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봄에 이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의 그물에 걸려 수점의 중국 도자기가 인양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해 10∼11월에 걸쳐 실시된 제1·2차의 예비적인 조사에서 약 5,000점의 송 · 원대 도자기들이 발굴됨으로써 국내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발굴계획이 추진되었다.
1977년 5월문화공보부에 의해 발굴조사단이 조직되고, 해군으로부터 51전대 소속의 함정과 해저구조대요원들로 구성된 지원단이 참가해 합동으로 유물의 인양과 해저 유적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매년 여름에 2개월 내지 4개월에 걸친 발굴이 연차적으로 계속되었다.
1982년부터는 이 유물들을 적재해온 운송선의 잔존 선체에 대한 해체인양이 병행되었다. 다음해 10월에 마지막으로 선저의 용골이 인양되었으며, 1984년 주변 해역에 대한 2차례의 추가 조사를 거쳐 9년간 11차에 걸친 발굴조사는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그 동안에 인양된 유물의 총수는 2만 3502점(동전 제외)에 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도자기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유물들은 수심 20m의 해저에서 인양되었다. 이 해역은 간만의 차가 심해 항상 4∼5노트의 조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작업은 정조시(停潮時)의 30∼40분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또한 수중와도(水中渦度)가 높아 시계(視界) 영(零)이라는 악조건 하에서 손으로 더듬어서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한 변이 2m인 정방형을 단위구획으로 한 철제틀을 유적의 상면에 가설해 이른바 방격(方格, grids)조사법을 도입해서 고고학적인 방법을 최대한으로 살린 수중발굴을 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곳에는 1척의 운송선이 해저면 하에 매몰된 상태로 잔존해 있었으며, 그것은 길이 약 34m, 너비 11m 정도의 목선임이 판명되었다.
유물들은 선체의 내부와 외부에 걸쳐 발견되었다. 선체 내부에 적재된 도자기들은 크기가 70㎝×70㎝×50㎝ 정도의 목제상자에 수십 개 또는 수백 개씩 정연하게 담겨서 선창에 격납되어 있었다.
한편, 목선의 갑판 이상은 이미 완전히 부식되어 그 형태를 잃고 있었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 목선의 선창은 격벽(隔壁)에 의해 8∼9개로 구분되어 있고, 선저(船底)부분에는 막대한 양의 동전과 자단목(紫壇木) 등이 적재되어 있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이 침몰선에서 인양된 방대한 양의 물품들은 무역을 목적으로 한 상품들이었다. 목제상자 속에서 발견된 도자기들은 10개 또는 20개씩 신품을 끈으로 묶어서 포장되어 있었다.
완전한 상태로 인양된 상자의 하나에는 후추〔胡椒〕열매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상자의 외면에는 소유주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부호와 번호 등을 먹으로 기입해놓은 것으로 보아, 복수의 하주(荷主)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이 무역선이 항행목적지로 일본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틀림없다. 그 시대에 한국에서는 우수한 고려청자를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다량의 중국도자기를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수입된 중요 품목이 도자기와 동전이었다는 사실은 일본의 문헌에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출항지로서는 인양된 동추(銅錘)의 하나에 경원로(慶元路)라는 지명이 새겨진 것이 발견됨으로써 오늘날 저장성(浙江省)의 닝보(寧波)를 출발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역선은 중국에서 건조된 선박임이 판명되었다. 이 목선은 조선기술상 이미 용골(龍骨)과 격벽과 같은 뛰어난 구조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외판(外板)의 연결방법으로는 이른바 클링커식이 고안되어 있다. 이 클링커식의 조선법에 대해서는 종래 외국학계에서는 북부유럽의 바이킹들이 건조한 선박 외에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러한 선구적인 조선기술의 활용으로 미뤄볼 때, 이 무역선의 중국건조설은 매우 근거 있는 것으로 믿어져왔다. 그 주장은 발굴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인양된 용골재(龍骨材)에서 보수공(保壽孔)과 그 속에서 중국동전이 발견됨으로써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 무역선이 중국에서 건조된 선박임은 틀림없겠으나, 승선한 선원단의 구성은 단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원들의 소지품으로서는 중국식의 취사도구 외에 고려에서 사용하던 수저도 발견되었다.
또한 일본사람들만이 사용하는 목제신발과 일본장기의 말 등이 인양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이 무역선이 한 · 중 · 일 3국 출신의 선원들에 의해 항해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것이다.
1982년부터 선저부(船底部)에 적재된 동전들을 흡인호스로 인양했을 때 적지 않은 수의 소형 목패가 함께 인양되었다. 이것들에는 유물의 수량과 구입한 시기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되는 날짜, 소유주의 이름, 그 아래에 수결(手決)이 먹으로 쓰여져 있었다. 그 중에서 강사(綱司)라는 이름을 적은 목패가 가장 많았다. 이 이름은 중세의 중국에서 선단주와 선장을 겸한 인물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 강수(綱首)라는 이름을 연상케 한다.
그 밖에 약간의 승려들의 이름과 함께 일반인의 이름으로서는 대개가 일본사람으로 생각되는 이름들이 발견되었다. 인명 외에 동복사(東福寺)라는 절 이름을 나타낸 것이 10여 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목패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으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이 무역선의 하주들 중에는 일본사람들이 상당수 관련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강사라는 이름은 한국의 문헌에서는 절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는 승려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무역선의 시기에 대해 발굴조사단은 1310∼1330년대에 걸친 동안에 난파하였다는 견해를 주장해왔다. 그 상한연대에 대한 근거로서는 인양된 유물들 중에서 발견된 원나라의 화폐인 지원통보(至元通寶, 1310년 주조)를 들 수 있다.
한편, 하한연대에 대해서는 막대한 도자기들 중에 아직 청화백자(靑花白磁)가 출현하지 않고 있다는 미술사적 사실을 중요시하고 있다. 동양도자사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청화백자의 제작은 원나라에서 133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무역선의 연대에 대해서는 중국학자들로부터 1350년대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동전들과 함께 인양된 목패들 중에 원나라의 지치(至治) 3년(1323)의 묵서명(墨書銘)이 있는 것이 2점 발견됨으로써 난파연대에 대한 문제는 해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76∼1982년에 이르는 6년 동안에 인양된 유물의 내용은 〈표〉와 같다.
구분 | 연도 | 종류별 | 계 | |||||||
---|---|---|---|---|---|---|---|---|---|---|
靑磁 | 白磁 | 黑釉 | 雜釉 | 白濁釉 | 金屬 | 石材 | 기타 | |||
제1차 | 1976.10.26∼11. 2 | 52 | 20 | 2 | 23 | - | - | - | 15 | 112 |
제2차 | 1976.11. 9∼12. 1 | 1,201 | 421 | 54 | 9 | 18 | 12 | 169 | 1,884 | |
제3차 | 1977. 6.27∼ 7.31 | 1,900 | 1,866 | 56 | 604 | 74 | 264 | 4 | 138 | 4,906 |
제4차 | 1978. 6.15∼ 8.15 | 2,787 | 1,289 | 96 | 623 | 63 | 86 | 11 | 91 | 5,046 |
〈표〉 신안해저유물 발굴 현황 |
〈표〉에는 동전과 자단목의 수량이 포함되지 않았다. 동전은 약 28톤(800점)에 이르며, 자단목은 약 8톤(1,017개)에 달한다.
그 중에는 한 · 신 · 당 · 북송 · 남송 · 요 · 금 · 서하 · 원의 각 시대에 주조된 50여 종의 화폐들이 포함되어 있다. 1만 6000여 점에 달하는 도자기들은 송 · 원대에 제작된 중국도자기들이며, 단지 7점의 고려청자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들 해저유물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행될 조직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한편, 잔존선체는 과학적인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 목포시에 있는 국립해양유산연구소에 복원 전시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