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는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4세기에 백제에서 처음 축조한 이후 신라, 고려, 조선 태종 대 개축하여 수리에 활용한 저수지이다. 저수지로 파악하는 견해와 방조제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현재 원래의 제방이 훼손되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이 밝혀지고 있다. 벽골제는 오랜 기간 수리 시설로 활용되었고,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 토목 기술의 역사적 특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농업사 연구, 토목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1975년 최초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2012년 이후 2016년까지 6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2023년에 추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제방의 수문(水門) 중 하나인 중심거(中心渠)의 형태와 구조, 축조 방법이 확인되었고, 수여거의 현황도 조사되었다.
벽골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기사에 따르면 330년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기 원성왕대(元聖王代)인 790년(원성왕 6)에 신라 정부는 전주(全州) 등 7주(州)의 주민을 징발하여 벽골제를 증축(增築)하였다. 그리고 고려 현종 연간과 1143년(인종 21)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조선이 개창된 후 벽골제의 대대적인 보수, 증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태종 대인 1415년(태종 15)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보수, 증축되었다. 몇 년 전인 1408년(태종 8) 당시 전라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였던 강사덕(姜思德)이 벽골제의 옛터에 근거하여 새롭게 수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1415년 8월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 박습(朴習)이 벽골제를 수축할 곳을 직접 살펴보니 길이 7,196척, 너비 50척, 수문 4처에 달하고 제방 아래에 경작할 만한 곳을 크게 확보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태종이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라는 왕명을 내리면서 1415년 10월 20일부터 벽골제 수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1416년(태종 16) 초에 완공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벽골제 아래의 개간 가능지가 무려 6,000여 결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벽골제 아래 자리한 진지(陳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수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벽골제의 제방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1418년(태종 18) 9월 우희열(禹希烈)은 김제 벽골제의 석주(石柱)만 좌우에 나란히 서 있을 뿐이고, 제언(堤堰)의 둑이 무너져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1420년(세종 2) 벽골제의 둑이 무너져 제언 아래 2,098결에 피해를 주었다는 보고가 올랐다. 이후 다시 벽골제를 보수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의가 전개되었지만, 벽골제를 새롭게 수축하였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제방 가운데를 파서 간선수로를 설치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벽골제의 길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약 3,245m, 『태종실록(太宗實錄)』은 약 3,262m로 기록하였는데 1975년 벽골제 발굴 당시 길이가 약 3,300m로 측정되었다. 현재 3㎞의 제방과 ‘장생거(長生渠)’와 ‘경장거(經藏渠)’ 두 개의 수문만 남아 있다. 제방의 남북 양단에는 수문처럼 보이는 거대한 돌기둥과 제방의 중간에 대형 석재들이 일부분 노출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벽골제 중수비문에 의하면 유통거(流通渠),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수여거(水餘渠) 등 수문의 구체적 명칭이 기록되었다.
벽골제에 나무를 이용하여 배수구 시설을 만들었는데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일본의 사야마이케[狹山地] 유적과 조선시대의 벽골제에서도 목통의 존재 확인할 수 있었다. 목통을 이용한 배수는 쉽게 썩기에 수문과 목통을 이용한 이중 관개시설(灌漑施設)이 이용되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벽골제의 기능과 성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데, 물을 가둬두고 수리에 활용하는 저수지로 파악하는 견해, 해수 유입을 막기 위한 방조제로 비정하는 입장 등이 있다. 전자는 『태종실록』과 이전 기록인 『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을 토대로 하천수를 수원으로 활용하여 농지에 관개하기 위한 제언, 저수지로 보는 견해이다. 후자는 동진강 하구가 과거에는 훨씬 내륙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 제방 바깥에서 수리 구역 상정이 어려우므로 벽골제는 해수의 유입을 막는 방조제라고 보는 견해이다.
벽골제 제방 아래 존재한 농경지의 규모, 제방에 설치된 5개의 수문, 조선 후기 벽골제에 대한 견문 기록 등 문헌 기록과 발굴 조사 보고를 살펴볼 때 당대에 벽골제를 제방으로 담수하는 저수지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벽골제는 오랜 기간 수리 시설로 활용되었고,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 토목 기술의 역사적 특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농업사 연구, 토목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