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까지 서울 및 지방에서 6회에 걸쳐 강습을 실시하였다.
제1회 강습은 1907년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실시되었는데, 소장은 김명수(金命洙), 강사는 주시경이며 졸업생수는 25명이었다. 과정은 음학(音學)·자분학(字分學)·변체학(變體學)·격학(格學)·도해학(圖解學)·실험연습(實驗演習) 등 6개 과목이 개설되었으나, 3회 때부터 뒤의 두 과목이 빠져 4개 과목으로 줄어들었다.
제2회(1908) 때 강습소의 개칙(槪則)이 마련되고, 제3회(1909) 때 규칙 7조가 확정됨으로써 강습소의 체제가 완비되었다. 제4회(1910) 때는 강습장소를 박동(礴洞)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로 옮겨 실시하고, 황해도 재령군남호(藍湖, 속명 나무리)에 국어전수과를 특설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하기조선어강습소’로 명칭을 바꾸어 제5회(1912)와 제6회(1914)를 지방에서 속개하였다. 졸업생들은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 조직에 참여하는 등 국문보급과 국어연구에 앞장섰다. 대표적 인물은 정국채(鄭國采)·장지영(張志暎)·김원우(金元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