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 고주본(古注本) 《시 詩》·《서 書》·《좌씨전 左氏傳》을 자본(字本)으로 하여 수십만 개의 크고 작은 동활자를 만들어 냈는데, 이 활자는 조선 최초의 동활자로서 그 해의 간지를 붙여 ‘계미자’라 한다. ‘정해자(丁亥字)’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의 기록에 의하여 1407년의 주조로 보고, 그 해의 간지를 붙인 명칭이다.
그러나 당대의 인물인 권근(權近)이 쓴 계미자의 주자발(鑄字跋)에 언급된 주조연대가 보다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주자발에는 계미자의 자본이 막연히 고주본 《시》·《서》·《좌씨전》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계미자본을 보면 남송의 촉본(蜀本)에서 볼 수 있는 글자체와 비슷하며 구양순체(歐陽詢體)의 바탕에 둥근 운필이 곁들여지고 있다.
송본의 전래가 극히 드문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이를 모난 운필의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한 구양순체로 여겨왔으나 재고가 필요하다.
조선왕조는 제3대 왕인 태종 때 와서 비로소 그 기틀이 잡혔다. 왕조의 기반이 안정되자 우선 행정기구를 개혁하여 독자적인 관제로 정비하는 한편, 억불숭유책을 국시로 하여 숭문정책을 펴나갔다. 이를 위하여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무엇보다도 중요했으므로 책의 인쇄 보급이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태종은 1403년 2월 고려 말의 서적원제도(書籍院制度)를 본받아 주자소를 설치하고, 부족한 동철(銅鐵) 수급을 위하여 내부(內府)의 것을 모두 내놓는 한편, 종친·훈신 등의 신하들에게도 자진 공출하게 하였으며, 소요경비는 임금이 개인적으로 내탕금(內帑金)을 내놓아 활자주조를 착수하게 하였다.
그 때 이직(李稷)·민무질(閔無疾)·박석명(朴錫命)·이응(李膺) 등이 이 일을 감독하였고, 강천주(姜天霔)·김장간(金莊侃)·유이(柳荑)·김위민(金爲民)·박윤영(朴允英) 등이 직접 일을 관장하였다. 주조는 몇 달 걸려 끝났는데, 주조기술이 아직 미숙하여 적지 않게 고심한 듯하다.
그 주조기술을 현재 전하고 있는 고려 사주본(寺鑄本)인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활자의 주조술은 바탕글자를 쓰고 새겨서 부어내는 과정과 방법이 대폭 개량되었지만, 활자의 크기와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고 또 글자 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그 획이 부분적으로 끊긴 것도 있어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편이다.
② 조판술도 크게 개량되었으나, 네 모퉁이를 고착시킨 틀의 위아래 변(邊)에 계선까지 고착시킨 동판을 만들어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각 줄에 꽉 들어맞도록 밀착 배열하여 옆줄이 맞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윗글자와 아랫글자의 획이 물려 있다.
또, 근년에 발견된 계미소자본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 제5·6권 1책을 보면 각 줄의 활자 수가 2, 3자의 차이가 나는 경우까지 있다. 이와 같이 활자의 주조방법이 고려의 사주활자와는 달리 대폭적으로 개량되었으나 아직도 미숙한 상태에 있었고, 조판법도 기술의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던 초기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의 공통된 특징이 보인다.
계미자의 조판법은 판틀인 동판 바닥에 먼저 밀랍을 깔고, 활자를 식자한 다음 열을 가해서 밀랍을 녹이고 판판한 철판으로 위에서 고르게 눌러 활자면을 평평하게 하고, 열을 제거하여 개개의 활자가 굳어지면 인쇄하였다. 그런데 밀랍의 성질이 부드러워 응고력이 약하기 때문에, 인쇄 도중 자주 활자가 흔들리고 기울어져 수시로 밀랍을 녹여 부어 바로잡아야 했다.
그 결과 밀랍의 소비량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하루에 찍어내는 양은 겨우 몇 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경우 활자는 밀랍 속에 잘 꽂힐 수 있도록 그 끝을 모두 송곳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었지만, 활자의 크기와 두께가 고르지 못하고 동판도 거칠게 만들어져 자주 동요되었던 듯하다.
이러한 인쇄기술로 1410년 2월부터는 주자소로 하여금 책을 찍어 팔게 하여 문헌을 널리 보급시켰으므로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된다.
계미자로 찍어낸 책으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종류와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십칠사찬고금통요》 제16권 1책(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국보, 1973년 지정), 《십칠사찬고금통요》 제17권 1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국보, 1973년 지정),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제4·5권 2책(全晟雨 소장, 국보, 1973년 지정),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제6권 1책(趙炳舜 소장, 국보, 1973년 지정), 《송조표전총류》 제7권 1책(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국보, 1973년 지정), 《송조표전총류》 제6∼11권 1책(호암미술관 소장),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제5·6권 1책(趙炳舜 소장),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제7·8권 1책(개인 소장), 《도은선생시집》 제1권 1책(趙炳舜 소장), 《도은선생시집》 제3권 1책(金完燮 소장), 《지리전서범씨동림조담》 권상·하 1책(조병순 소장), 《찬도호주주례》 제1·2권 1책(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근래에 경자자본 《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 1책(汎友社 소장)과 《통감속편》 24권 6책(孫成熏 소장, 국보, 1995년 지정)의 서문을 계미자 큰 자로 찍은 것이 발견되었다. 경자자는 큰 활자가 없으므로 적어도 한 벌 정도를 남겨 두었다가 썼음을 알 수 있다.
계미자의 번각본(飜刻本) 중 현재까지 알려진 전존본은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 제1∼26권(1418년 제주목 번각본, 1687년 제주목 중번각본), 《음주전문춘추괄례시말좌전구두직해 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 제1∼70권(1454년 금산 번각본)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십일가주손자 十一家註孫子》(1409년 인출), 《대학연의 大學衍義》(1412년 인출) 등의 번각본 낙질이 있다.
그리고 문헌상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계미자본도 그 수가 적지 않다. 이 계미자본은 고려에서 1230년대에 주자로 찍어낸 《상정예문 詳定禮文》과 그 이전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보다 1세기 반 남짓 뒤지지만,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J.)가 1440년대 말 유럽에서 최초로 발명한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보다는 40년이나 앞선다. →주자소,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