퓨터에 연결된 전자 펜으로 글자를 써 나가면 이를 인식하는 온라인 인식으로 나누어진다.
오프라인 인식은 인쇄된 글자에 활용되며, 그 인식율이 나날이 개선되어 최근에는 90% 이상의 높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휴대용 컴퓨터를 위해 필기체 글자 온라인 인식이 개발되고 있으나, 아직 제약이 많다.
문서처리기(워드프로세서)는 개인용 컴퓨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문서처리기도 보급되었지만, 초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된 것이 없었고, 외국의 문서처리기(워드프로세서)를 수입하여 여기에 한글을 이식하여 처리하였다.
국내에서 개발된 것은 있었다 하더라도 아주 빈약한 수준이었다. 근래에는 독자적인 문서처리기가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준도 상당히 신장되어 우리 나라에서 사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으로 수출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서 환경은 외국과는 달리 여러 문자 체계가 포함되어있어야 하며, 도표의 형식이나 문장의 정렬 방식이 독특한 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접맥된 문서처리기의 개발이 과제로 남아 있다.
근래의 문서처리기는 문서 작성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두루 갖추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전문적인 수준의 출판 편집용으로도 거의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문서처리기에 맞춤법 검사기 및 한글 사전(일반 사전 및 유의어 사전), 한자 사전까지 포함되어 글 쓰기의 효율을 높여 줄 뿐더러 검색 기능과 재배열(sort) 기능까지 들어 있고, 매크로(macro)를 활용하면 한글 문헌 자료에 대한 갖가지 가공도 가능하다.
초기에는 명조체나 고딕체의 비트맵(bitmap) 글꼴이 고작이었으나, 최근에는 글꼴에 대한 저작권이 어느 정도 인정되고, 글꼴 제작 도구까지 보급되면서 전문 업체들이 새로운 글꼴을 보급하고 있다. 초기에는 비트맵 방식의 글꼴을 질이 낮은 인쇄기에서 느린 속도로 출력했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해상도가 최소 300 dpi 이상인 레이저 프린터를 이용하여 윤곽선 글꼴을 자유자재로 출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종래 주로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던 글꼴을 대체하게 되었으며, 일본 문자 글꼴을 수출하게도 되었다. 개발된 글꼴은 문서처리기와 함께 보급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특별히 고품위가 요구되지 않는 책이라면 대부분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하여 탁상출판을 하고 있다.
한편 문화관광부에서는 글꼴 개발의 원칙인 자형을 제정하고, 바탕체 · 돋움체 · 훈민정음체 · 필기체 등의 글꼴을 제작하여 일반에 무상으로 공급하고 있다.
컴퓨터는 본래 미국에서 개발되어 수입된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하드웨어는 영어 처리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실려 제 구실을 하게 되는데, 「윈도 95」 등 최근의 운영체계들은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한글로 파일 이름을 정하는 것도 가능하고, 모든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한글을 바탕으로 처리된다. 앞으로 한글 음성 인식 등과 연결되면 보다 편리하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에서 한글을 바탕으로 한 언어 처리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컴퓨터가 한글 및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목표하에 형태소 분석 · 구문 분석 · 전자사전 제작 등을 자동 처리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성과에 따라 최근에는 영-한, 일-한 자동 번역(기계 번역)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