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운동은 국어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실제로 행하는 언어 운동이다. 국어운동에는 국어순화, 표준어, 외래어 등과 관련한 국어문제가 있다. 철자법, 한자, 로마자 등과 관련한 국자문제가 포함되기도 한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하류층과 부녀자의 표기 수단이었던 한글은 점차 확산되어 갑오경장 때 국문으로 격상되었으나 국한문체로 현실화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개화기 이후 국어의 규범화를 위해 한자 폐지와 국문 전용, 철자 개혁과 사전 편찬 등의 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에는 철자법·표준어·외래어 표기의 통일과 사전 편찬 등의 사업을 성취했으나 고난을 겪었다. 광복 이후 맞춤법을 정비하고 한자와 한글을 혼용, 국어순화와 관련된 운동이 이어져 왔다.
국어국자운동(國語國字運動)이라고도 하고, 혹은 국어운동과 국자운동을 구분하기도 한다. 한 나라의 언어나 문자에 관하여 어떤 불편을 느끼고 개선할 점을 의식할 때에 생기는 것이 국어문제이다. 또한, 정부가 국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취하는 행정적 처리가 국어정책이다. 이 운동은 견해의 차이로 대립되기 쉽다. 그 내용은 국어순화 · 표준어 · 외래어 등의 국어문제와 철자법 · 한자 · 로마자 등의 국자문제에 걸쳐 매우 범위가 넓다.
우리의 국어운동은 훈민정음 창제를 경계로 크게 양분되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는 다시 정음시대 · 언문시대 · 국문시대 · 한글시대 · 국어시대로 잘게 나누기도 한다.
(1) 훈민정음 창제 이전
훈민정음 창제 이전은 주로 차자표기(借字表記)와 지명개혁의 문제였다. 차자표기는 비범한 지혜가 발휘된 민족의 소산이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다양한 동음이자(同音異字)가 문제되어 첫 번째로 503년(지증왕 4)에 국명(國名)을 ‘ 신라’로 표기하고, 임금의 명칭을 ‘왕’으로 통일할 것을 결정했다.
두 번째로는 삼국통일 이후 확장된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757년(경덕왕 16)에 지명을 크게 개혁하여 한문식이자제(漢文式二字制)로 고친 사건이다. 그 이유는 간결주의에 있었겠지만, 같은 지명 예를 들어 창녕(昌寧) 비사벌(比斯伐)과 전주(全州) 비사벌(比斯伐)과 같은 경우를 고칠 필요성에도 있었을 것이다.
(2) 훈민정음 창제 이후
훈민정음 창제 이후는 흔히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① 정음시대(1443∼1504) : 신문자 창제로 문자생활이 복잡해졌다. 즉, 하류층에 쉬운 문자가 주어짐으로써 상층의 한문, 중간상층의 이두문(吏讀文), 중간하층의 언한문(諺漢文)과 함께 4원제로 다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세종도 한문과 이두를 쓰지 말라거나 폐지하라고 한 적이 없었고, 그 4원제는 실제로 개화기까지 지속되었다. 세종은 문자창제에 이어 인위적인 한자음개정을 단행하여 1448년에 『동국정운(東國正韻)』으로 반포했으나, 50여년 지탱된 뒤에 폐기되고 말았다.
또, 창제 때부터 철자법문제로 논란이 있었는데, 세종이 관여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표의주의적(表意主義的) 활자법과 세조가 관여한 『석보상절』의 표음주의적(表音主義的) 철자법의 차이가 그것이다. 이 문제는 집현전 학사 간의 논쟁을 거쳐 『훈민정음』 「종성해」에 규정된 8종성 채택으로 보아 서민에게 더 쉬운 표음주의로 낙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② 언문시대(1504∼1894) : 왕의 학정을 규탄하는 언문투서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하여 내려진 1504∼1506년 2년간의 언문금란(諺文禁亂)으로 시작되는데, 그 기간에도 왕이 언문을 증오하거나 폐지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즈음 16세기 초에 간소화된 철자법은 자연추세에 따라 4세기나 지속되었고, 정음은 여전히 하층과 부녀자의 언문 및 중간하층의 언한문으로 쓰이는 4원제였다. 그런데 이 시대에 특기할 것으로는 왜어금지령(倭語禁止令)과 철자법의 문란을 들 수 있다. 왜어금지령은 임진왜란으로 오염된 국어를 순화하려는 최초의 국어순화운동이었다.
또, 자연추세에 맡겨진 철자법은 실제언어와 전통적 철자법과의 괴리(乖離)로 갈수록 문란해지는 양상을 빚었다. 한편, 실학파에 의하여 융성해진 조선학(朝鮮學)이 정음에 대한 우수성의 찬양존중론을 고취한 가운데, 갑자기 새로운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③ 국문시대(1894∼1910) : 피동적인 갑오경장으로 시작되어 언문이 느닷없이 국문으로 격상되나, 사전에 준비가 없던 관계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당초에 본을 삼기로 했던 순국문은 1908년에도 한문과 이두가 여전히 쓰여 국한문체(國漢文體)로 현실화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반면에, 한자폐지와 국문전용, 철자개혁과 사전편찬 등 국어의 규범화를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지석영(池錫永)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갑자기 철자개혁의 방안으로 1905년에 공포되었다.
이에 대한 반대가 비등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국문연구소 설립으로 대안이 작성되었지만, 경술국치로 인하여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당시 최대의 의문이었던 아래아의 음가가 ‘ㅣ’와 ‘ㅡ’의 합음이라는 잘못된 주장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④ 한글시대 : 일제강점기로서, 일제에 의하여 1912년 ·1921년 ·1930년의 세 차례에 걸친 철자법정리, 1920년 최초의 사전편찬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한편, 1931년에 창립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는 국어통일에 의한 민족운동으로서 철자법 · 표준어 · 외래어표기의 통일과 사전편찬 등의 사업을 성취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최악의 고난을 겪었다.
당시 철자법은 1930년의 일제에 의한 개정과 1933년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표의주의였으며, 이에 대한 표음주의의 대결은 많은 논쟁과 파란을 일으켰다.
⑤ 국어시대(1945년 이후) : 광복과 함께 재건된 조선어학회가 만인의 뜨거운 추앙을 받으며 국어운동의 주체로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하의 그 업적은 권위를 가지고 즉시 실시에 옮겨졌다. 한 나라의 당당한 국어국자로 회복되면서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가 다양한 국어운동으로 격동을 거듭하게 되었다.
우선, 철자법문제는 1954년에 대통령이 기음법(記音法)의 채용을 명령하자 이에 반대가 들끓어 ‘한글파동’으로 번졌다. 많은 곡절 끝에 대통령의 명령철회로 끝났지만, 그것은 표의주의와 표음주의의 큰 대결이었다. 10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교단과 사회의 여론에 따라 정부에서 비현실적인 맞춤법의 정비에 나섰다.
1969년에 착수하여 1979년에 시안을 작성하였고, 1988년에는 그 개정안이 문교부 현재의 교육부 고시로 정식 공고되었다. 한편, 개정된 로마자표기법은 1983년에, 외래어표기법은 1986년에 각각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이 시대에 등장한 한자문제는 한글전용과 관련하여 역시 많은 곡절을 겪었다.
즉, 1958년 한글전용 강행, 1970년 다시 강행하여 교과서에서의 한자 삭제, 1972년 한자교육 부활 등의 악순환을 거치면서 사회의 간행물은 한자혼용이 임의로 선택되고 있다. 반면에, 언론계에서는 한자사용을 제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한자를 가르치고 쓰는 만큼 간편한 약자(略字) 제정이 필요하나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국어순화는 일부 실효를 거두었으나 여전히 한계가 있다. 1948년 문교부의 『우리말 도로찾기』, 1962년 한글전용특별심의회의 심의, 1963년 문법파동과 명사식 용어의 채택, 1976년 이후 국어순화운동협의회의 심의 등 부단히 힘을 기울여왔지만, 실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순화란 원래 노력에 비하여 성과가 미미한 성질이므로 거족적인 운동이 요구되며, 특히 일본어잔재의 일소는 광복 후 50년이 지났음에도 이루었다고 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이제 건국 50년이 지난 만큼, 어떤 방법으로든 이 문제는 매듭 지을 것이 기대된다.
한편, 표준어문제는 당초의 조선어학회 규정인 『조선어표준말모음』(1936)이나 『큰 사전』(1947∼1957)이 현실과 상충되어 자주 문제로 대두하였다. 정부에서 맞춤법과 함께 1979년에 그 재사정안을 작성하고 다시 손질한 개정안을 1988년에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도 그 개정의 방향은 현실화를 통하여 복수 표준어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쉽고 편리하게 하자는 것이었으며, 현대 서울 중류사회의 말을 기준으로 하던 원칙에서 중류사회가 교양인으로 수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