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9월 3일 주시경(周時經)의 사저에서 열린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 총회에서 학회의 명칭을 ‘배달말글몯음[朝鮮言文會]’으로 바꾸고 그 산하의 강습소도 조선어강습원으로 개편하였다.
이 날 강습원의 규칙 14조를 통과시키고, 정관에 따라 2주 후인 9월 17일 임원진을 뽑아 체제를 갖추니, 원장에 남형우(南亨祐), 원감에 박상룡(朴相龍), 강사에 주시경, 간사에 김승한(金承翰)이 각각 선임되었다. 1914년 4월 ‘한글배곧’으로 명칭을 바꾸어, 1917년 문을 닫을 때까지 국문보급에 큰 업적을 남겼다.
조선어강습원에는 초등과·중등과·고등과·연구과 등 4개 학과를 두었다. 초등과·중등과·고등과는 각각 수업연한이 1년이었는데, 초등과에 ‘읽어리 및 소리갈’, 중등과에 ‘씨갈 및 월갈’, 고등과에 ‘높은말본’의 과정을 배정하고, 각 과정은 3학기로 구분하여 실시하였다.
1917년까지 중등과가 6회에 걸쳐 총 265명, 고등과가 5회에 걸쳐 110명을 배출하였고, 초등과는 1914년 1회 졸업생 8명을 내었다(연구과는 기록 미상). 주시경의 후계학자 대부분이 이곳 출신인데, 훗날 어문연구에 업적을 낸 대표적 인물로는 이규영(李奎榮)·이병기(李秉岐)·권덕규(權悳奎)·신명균(申明均)·최현배(崔鉉培)·김두봉(金枓奉)·정열모(鄭烈模)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