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조선전기 제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00~1418년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조선 건국과정에서 결정적인 고비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선 인물이다. 건국 후 신진개혁세력과 갈등을 겪었지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여 국권을 장악하고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육조를 직접 관할하면서 왕 중심의 정치를 펼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을 무더기로 제거했다. 광범위한 분야의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능호는 헌릉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다.
재위 1400∼141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방원(芳遠)이다.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한때 원천석(元天錫)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 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을 요청하는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를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는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이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이 때 이방원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 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였다. 왕대비(王大妃: 공민왕 비 안씨)에게 압력을 넣어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강비(康妃: 태조의 계비) ·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였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하자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生釁) · 모만(侮慢) 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을 해결하였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요동 정벌계획을 적극 추진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처지에 이른다. 이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여러 사정을 감안해 세자 추대를 사양하였다.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의 결정하여 1등이 되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가로 올랐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고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을 무더기로 제거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춰내 이거이와 이저(李佇)를 귀향시켰다.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1409년에는 민무구와 연계지어 이무(李茂) · 윤목(尹穆) · 유기(柳沂) 등의 목을 베었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 · 민무회(閔無悔) 형제를 서인으로 폐하고, 이듬 해 사사하였다.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1414년에는 잔여 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을 견제할 만한 신권은 없었다.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단행하고 사전(私田)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하였다.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면서 그 때까지 의정부합좌에 참여했던 삼사 · 예문춘추관 · 삼군총제를 제외하였다. 그리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여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다.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육조 기능을 강화해 육조직계제로 강화하려 하였다. 그래서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 판서로 높였다.
전곡(錢穀)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 · 우정승이 장악했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 · 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 해에 대언사(代言司)를 강화해 동부대언을 증설하였다. 그리고 6대언이 육조의 사무를 나눠 맡도록 하였다.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屬司)를 설치하였다.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 관아 중에서 의정부 · 사헌부 · 사간원 · 승정원 ·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이렇게 육조가 관장하거나 지휘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육조가 국정을 나눠 맡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해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1403년과 1406년에 고려 말 이래의 문란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했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개편하였다. 즉, 같은 해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고쳤다.
또한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고쳤다. 아울러 군 · 현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 · 천(川)’자 등으로 바꾸면서 1유도부(留都府) · 6부(府) · 5대도호부(大都護府) · 20목(牧) · 74도호부 · 73군 · 154현으로 지방 행정을 정비하였다. 이듬 해 경기좌 · 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였다.
1417년에는 평안 · 함길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도안무사(都安撫使)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였다.
풍해 · 영길도를 황해 · 함경도로 개칭하여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그 밖에 1409년 전라도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 · 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다. 향 · 소 · 부곡도 가까운 군 · 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태종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즉위한 만큼 군사에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甲士)로 편입시켰다. 의관(衣冠) 자제 중 무예에 뛰어난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다.
1404년에는 응양위(鷹揚衛)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內上直)을 내금위(內禁衛)로 개편하면서 가장 신임하는 인물을 왕의 의지로써 등용하였다. 1409년 내시위(內侍衛)를 설치했고, 10사(司) 중 9사를 시위사(侍衛司)로 개편하였다.
군사의 지휘체제와 관련해 1401년 삼군부를 승추부로 개편해 왕명 출납과 군기를 장악하도록 하였다.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시켜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령을 나눠 장악하게 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지휘권까지 장악하였다.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해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였다. 그 뒤 1412년에 의흥부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맡게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409년 11도(道)에 도절제사를 파견하였다. 1415년 경까지 해안을 중심으로 영진군(營鎭軍) · 수성군(守城軍)을 정비하였다. 1410년 경부터는 군역에서 제외된 향리 · 공사노비 · 교생 등으로 잡색군(雜色軍)을 조직해 유사시에 내륙을 지키게 하였다.
수군은 시위패(侍衛牌)의 일부를 수군으로 충당해 강화하였다.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속선을 10척씩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였다. 1410년부터 1412년까지 병선 200여 척을 새로 만들었다. 1413년부터 1415년까지 거북선(이순신이 만든 것과 구조가 다름.)을 개발하였다.
1412년과 1417년에는 배 밑바닥에 석회를 바르는 축선법(畜船法)과 배 밑바닥을 연기로 그을리는 연훈법(烟熏法)을 채택해 벌레의 피해를 막도록 하였다.
사법 · 경찰과 관련해, 1402년에 고려 말 이래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였다. 1403년에는 순위부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해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양전사업을 벌였다. 1405년부터 이듬 해까지는 6도를, 1411년부터 1413년에는 평안 · 함경도까지 양전(量田)을 시행해 모두 120만여 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군자 보충, 조운 타개, 신권 억압을 위해 사전(私田)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1401년에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해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다. 이듬 해는 과전법을 개정해, 세를 물지 않았던 사원 · 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시켰다. 1405년에는 1∼18과의 과전에서 5결씩 감하여 군자전으로 충속하였다. 외방 거주를 원하는 전직 관리의 과전은 5∼10결로 제한하였다.
이듬 해 고려 말의 전제 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을 혁파해 5만∼6만 결을 확보하였다. 1409년에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해 군자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을 정해 공 · 사 천인의 자손과 기첩(妓妾) 및 천첩의 공신전 전급을 금하였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守信田) · 휼양전(恤養田)의 지급을 제한하면서 액수를 줄였다. 또한 군자전의 과전 절급을 중지해,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하였다. 평양 · 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의 3분의 2를 줄였다.
1417년에는 1403년 이래 7차에 걸친 사전의 이급 논의를 매듭지었다. 즉, 각종 공신전 · 과전 등 총 11만5,340결의 3분의 1을 충청 · 경상 · 전라도로 이급하고, 이속된 토지는 군자전으로 귀속시켰다.
조세정책으로 1408년에 공처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3년에 함경도 · 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후반기에는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크게 짓는 등, 비축 곡식의 규모가 1413년에 356만8,700석이던 것이 1417년에는 415만5,401석에 이르렀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왜구의 소란으로 조세를 육지로 운송하였다. 왜구를 소탕하면서 1401년 남계의 부세를 배로 운송할 것을 명해 조운선 251척(경상도 111, 전라도 80, 충청도 60)을 건조하였다.
그러나 조운선이 자주 침몰하는 등 인명과 미곡이 피해를 입자 1403년에는 경상도 조세를 육지로 운송하게 하였다. 1412년에는 전국의 조세를 육지로 운송하도록 입법화까지 했다가 경상도를 제외하고 배로 나르도록 하였다.
조운의 폐단을 없애고자 1413년에서 1414년까지 순제(蓴堤)를 개구하여 안흥량(安興梁)을 돌아가는 방도를 모색하였다. 1417년에는 경기도 사전의 3분의 1을 하삼도로 이급하기도 하였다.
농업을 장려해 1415년에 김제 벽골제를 수축해 1만여 결에 필요한 수리를 도모하였다. 이듬 해에는 강화에 국농소(國農所)를 설치하였다.
1416년에는 조종미원잠실(朝宗迷原蠶室)을 설치해 각 도에 뽕나무를 심게 하였다. 이듬 해에는 각 도에 잠소를 정하였다. 그 밖에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를 이두로 역간해 보급하는 등 양잠 장려에도 심혈을 쏟았다.
상업정책으로는 1410년 시전(市廛)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곡물 · 우마 교역소를 정하였다. 또한 경시감(京市監) · 청제감(淸濟監)을 설치해 시장 · 시전을 감독하고 상세의 징수를 주관하며 시가의 청결을 감독하게 하였다.
1412년부터 1414년에 걸쳐 궁궐 · 관서 · 행랑과 시전행랑도 함께 조성하였다. 1415년에는 공품(工品) · 상공세(商工稅)를 이익에 따라 3등급으로 부과하였다. 또한 장랑(長廊)에 자리잡은 공랑(公廊)의 상인에게는 장랑세를 부과하였다.
광업을 보면, 명나라에 금 · 은을 조공하기 위한 금 · 은광이 개발의 중심을 이뤘다. 그러나 광산은 개발되었으나 광상(鑛床)이 빈약하고 기술이 부족해 실익은 없었다.
염업으로는 1411년과 1413년에 저화(楮貨) · 잡곡도 소금의 교환대상물로 추가하였다. 1414년에는 과염법(課鹽法)을 정하였다. 어업도 1406년에 어량(漁梁)의 독점을 금하면서 원하는 자에게는 어업을 하게 하고 10분의 1을 징수하였다.
노비문제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고려 말 이래의 노비쟁송을 척결하고 국역 인구를 확보하였다. 1413년에 노비중분결절법(奴婢中分決絶法), 1416년 결송지한(決訟之限), 이듬 해 공사노비소량지한(公私奴婢訴良之限) · 단송지한(斷訟之限)을 정해 노비결송을 마무리지었다.
사천변정(私賤辨正)에서 속공(屬公)되는 노비와 혁거된 사원 노비 8만여 구 등 총 12만여 구를 중앙과 지방의 각 사에 분속시켰다. 1414년에는 종부법(從父法)을 제정해 국역 인구를 확보하고 노비 주인의 세력 약화를 도모하였다.
1401년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 상하의 백성이 억울한 일을 자유롭게 청원하거나 상소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1410년에 공물과 이중으로 징수된 호포세(戶布稅)를, 1415년에는 포백세(布帛稅)를 폐지하였다. 1418년 여러 군 · 현에 양봉통(養蜂筒)을 설치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덜어 줬다.
1406년에는 동녀를 선발해 의약 · 맥리(脈理) · 침구학(鍼灸學)을 가르쳐 부인병 치료에 힘쓰게 하였다. 1409년에는 의약활인법을 제정해 현직자가 아닌 수업한 한산인(閑散人)까지도 치료하게 하였다. 1415년에는 『침구동인도(鍼灸銅人圖)』를 간행해 반포하였다.
보충군제(補充軍制)를 1415년에 실시해 양천교혼(良賤交婚) 소생 중에서 아버지가 양인이면 보충군에 편입시켜 일정 기간 동안 군역을 마치면 양인이 되게 하였다. 한 가족의 노비는 동일 관청에 정속시켜 노비를 구휼하였다. 그러나 1415년에 서얼차대법(庶孼差待法)을 정해 서얼 차별의 악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개국 당시의 유학자가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죽어 유학 진흥과 대명 외교를 위한 학자 양성이 요구되었다. 1404년 권근(權近)을 책임자로 유학 ·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五部)의 학생을 교육하게 하였다.
1406년에는 향교의 진흥책을 마련하였다. 1407년과 1411년에는 권학사목(勸學事目)과 국학사의를 정하고, 4부학당을 건축하였다. 또한 외학제를 정하고 재사(齋舍)를 갖추었다. 1417년부터는 학당의 경비를 지급하였다. 그 밖에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提調)를 두었다.
과거제도의 정비책으로 1401년 문과고강법(文科考講法)을 제정해 강경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1407년 문과 초장은 제술이 주가 되게 하고, 1414년에는 관학생에게 사장시험을 실시하여 오히려 제술을 중시하였다. 1413년 5월에는 고려 이래의 공거(貢擧) · 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를 혁파하였다.
역사서 편찬사업으로는 권근과 하륜(河崙) 등에게 명해 『동국사략』을 편찬하게 하였다. 1409년 『태조실록』을 편찬하였다. 1414년에는 『고려사』 개수를 기도하였다. 1403년에 주자소를 설치해 계미자(癸未字) 수십만 자를 주조하였다.
1412년부터 1416년까지 『십칠사』 · 『대학연의』 · 『원육전』 · 『속육전』 · 『승선직지록(乘船直指錄)』 · 『동국약운』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1404년부터 이듬 해까지 『도은집(陶隱集)』 ·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간행하였다.
1403년 처음 벼슬에 오른 자와 7품 이하의 관원에게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시험하였다. 또한 경중의 각 사와 평양부에 『가례』를 보급하였다. 1400년에 소실된 문묘를 1407년부터 1409년까지 중건하고 문묘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묘제(廟制) · 혼례 · 장제(葬制) · 조관복제(朝冠服制)도 차례로 정하였다.
1413년에는 단군 · 기자를 중사(中祀)로 승격시키는 등 개인적인 자연신앙을 국가신앙으로 이끌면서 유교적인 제사 의식으로 정비하였다.
1401년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誥命) · 인신(印信)을 받았으나 성조(成祖)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듬 해 하륜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혜제가 준 고명 · 인신을 개급해 줄 것을 요청해, 1403년 새 고명 · 인신을 받음으로써 대명관계를 정립시켰다.
이후 여진인과 들어와 사는 요동인을 둘러싸고 불편한 적도 있었고, 또 1년에 세 차례의 사신 파견에 따른 조공과 처녀 · 환관 · 말 · 소 등의 무리한 진헌도 있었지만, 서적 · 약재 · 역서 등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나라의 기강을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었다.
왜인관계에서는 1407년에 흥리왜인(興利倭人)의 무역을 정하고, 통교무역자의 입국을 입증하는 행장(行狀)을 발급하였다. 도박소(到泊所)를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로 한정해, 병비를 정탐하거나 난언작폐하는 것을 막았다. 1414년에는 왜인범죄논결법을 정하였다.
1417년 경상도에서 배를 만들지 못하게 했고, 이듬 해에 염포를 추가로 개방했지만 왜인 제약은 계속 하였다. 또한 입국왜인 · 왜선 · 체류시일 · 조어지(釣漁地) 등을 제한하였다. 거주 왜인들은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켜 왜구와의 내통을 근절시켰다.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와 정벌 등의 강온책을 실시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404년에 여진인의 상경시위제를 실시하였다. 1406년에는 경성 · 경원에 무역소를 개설하였다. 서북 국경은 1403년 강계부, 1413년 갑산군, 1416년 여연군을 설치하면서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동북면은 태종대 초기에 경원부와 경성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1406년부터 1410년에 걸친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고, 공주에 있는 덕릉(德陵) · 안릉(安陵)을 함흥으로 옮겼다. 1415년 길주 · 영흥성을 축조하면서 1417년에야 경원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그 밖에 유구(琉球) · 자바 등과도 교섭이 있었고, 유구로부터는 왜구에게 잡혀간 포로를 되돌려받기도 하였다.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창덕궁 · 덕수궁 · 경회루 · 행랑 · 청계천을 조성하였다.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고 초가를 개량하였다. 『경제육전원집상절(經濟六典元集詳節)』 · 『속집상절(續集詳節)』을 수찬해 통치체제를 정비하였다. 『선원록(璿源錄)』을 정비해 비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했으며, 법전의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主義)를 확립하였다. 백관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하였다. 호패법을 실시해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1418년 무절제와 방탕한 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장자인 세자 제(褆)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군권에 참여해 심정(沈泟) · 박습(朴習)의 죄를 다스렸다. 그리고 병선 227척, 군사 1만7000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세종의 왕권에 도움을 주었다.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해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다. 개국 초에는 한때 불우하기도 했지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다. 정종의 뒤를 이어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았다. 1421년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시호는 공정예철성렬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睿哲成烈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 묘호(廟號)는 태종이다.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13번지 1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