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며,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졌다. 훈민정음 창제는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여주시에 있다.
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 · 효령(孝寧) ·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擇賢)의 명분을 주어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이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해 영향을 주었다. 태종은 1414년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해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한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하였다.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 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 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세종 18년을 전후로 해 양분된다. 즉, 세종 18년에는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뀌면서 정치체제상의 변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는 세자(世子: 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해졌다. 따라서, 언관(言官)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그 이전과 달리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해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적 의례 · 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을 펼쳤다. 따라서 유교정치 기반이 다져졌다.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다.
세종 후반기에는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황희(黃喜)를 비롯한 최윤덕(崔潤德) · 신개(申槪) · 하연(河演) 등 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관료들의 정치 기강도 그 전후에 비해 건전했으며,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와 정치적 분위기도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데 작용한 요소였다.
한편, 집현전은 세종과 세종대를 운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이다. 집현전은 중국과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초 정종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집현전이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 때에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집현전에서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특히,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곳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 · 서연관 · 시관(試官) · 사관(史官) · 지제교의 직책을 겸하였다. 그들의 직무는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는 등 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왕은 이들이 학술로써 종신할 것을 희망했으므로 다른 관부에는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러한 인적 자원이 바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교적인 의례 · 제도의 정리는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작업으로서, 이를 위해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관심은 개국 초부터 있어 왔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세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다. 그 중심이 된 기관도 예조 ·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 집현전 등이었다. 이러한 기관에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 吉禮 · 嘉禮 · 賓禮 · 軍禮 · 凶禮)와 사서(士庶)의 유교적 의례인 사례(四禮: 冠禮 · 婚禮 · 喪禮 · 祭禮) 등 유교적인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 · 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정리된 의례 · 제도의 틀은 중국의 옛 제도에 따른 것이었으나, 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이를 비판 · 연구해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주체성을 견지하였다.
세종대에 전개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은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본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해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 · 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또, 이 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세종대의 편찬물의 중요한 것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표〉와 같다.
편찬연대 | 편찬물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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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0 | 孝行錄 | 유교윤리와 의례 |
세종 11 | 農事直說 | 농서 |
세종 14 | 三綱行實 | 유교윤리와 의례 |
세종 14 | 八道地理志 | 지리서 |
세종 15 | 無寃錄註解 | 중국 법의학서 |
세종 15 | 鄕藥集成方 | 의약서 |
세종 16 | 資治通鑑訓義 | 중국 역사서 |
세종 20 | 韓柳文註釋 | 중국 문학 |
세종 22 | 國語補正 | 중국 역사서 |
세종 23 | 明皇誡鑑 | 정치 귀감서 |
세종 24 | 絲綸全集 | 중국 법률서 |
세종 25 | 杜詩諸家註釋 | 중국 문학 |
세종 26 | 韻會諺譯 | 한글번역서 |
세종 26 | 五禮儀註 | 유교윤리와 의례 |
세종 26 | 七政算內外篇 | 천문 |
세종 27 | 治平要覽 | 정치 귀감서 |
세종 27 | 龍飛御天歌 | 조선개국찬가 |
세종 27 | 龍飛御天歌註解 | 한글 번역서 |
세종 27 | 諸家曆象集 | 曆數 |
세종 27 | 醫方類聚 | 의약서 |
세종 28 | 訓民正音創制 | 훈민정음 |
세종 29 | 東國正韻 | 음운 |
세종 30 | 四書諺解 | 유교경서, 한글 번역서 |
세종 30~문종 1 | 高麗史 | 역사서 |
〈표〉 세종대의 주요 편찬서 |
이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 · 음운 · 언역(諺譯) 관계서, 지리서, 천문 · 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즉, 정치 · 법률 · 역사 · 유교 · 문학 · 어학 · 천문 · 지리 · 의약 · 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 정리하는 사업으로, 이 작업을 통해 이 시대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특기할 일은 이러한 많은 편찬사업이 왕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고, 왕 자신도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은 집현전의 학자뿐 아니라, 53인이나 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총동원되어 3년에 걸쳐 이룩한 큰 사업이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위해 왕은 계속했던 경연까지 중지하고 밤늦게까지 친히 교정을 보았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임에 분명하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이선로(李善老) · 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문화 의식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 세종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 · 혼상(渾象) · 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 ·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 ·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다. 그리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다. 또한,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했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해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해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다.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종 20년에는 장영실에 의해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 · 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세종 15년에는 정인지 · 정초 · 정흠지(鄭欽之) · 김담(金淡) ·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게 했으며, 세종 24년에 완성되어 2년 만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도 이순지 · 김담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완전한 이슬람 천문학서의 번역본이라 하겠다. 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曆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세종 27년에는 이순지에 의해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에 이룩한 천문 · 역법의 총정리 작업과 천문의상 제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헌(古文獻) 조사사업의 결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높은 수준의 중국 천문학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 · 완성되었다. 이 측우기를 발명해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도 세종대에 확정되었다. 즉, 세종 13년과 28년에 확정된 도량형제도가 그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 제도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黃鐘律)을 낼 수 있는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삼은 것으로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삼았고,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무게의 단위로 삼은 것이었다.
인쇄술에서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은 계미자 인쇄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와 인쇄기를 만들게 해 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술상의 큰 발전을 가져 왔다. 세종 16년에는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체인 갑인자의 주조사업이 이천(李蕆)의 감독 아래 이루어져 20여 만 자의 크고 작은 활자가 주조되었다. 그 뒤 세종 18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있어서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종래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서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다. 완구(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 · 철제탄환 · 화포전(火砲箭) · 화초(火초)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세종에게서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못되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의 전면 개주(改鑄)에 착수하였다. 세종 30년에 편찬 · 간행된 『총통등록(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에는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 · 『사시찬요(四時纂要)』 등과 우리 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했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 · 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의약발명에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시대로서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 ·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 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조선과학사에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고, 그것은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이 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은 종래 미비하고 불완전한 아악을 바로잡기 위해 박연 등을 시켜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해 아악기를 만들게 하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해, 조회아악(朝會雅樂) · 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을 제정하였다. 그 뒤 아악은 국가 · 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아악의 부흥은 그 악기의 국내 생산과 직결된 문제로서 종래 중국에서 수입했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編磬)과 편종(編鐘)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세종은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게 해 모든 악기의 음(音)을 조율(調律)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친히 「정대업(定大業)」 · 「보태평(保太平)」 · 「발상(發祥)」 · 「봉래의(鳳來儀)」 등 대곡(大曲)을 작곡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여민락(與民樂)도 「봉래의(鳳來儀)」 일곱 곡 중 한 곡이며,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은 1964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왕은 또한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으니, 곧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정간보에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이 정간보를 사용해 향악인 「정대업(定大業)」 · 「보태평(保太平)」 · 「봉래의(鳳來儀)」 · 「봉황음(鳳凰吟)」 · 「만전춘(滿殿春)」 등을 기보하였다. 정간보는 세조대에 약간 개량된 것을 현재에도 국악에 사용하고 있다.
법제적 측면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적 민본주의 · 법치주의가 강화 · 정비된 시기였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續六典)』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續六典)』 6책과 『등록(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다. 그리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謄錄)』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해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續六典)』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형정(刑政)에 관한 왕의 시책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율문(律文)에 적합한 조목이 없는 경우에는 법률의 적용을 신중히 할 것, 고문으로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사죄는 삼복법(三覆法)을 적용할 것 등과 고문에 태배법(笞背法)을 금하며, 의금부삼복법(義禁府三覆法)을 정하였다.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인 자는 살인 · 강도죄를 제외하고는 수금(囚禁)하지 못하며, 10세 이하 80세 이상인 자는 사죄(死罪)를 범해도 수금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죄인(徒罪人)의 부모가 70세 이상인 자는 노친(老親)의 소재지에서 복역하도록 정하였다. 또한, 남형(濫刑)을 금할 것, 주인을 살해한 노비는 반드시 관에 고해 시행하게 할 것, 도류(徒流) 죄인의 수속금(收贖金)이 과중하므로 빈민에게는 감면하도록 할 것 등을 정했으며, 옥도(獄圖)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여러 차례 옥내(獄內)의 위생과 난방을 철저히 관리해 병들어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신칙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 · 온옥(溫獄) · 남옥(男獄) · 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했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 · 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관해서는 자자(刺字) · 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다. 그리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해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해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해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 ·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 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文治)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 화기의 제조 · 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에 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세종 8년에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억불책을 써왔고, 태종대에는 더욱 강화하였다. 세종도 불교에 대한 시책은 선대의 것을 따랐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 · 구병(救病) · 명복(冥福) 등을 위한 불사(佛事)는 세종대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세종은 유신(儒臣)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에도 불구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불교를 급히 없앨 수는 없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권을 재정리할 필요를 느껴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세종 6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 양종으로 병합했으며, 사사(寺社) · 사사전 · 상주승(常住僧)의 액수를 재정리하였다. 즉, 선교 양종에 각 18사(寺) 합 36사를 본사로 인정하고, 사원전은 7,760결(結), 상주승 3,600인으로 삭감 · 정리하였다.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都城) 안에서의 경행(經行)도 파했고, 궐내의 연등행사도 없앴다. 그리고 여항(閭巷)에서의 연등도 승사(僧舍) 이외에서는 일체 금하였다.
이처럼 세종의 불교에 대한 시책은 불교의 세속권의 정리 · 약화와 불교행사의 제한으로 나타났으나 왕실과 세종 개인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였다. 세종 14년에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7일간의 수륙재(水陸齋)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세종 17년부터 24년까지는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 · 석탑(石塔)의 중수, 안거회(安居會) · 경찬회(慶讚會)의 설행(設行)을 둘러싸고 유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또, 세종 28년에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왕은 유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경(佛經)의 금서(金書)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세종 30년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내불당(內佛堂)을 세웠다.
세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말년에 오면서 크게 변하는데, 이는 세종 26년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에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 28년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도 세종이 불교로 기우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결과 세종 말년에 오면 세종과 유신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 초부터 국가의 기본시책이 숭유억불이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 · 학문 · 철학 · 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유불(儒佛)의 갈등 가운데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정치 · 유교사회의 기반이 다져진 시대였다.
이 밖에도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 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 사업 등을 폈고,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고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 · 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 · 전주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하였다. 그 덕분에 임란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한 사실 등도 기억해야 될 일이다.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세종을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 · 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 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종(世宗)이다. 능호는 영릉이다. 왕릉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왕대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