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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국어학자 이규영(1890-1920)이 1907년부터 1917년까지 10년간에 걸친 조선언문회의 활동을 기록한 잡록. 활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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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국어학자 이규영(1890-1920)이 1907년부터 1917년까지 10년간에 걸친 조선언문회의 활동을 기록한 잡록. 활동집.
내용

필사본. 108장. 편찬에 관한 표시가 없으나, 필체로 미루어보아 이규영의 기록으로 보이며, 기록의 하한연대는 1917년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연혁·회록(會錄) 등 8부로 구성되었다.

연혁에는 1907년 7월부터 시작한 하기(夏期) 국어강습소, 1908년 8월에 발기한 국어연구학회, 1909년 7월에 시작한 국어연구학회강습소, 학회와 강습소 명칭의 변경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역사상 최초의 학회로 알려진 조선언문회는 1911년 9월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 3월에는 다시 ‘한글모’로 바뀌고, 국어강습소는 1911년 9월 ‘조선어강습원’으로, 1914년 4월 ‘한글배곧’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여기서 1913년 3월은 한글이라는 명칭사용의 최고 시점이다.

이 책의 회록과 이하의 기록을 검토하면, 이 단체는 주시경(周時經)의 주도하에 제자들인 김두봉(金枓奉)·이규영·권덕규(權悳奎)·신명균(申明均) 등이 일제하에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음이 밝혀진다.

즉, 강습소를 통하여 후계자를 길러내고 이들을 학회로 결속시켜 국가의 문언(文言)을 장려할 사상을 고흥(高興), 장려함을 입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뜻 있는 활동이었다.

이 활동을 통하여 배출된 인사는 위의 계승자 외도 33인대표 이필주(李弼柱)를 비롯하여 이명세(李明世)·변영태(卞榮泰)·오봉빈(吳鳳彬)·차상찬(車相瓚)·염상섭(廉尙燮)·신석모(申錫模)·김두종(金斗鍾)·현상윤(玄相允)·백남규(白南奎)·엄항섭(嚴恒燮) 등과 국어국문학계의 장지영(張志暎)·이병기(李秉岐)·최현배(崔鉉培)·정열모(鄭烈模)·김윤경(金允經)·이규방(李奎昉) 등 600여 명에 이르렀다.

회록에 이어 회칙, 원칙(院則), 회임원 일람, 회원 일람, 원임원 일람, 강습생 일람 및 부(附) 증서 일람이 기록되었는데, 특히 강습생 일람에는 졸업생의 학과와 근만성적(勤慢成績)이 점수로 기록되어 있다.

이 학회는 1921년에 창립하여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을 전개한 조선어학회와 연계되며, 강습소에서는 민족적 지도자를 길러내었다.

평가와 의의

이 책은 한 학회의 기록이지만, 1910년 전후의 국어운동 및 근대국어학사의 유일한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1981년 12월 한글학회창립60돐기념 국어학도서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주시경·이규영 등의 장서가 최남선(崔南善)육당문고(六堂文庫)에 다수 소장된 사실로 보아 이 문고의 소장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개화기의 국어연구단체와 국문보급활동」(고영근, 『한국학보』 30, 일지사, 1983)
「조선어학회의 창립과 그 연혁」(김민수, 『주시경학보』 5, 1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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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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