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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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 나가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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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 나가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제도.
내용

신문고(申聞鼓)가 폐지된 뒤 이를 대신하여 실시되었다. 『속대전』에서 정식으로 법제화되었으며, 그 뒤 『대전회통』에서 증보되어 완성되었다.

원래 신문고는 ① 형(刑)이 자기의 신상에 미칠 경우, ② 부자간 또는 형제간의 분간(分揀), ③ 적처와 첩간의 분간, ④ 양인과 천인간의 분간 등 네 가지 일에 관해 칠 수 있었다. 격쟁을 할 수 있는 범위는 ① 자손이 조상을 위해, ② 처가 남편을 위해, ③ 동생이 형을 위해, ④ 종이 주인을 위해 하는 네 가지였다.

이 밖에 함부로 격쟁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이 네 가지 경우가 아니라도 민폐에 관계되는 것이면 격쟁을 해도 외람률(猥濫律)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리에 맞지 않는 일에 송사하기를 좋아하여 격쟁하는 사람은 장(杖) 100에, 유(流) 3,000리의 벌로써 처벌하고,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하여 격쟁하는 자는 장 100에 처하고, 중한 자는 도(徒) 3년에 처하게 하였다.

읍민이 수령에게 매를 맞아 죽어서 격쟁하는 자는 먼저 조사해본 뒤, 수령에게 죄가 있으면 수령을 처벌하고, 만약 무망(誣罔)에 관계가 있으면 부민고소율(部民告訴律)로써 논하였다.

그리고 사소한 일인데도 해당 도의 관찰사나 수령에게 고하지 않고 외람되게 왕에게 아뢰는 자는 월소율(越訴律)로써 논하고, 사리가 중한 자는 상서사부실률(上書詐不實律)로써 논하였다.

이와 같이, 격쟁에 관해 구체적으로 규정한 이유는 당시 결송(決訟)을 담당한 관리들이 오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소한 일로 격쟁하는 사례도 증가하여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1560년(명종 15)에는 궁전에 함부로 들어와 격쟁하는 자가 많아져 이들을 엄벌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777년(정조 1)에는 위외격쟁추문(衛外擊錚推問)의 법을, 1858년(철종 9)에는 왕이 도성 밖으로 거둥할 때에만 격쟁, 소원할 수 있는 법을 정하기도 하였다. →신문고

참고문헌

『명종실록』
『정조실록』
『철종실록』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
「조선후기 사회문제와 소원제도의 발달」(한상권,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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