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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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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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었던 조선전기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문(門). 성문.
이칭
이칭
서대문(西大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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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었던 조선전기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문(門). 성문.
개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대에 서전문(西箭門: 서살문)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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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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