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0년에 만든 경자자(庚子字)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지자 좀더 큰 활자가 필요하다고 하여 1434년 갑인년(甲寅年)에 왕명으로 주조된 활자이다.
이천(李蕆)·김돈(金墩)·김빈(金鑌)·장영실(蔣英實)·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이 두 달 동안에 20여 만의 큰 중자(中字)인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를 만들었다.
갑인자 자본(字本)은 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順事實≫·≪위선음즐 爲善陰騭≫·≪논어≫ 등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뒤에 세조가 된 진양대군 유(晉陽大君瑈)가 써서 보충하였다. 자체가 매우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하고 부드러운 필서체로 진(晉)나라의 위부인자체(衛夫人字體)와 비슷하다 하여 일명 ‘위부인자’라 일컫기도 한다.
이 활자를 만드는 데 관여한 인물들은 당시의 과학자나 또는 정밀한 천문기기를 만들었던 기술자였으므로 활자의 모양이 아주 해정하고 바르게 만들어 졌다.
경자자와 비교하면 대자와 소자의 크기가 고르고 활자의 네모가 평정(平正)하며, 조판(組版)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고안하여 납(蠟)을 사용하는 대신 죽목(竹木)으로 빈 틈을 메우는 단계로 개량,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하루의 인출량(印出量)이 경자자의 배인 40여 장으로 크게 늘어났다. 현재 전하고 있는 갑인자본을 보면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지고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하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다.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활자인쇄술은 세종 때 갑인자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하였으며, 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개주(改鑄)되었다. 뒤의 개주와 구별하기 위해 특히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라 하였다.
이 초주갑인자는 1580년(선조 13)에 재주(再鑄)될 때까지 140여 년간에 걸쳐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해지고 있는 인본의 종류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 소장의 ≪대학연의 大學衍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분류보주이태백시 分類補註李太白詩≫ 등을 초인본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갑인자에 붙여 특기할 것은 이 활자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글활자가 만들어져 함께 사용된 점이다. 만든 해와 자체가 갑인자와 전혀 다르므로 ‘갑인자병용한글활자’ 또는 처음으로 찍은 책의 이름을 따서 ‘월인석보한글자’라 한다.
이 한글활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수양대군 등이 세종의 명을 받고 1446년에 죽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47년 7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하여 국역한 <석보상절>과 그것을 세종이 읽고 지었다는 국한문본 <월인천강지곡>이 이 활자로 찍혀졌으므로 세종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갑인자 한글활자는 획이 굵고 강직한 인서체(印書體)인 것이 특징이며, 세종이 우리의 글자를 제정하고 난 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초주갑인자는 오래 사용하는 사이에 활자가 닳고 이지러지고 부족한 글자가 생겨 1499년(연산군 5) ≪성종실록≫을 찍어낼 때와 1515년(중종 10)에 보주(補鑄)가 이루어졌고, 그 밖에도 수시로 목활자를 만들어 보충하며 선조 초까지 사용되었다.
1580년(선조 13) 경진(庚辰)에 주조한 활자를 그 해의 간지를 따서 경진자라 하고, 이것이 갑인자를 두번째로 다시 주조한 것이므로 재주갑인자라 일컫는다. 이 활자의 재주에 관하여는 1573년(선조 6) 계유년과 1580년 경진년에 이루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계유자설(癸酉字說)은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초 眉巖日記草≫에 “갑인자 주조의 철은 먼저 466근1냥1전을 받아 내놓았는데, 주자로 사용된 것이 397근3전”이라고 한 기록에 의한 것이다.
경진자설(庚辰字說)은 ≪광해군일기≫에 “평시의 서적인쇄는 전적으로 주자에 의존해왔는데, 그 뒤 1580년 경진에 선왕인 선조가 또 갑인자의 개주를 명하여 일국에 보급하게 함으로써 큰 도움을 주더니 불행히도 병화를 겪는 사이에 옛 활자를 잃어, 지금은 오직 나무활자를 사용하고 있다.”라고 한 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러던 중 김귀영(金貴榮)의 ≪동원집 東園集≫<제주자도감계축병소지 題鑄字都監契軸並小識>에 “선조 13년(1580) 경진 정월 대내(大內) 소장의 갑인자본 ≪대학연의 大學衍義≫로 글자본을 삼고 그 주조에 착수하여 그 해 9월에 마쳤는데, 그 일을 박순(朴淳) 등이 감독하고 황윤길(黃允吉) 등이 관장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 데서 경진자설의 옳음이 밝혀졌다.
이렇게 볼 때 유희춘의 계유자설은 그 해에 을해자를 크게 보주(補註)하기 위하여 내놓은 철을 갑인자 주조를 위한 것으로 착각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주갑인자는 초주갑인자에 비하면 정교도가 떨어지고 운필에 박력이 적지만, 이후의 다른 개주갑인자보다는 낫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재주갑인자의 인본으로는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시전대전 詩傳大全≫ 등이 있다.
갑인자의 세번째 개주는 1617년(광해군 9)에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종래의 주자제도를 복구하고자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고 주조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618년 7월에 완성되었다.
그 해의 간지를 따서 무오자(戊午字) 또는 광해군동자(光海君銅字)라 한다. 갑인자를 개주한 것 중에서는 가장 박력이 없으나, 갑인자의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활자의 특징은 1623년(인조 1) 6월에 사간 정온(鄭蘊)에게 내사(內賜)한 기록이 적힌 유시부(柳時溥) 소장 ≪서전대전 書傳大全≫이 발견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이 활자로 찍어낸 책은 그 밖에 ≪시전대전 詩傳大全≫이 겨우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년에 일본 동경대학교 도서관에서 1622년(광해군 14)에 찍은 ≪황화집 皇華集≫과 국내의 오운(吳澐) 종손가에 있는, 1620년 3월 임금이 신하들과 선농단(先農壇)에 제사지내고 밭갈이 한 다음 주연을 베풀 때 신하들이 읊은 ≪노주연송덕회편 勞酒宴頌德會編≫을 각각 이 무오자로 찍어냈음이 밝혀졌다.
이렇듯이 활자 인본의 전래가 극히 드문 것은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사정 속에 이루어진 개주였기 때문에 그 규모가 작은데다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모두 흩어져 없어진 데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래되고 있는 인본의 종수가 적은 점을 들어 임진왜란 후에 만들어 쓴 목활자의 부족과 이지러진 것을 보충하기 위한 보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인본들에서 목활자가 섞여 있지 않은 동일한 갑인자계의 동활자로 찍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듯이 다른 개주갑인자와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갑인자의 네번째 개주는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어사(守禦使:남한산성을 지키던 수어청의 우두머리)를 겸직한 바 있던 김좌명(金佐明)이 1668년(현종 9)에 호조와 병조의 물자 및 인력을 사용하여 수어청에서 대자 6만6100여 개와 소자 4만6000여 개의 동활자를 주조한 것으로, 이 활자들은 그가 죽은 뒤 교서관(校書館)으로 옮겨졌다. 이것을 그 해의 간지를 붙여 무신자(戊申字) 또는 무신갑인자라 한다.
이 활자도 개주갑인자로서는 정교롭지 못하나 무오자보다는 박력이 있으며, 영조 말기까지 백여년 동안 사용되어 그 인본의 종수가 매우 많다. 이와 같이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찍은 책은 인쇄가 깨끗하지만, 뒤에 찍은 것은 활자가 닳고 이지러지고 목활자가 많이 섞여 인쇄가 정교하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이 무신자와 함께 한글활자가 다시 만들어져 국역본의 인출에 병용되었음도 특기할만하다.
사주갑인자본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잠곡선생연보 潛谷先生年譜≫·≪동래선생음주당감 東萊先生音註唐鑑≫·≪시경언해 詩經諺解≫ 등이 있다.
갑인자의 다섯번째 개주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1772년(영조 48)에 초주갑인자본 ≪심경 心經≫과 ≪만병회춘 萬病回春≫을 자본으로 하여 주조한 것으로 임진자(壬辰字)라 하며 교서관에 두고 사용하였다.
정조의 어정서(御定書)와 명찬서(命撰書)를 해제하여 연대순으로 엮어놓은 ≪군서표기 群書標記≫에 수록된 오주갑인자 인본을 보면, 1772년에 ≪역학계몽집전 易學啓蒙集箋≫, 1773년에 ≪신정자치통감강목속편 新定資治通鑑綱目續編≫, 1775년에 ≪경서정문 經書正文≫, 1777년에 ≪원속명의록 原續明義錄≫, 1799년에 ≪아송 雅誦≫ 등이 각각 인출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임진자 조판의 실물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온 갑인자계 동활자는 1777년에 평안감사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15만 자를 더 주성하게 한 것으로 정유자(丁酉字)라 한다. 정유자는 가주(加鑄)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교서관에 둔 임진자에 합치지 않고 규장각의 본원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다.
책을 인쇄할 때는 감독을 맡은 각신(閣臣)이 당시 주로 사용했던 임진자·정유자·임인자(재주한구자) 중 어떤 활자로 찍을 것인가를 임금에게 품의하여 사용하고, 다 쓰면 원위치로 돌려보내서 간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글자체가 서로 같아 인본의 식별이 어려워서 종래는 정유자가 주성된 1777년 이전의 인본은 모두 임진자본이고, 그 이후의 인본은 모두 정유자본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군서표기≫에 의하면, 1781년(정조 5)에 정유자로 찍은 ≪팔자백선 八子百選≫이 최초의 것이며, 그 이후 정유자본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러다가 1794년에 이 활자를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설치했던 주자소로 옮겼다.
이는 1814년(순조 14)에 만든 ≪판당고 板堂考≫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위부인자 동자 큰 글자 10만5638자, 작은 글자 4만4532자는 평안도 감영인 기영(箕營)에서 주조한 것”으로 표시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1857년(철종 8) 8월 주자소에 화재가 발생하여 활자가 모두 소실되었는데, 그 중의 위부인자가 바로 정유자였다.
그때 화재로 소실된 다른 활자는 다음해에 다시 주성되었지만 정유자만은 주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서관에 둔 임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정유자는 1857년까지 인쇄에 사용되고, 그 이후는 임진자가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다가 다른 활자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어 그 잔존 활자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한글활자를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나무로 만들어 임진자·정유자와 병용되어 ≪속명의록 續明義錄≫ 등의 국역본을 적지 않게 찍어내는 데 이용되었다. →금속활자,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