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7년(세종 19) 4월에 만든 것으로 전해지나,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작자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432년에 세종이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에게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만들도록 명한 사실로 보아 정인지와 정초, 이천(李蕆) 등이 제작과정을 전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만들어진 해시계로는 천평일구 외에도 앙부일구(仰釜日晷) · 현주일구(懸珠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모두 소실되어 앙부일구 외에는 그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천평일구는 현주일구와 구조가 거의 비슷하다고 하는데, 다만 현주일구가 시반(時盤) 북쪽 편에 기둥이 세워진 데 반해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또한 현주일구가 북쪽 기둥 머리에 추를 달아서 아래쪽 십자 표시에 닿게 하여 수평을 유지한 데 반해, 천평일구는 기둥 머리에 노끈을 꿰어 그것이 남쪽을 가리키게 하였다. 그리고 현주일구가 남쪽 한곳에만 못〔池〕을 판 데 비해 천평일구는 남쪽과 북쪽 두 군데에 못을 파고 그 한가운데다 기둥을 세웠다.
‘천평’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수평을 더욱 잘 유지하기 위해 두 개의 못을 판 것으로 짐작된다. 이 외에도 현주일구와 마찬가지로 시반 한가운데에 100각(刻)이 표시되어 있는 작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100각을 표시한 것은 당시의 시제(時制)가 1일은 100각이라는 데 따른 것이다. 크기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현주일구가 6촌 3푼인 것으로 볼 때, 거의 비슷한 크기였을 것이다.
천평일구는 “말을 타고 가면서도 시각을 알기 위해 만든” 시계였음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때문에 다른 해시계들에 비해 가장 이동하기 편리한 휴대용 시계였으며, 군대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