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온은 조선전기 호조판서, 좌군총제,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75년(우왕 1)에 태어나 1418년(세종 즉위)에 사망했고, 세종의 장인이다.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 심덕부와 함께 조선 창업에 참여하여 간관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세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영의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동생이 상왕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문종 때에 관직이 복위되었다.
1385년(우왕 11) 사마시에서 생원 합격,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 창업에 참여, 간관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1408년(태종 8) 딸이 충녕군(忠寧君: 뒤에 세종)의 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벼슬도 높아졌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성을 침탈하고 병기 관리에 소홀한 수군첨절제사 박영우(朴英祐)를 파직시키고, 이어 대사헌이 되어서는 관기 확립에 힘썼다. 1414년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 · 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려 후기에 권세가들에 의하여 천민으로 바뀐 양민들의 신분정리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이어서 호조판서 · 좌군총제 · 판한성부사를 역임했는데,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행동에 연루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 ·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양녕대군을 대신해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동생 심정(沈泟)이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강상인의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박은(朴訔)은 대질심문 없이 심온을 모반죄로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박은의 발언과 결부되어, 『기재잡기(寄齋雜記)』 등 야사(野史)에는 심온이 세상을 떠나기 전 후손에게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吾子孫 世世 勿與朴氏相婚也] 유언했다고 전하고 있다. 9세손 심단(沈檀, 1645∼1730)이 쓴 「안효공온신도비명(安孝公溫神道碑銘)」에 이러한 유언을 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후에 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