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사찰에서 주조한 금속활자. 1377년(우왕 3) 흥덕사(興德寺:충청북도 청주에 있던 절)에서 주자하여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같은 주자로 찍은 《자비도량참법집해 慈悲道場懺法集解》의 번각본도 2종이 전래되고 있다. 이를 주조한 절의 이름을 따서 흥덕사자라 일컫기도 한다.
이 활자의 글자모양은 남송에서 비롯하여 원나라에서 성행하였던 서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충선왕 이후 우리 나라에 영향을 끼친 송설체(松雪體)의 필의가 곁들여진 글자체이다.
이 주자로 찍은 유일한 현존본인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한(景閑)이 여러 부처와 그 법통을 이어온 역대 조사와 고승 대덕들의 게(偈)·송(頌)·찬(讚)·가(歌)·명(銘)·서(書)·법어·문답 중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것을 초록하여 상·하권으로 엮고 제목한 것이다. 이 책의 고려본은 활자본과 목판본 두 종이 있는데, 그 중 활자본은 하권 1책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주본의 서지적 특징을 우선 살펴보면, ① 광곽(匡郭)의 사주(四周)를 붙인 틀의 상하변에 계선(界線)을 고착시키고 있으며, ② 한 인판(印版)의 동일한 글자에 같은 꼴이 나타나지 않으며, ③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옆줄이 맞지 않고 윗자와 아랫자의 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것이 눈에 띈다. 이런 점에서 처음에는 이 책을 목판본이라 주장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시대 최초의 관주활자(官鑄活字)인 계미자(癸未字) 인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기술이 치졸한 초기의 활자본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것이 활자본이라는 것은 ① 본문의 글줄이 곧바르지 않고 한 줄에 글자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것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② 그 중에는 일(日)과 일(一)의 경우와 같이 거꾸로 식자되거나 판심제(版心題)인 ‘직지(直指)’의 경우와 같이 인쇄중 ‘지(指)’가 탈락된 것이 있고, ‘동(動)’의 경우와 같이 탈락된 것을 인쇄한 후에 붓으로 써 넣은 것도 있으며, ③ 글자의 먹색에 진하고 엷음의 차이가 극단적인 점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그리고 더 세밀하게 조사하면, ① 약간의 부족자를 보충한 것을 제외하고, 글자획에 칼로 새긴 자국이나 나뭇결이 나타나지 않으며, ② 한 인판의 동일한 글자에 같은 자양(字樣)은 나타나지 않지만, 활자의 모양이 정교하게 주조된 것이 많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모양이 일그러지고 획의 일부분이 끊긴 것도 많이 보인다.
③ 주조과정에서 생긴 기포의 흔적과 너덜이가 붙어 있는 것도 나타나고 있다. ④ 활자는 중소자(中小字)의 2종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 소자는 세주(細註) 이외에 본문을 찍은 중자가 부족하여 그 대용에 충용되고 있다.
또한 이들 활자의 크기가 고르지 않아 각 줄의 글자 수가 18∼20자와 같이 한두 자의 드나듦이 생겨 옆줄이 맞지 않고 윗자와 아랫자의 획이 닿거나 엇물린 것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초기의 금속활자 인쇄본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금속활자본이라 해도 조선시대의 관주활자처럼 활자의 모양과 크기를 똑같이 다량 생산하는 주물사(鑄物沙) 이용의 방법으로 주조한 활자인본에서는 볼 수 없고, 밀랍을 이용한 사찰의 전통적인 주조법으로 만든 활자인본에서 나타나는 것이 또한 그 특징이다.
그 밀랍을 이용한 주조법이란 밀랍을 정제하여 활자모양으로 만들어 그 한쪽 면에 얇은 종이를 이용하여 정서한 글자를 뒤집어 붙이고 새긴 다음, 쇳물의 열에 견딜 수 있는 도가니 만드는 흙과 질그릇 만드는 찰흙을 섞어 반죽한 것으로 주형(鑄型)을 만들고 구멍을 내서 가열하여 속에 든 밀랍을 녹여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공간에 쇳물을 부어 식힌 다음, 두들겨 깨서 활자를 하나하나 손질하여 완성시켰다. 이 경우 주형은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동일한 글자의 같은 꼴을 주조해낼 수 없다.
그리고 같은 전통적인 밀랍 주조법이라 하더라도 13세기 중앙관서가 만들어 찍은 주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의 중조판(重彫板)과 크게 확대하여 보면 한 판의 동일 글자에 같은 꼴과 크기의 것이 나타나지 않는 점은 비슷하지만, 활자의 주조와 조판 면에서 그 기술이 이것보다 나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사주활자의 특징이 부각된다 하겠다.
이 활자로 찍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의 권말에 ‘선광 7년 정사 7월 일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에 이어 그 뒷면에 ‘연화문인 석찬 달잠, 시주 비구니 묘덕(緣化門人釋璨達湛 施主比丘尼妙德)’의 인기(印記)가 있다.
문인 석찬은 경한의 시자로서 그의 스승이 찬술한 《백운화상어록 白雲和尙語錄》을 집록하였고, 1378년(우왕 4) 6월 경기도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다시 목판으로 간행할 때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
달잠은 석찬·법린(法隣) 등과 함께 《백운화상어록》을 간행하는 데 조연하였고, 묘덕도 《백운화상어록》과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목판인쇄할 때 크게 도왔다.
이와 같이 조연한 문인들과 시주들이 당대의 인물들이므로 이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그 인출기록대로 이때 이 사주활자로 인쇄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주자본은 사찰에서 주조한 활자로 찍은 것이기 때문에 그 기술이 치졸한 편이지만, 원나라의 굴욕적인 지배로 중앙관서의 주자인쇄기능이 마비되었던 사이에 지방의 일개 사찰이 주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내서 고려금속활자 인쇄의 맥락을 이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이 온세계에 공개되어 우리 민족이 최초로 주자인쇄를 창안하여 발전시킨, 슬기로운 문화민족임을 실증해 준 인쇄문화유산인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고려주자,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