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벽골제는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4세기에 백제에서 처음 축조한 이후 신라, 고려, 조선 태종 대 개축하여 수리에 활용한 저수지이다. 저수지로 파악하는 견해와 방조제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현재 원래의 제방이 훼손되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이 밝혀지고 있다. 벽골제는 오랜 기간 수리 시설로 활용되었고,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 토목 기술의 역사적 특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농업사 연구, 토목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4세기에 백제에서 처음 축조한 이후 신라, 고려, 조선 태종 대 개축하여 수리에 활용한 저수지.
발굴 경위 및 결과
건립 경위
변천
그런데 수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벽골제의 제방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1418년(태종 18) 9월 우희열(禹希烈)은 김제 벽골제의 석주(石柱)만 좌우에 나란히 서 있을 뿐이고, 제언(堤堰)의 둑이 무너져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1420년(세종 2) 벽골제의 둑이 무너져 제언 아래 2,098결에 피해를 주었다는 보고가 올랐다. 이후 다시 벽골제를 보수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의가 전개되었지만, 벽골제를 새롭게 수축하였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제방 가운데를 파서 간선수로를 설치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형태와 특징
벽골제에 나무를 이용하여 배수구 시설을 만들었는데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일본의 사야마이케[狹山地] 유적과 조선시대의 벽골제에서도 목통의 존재 확인할 수 있었다. 목통을 이용한 배수는 쉽게 썩기에 수문과 목통을 이용한 이중 관개시설(灌漑施設)이 이용되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의의 및 평가
벽골제 제방 아래 존재한 농경지의 규모, 제방에 설치된 5개의 수문, 조선 후기 벽골제에 대한 견문 기록 등 문헌 기록과 발굴 조사 보고를 살펴볼 때 당대에 벽골제를 제방으로 담수하는 저수지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벽골제는 오랜 기간 수리 시설로 활용되었고,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 토목 기술의 역사적 특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농업사 연구, 토목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 『세종실록(世宗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태종실록(太宗實錄)』
단행본
- 이호철, 『조선전기 농업경제사』(한길사, 1987)
- 이광린, 『이조수리사연구』(한국연구원, 1961)
논문
- 안상진, 「토목공학적 측면에서 본 김제 벽골제」(『물과 미래』 56-4, 한국수자원학회, 2023)
- 김주성, 「벽골제의 기능」(『백제문화』 5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18)
- 진만강, 곽스도, 안현중, 「김제 벽골제 발굴조사 개요: 중심거를 중심으로」(『마한백제문화』 27,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6)
- 노중국, 「백제의 수리 시설과 김제 벽골제」(『백제학보』 4, 백제학회, 2010)
- 전덕재, 「삼국시기 영산강유역의 농경과 사회변동」(『지방사와 지방문화』 3-1, 역사문화학회, 2000)
- 윤무병, 「김제 벽골제 발굴보고」(『백제연구』 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6)
인터넷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 [김제 벽골제](https://www.gimje.go.kr/byeokgolje/index.gim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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