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竹州: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로 귀양갔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방간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이방간의 거병을 선동했다.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이방간은 유배되었고, 박포는 사형당했다.
이로써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방원의 왕세제 책립은 결정된 셈이었다. 난이 평정된 뒤 이방원의 심복 신하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이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이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관계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추진하던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제도 개혁의 결과 사병이 혁파되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립되었다. 또한 승정원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고, 태종 때의 왕권 강화 기반을 조성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