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총회는 1908년 8월 31일 돈의문 밖 봉원사(奉元寺)에서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들과 국어연구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열었다. 이날 김정진(金廷鎭)을 회장으로 뽑고, 사립청년학원(私立靑年學院)에 학회의 위치를 정했다.
그 뒤 관립사범학교 교수, 부속보통학교 훈도, 사범학교 학생, 관립고등학교 학생, 사립학교 교사 및 학생, 그리고 기타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이 다수 입회하여 학회의 규모가 커졌다. 그리하여 평의회를 구성하고 학회를 당국에 청인(請認)하자는 주시경의 동의가 있었으나, 1911년 9월 조선언문회의 창설과 함께 폐지되었다.
국어연구학회는 산하에 ‘강습소’를 설립하여 국어강습활동을 펼치는 한편, 주시경을 문전저술위원(文典著述委員)으로 선임하여 문법서의 저술계획을 세우고, 또 고어 및 방언의 채집도 의논하였다. 이러한 계획들은 후속단체인 조선언문회가 창설됨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1909년 국어연구학회 산하에 설립된 ‘강습소’는 1911년 조선언문회 산하의 조선어강습원으로 개편될 때까지 2회에 걸쳐서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수업연한은 1년, 수업시간은 매주 일요일 오후, 과정은 소리 · 기갈 · 듬갈이었고, 강사는 주시경이 맡았다.
제1회 강습은 1909년 11월 7일부터 1910년 6월 30일까지의 일정으로,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서 열려 2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제2회는 1910년 10월에 열려 1911년 6월 27일에 끝났는데, 최현이(崔鉉彛: 최현배의 다른 이름) ·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51명이 졸업했다. 장소는 제1회 때와는 달리 사동(寺洞) 천도교사범강습소였으나, 나중에 전동(磚洞) 보성중학교로 옮겨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