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편으로는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살피고, 반역과 국가의 혼란을 예방하며, 무시로 입궐해 월소직정(越訴直呈 : 소송의 제도 단계를 뛰어 넘어 곧바로 상급기관에 호소함.)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하였다.
신문고는 1401년(태종 1) 7월에 조선 개국 이래의 혼란과 재상(宰相)·훈신(勳臣)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국가의 안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는 태종이, 안성학장(安城學長) 윤조(尹慥)와 전 좌랑 박전(朴甸) 등이 “송나라 태조가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해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하게 한 제도를 본받아 등문고를 설치하소서.”라고 올린 소를 수용해 등문고를 설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같은 해 8월 의정부의 상계에 따라 ① 원억(寃抑)이 있는 백성은 누구나 거주하는 곳의 관청에 그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풂.)을 고하고, ② 그 관청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 등문고를 두드려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고, ③ 접수된 원억 관련 사안은 사헌부로 하여금 규명하게 한 뒤에 정당한 것은 판결해 원억을 펴게 하고, 사사로운 원한과 무고로 인한 것은 격고자(擊鼓者 : 북을 치는 자)를 처벌하는 시행절차를 규정하면서 명칭을 등문고에서 신문고로 개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신문고는 그 뒤 1401년 11월에 무고성 격고를 방지하기 위해 지방인의 격고절차를 수령→관찰사→사헌부→신문고로 개정하였다. 1402년 1월에 ① 정치 득실과 민생휴척(民生休戚 : 일반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 관한 사안은 의정부→신문고의 절차로 신정(申呈 : 상급관서로 글로써 올림)하고, 그 가용사는 채납(採納 : 가려서 받아들임)하는 한편, 사리에 맞지 않은 것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② 원억미신 관련 사안은 서울은 주장관(主掌官)→사헌부→신문고, 지방은 수령이나 관찰사→사헌부→신문고의 절차로 신소(伸訴)하되, 그것이 사실일 때는 들어주지만 허위이거나 절차를 뛰어넘어 격고한 경우는 치죄하며, ③ 반역 관련 사안이나 종친·훈구대신을 모해해 화란을 일으키는 걸 고발하는 경우는 즉시 신문고를 치고, 그것이 사실일 때에는 격고자에게 상을 주도록 정하였다.
이 때, 관계·관직 보유자일 경우에는 전(200결)·노비(20구)와 범죄자의 모든 재산을 주고 3등초자녹용(三等超資錄用)에 책록하고, 관계·관직이 없는 양인일 경우에는 전·노비와 범죄자 재산을 주고 6품을 제수하며, 공·사 천인일 경우에는 전·노비와 범죄자 재산을 주고 허통(許通)시켜 양인을 삼은 뒤 7품에 제수하지만, 무고인 경우는 엄한 벌을 과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④ 위의 ①∼③을 규명해 처리하지 않는 관원은 법률에 따라 치죄하고, ⑤ 정치 득실·민생휴척·원억미신 관련 사안은 신문고 수직관리에게 내용을 진술→초사(招辭)를 수납→거주지 확인의 순서를 거친 뒤에 격고하도록 보완하였다.
1471년(성종 2)경 이후에는 정치·경제·사회적인 분위기와 관련되어 격고자에 대한 표창 규정이 폐지되고 처벌 규정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다시 개정되었다. 1401년에 성립된 신문고제는 1458년(세조 4)∼1468년의 어느 시기에 누고(漏鼓 :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는 북)를 신문고로 오인해 격고한 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가,
1471년 12월 상언(上言)의 지체를 개선하고자 하는 성종의 의도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1560년(명종 15)∼1658년(효종 9)의 시기에 다시 신문고제를 폐지하고 격쟁제(擊錚制 : 징을 쳐서 억울함을 알리던 제도)를 실시해 신문고의 기능을 대행하도록 규정하였다.
1771년(영조 47) 11월에 영조의 뜻에 따라 국초의 신문고제가 복구되고, 같은 해 12월에 “신문고의 설치로 사건이 오래된 것도 격고하면 원억사의 처리가 오히려 남잡(濫雜 : 지나치고 잡스러워짐.)해 진다.”는 이유로 철거했다가 곧 다시 설치하였다.
또, 1434년(세종 16)에 신문고의 ‘신(申)’은 신하가 국왕에게 사용하는 용례로는 참람하다고 해서 ‘승(升)’으로 고쳐 승문고라 했다가 곧 신문고로 복칭하는 등의 개변을 겪으면서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신문고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종사·시정득실·사건사 및 기타의 원억에 관계된 일이 있으면 이용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지만 실제로는 ① 신문고가 대궐에 위치했고, ② 격고 절차의 엄격 및 위법 격고자에 대한 처벌이 과중했으며, ③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 및 상관이나 관장(官長)에 관계된 일의 격고는 엄격히 통제된 탓에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관리·양반에게만 이용되었고, 지방에 거주하는 관리·양반 및 중인·평민·노비에게는 효용성이 결여되었다.
또, 격고 사유도 규정과는 달리 대부분이 개인적인 이해나 노비·형옥·재산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격고시에는 위법 처단하도록 된 무고 행위도 통치질서의 문란과 연관된 치죄의 유명무실함과 함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 밖에도 신문고는 무질서한 월소직정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 만큼 신문고가 운영된 시기에는 가전신정(駕前伸呈 : 임금의 행차 앞에서 글을 올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함.)과 격쟁에 의한 직소(直訴)를 금지하고 이에 저촉되는 자는 엄히 처벌하도록 규정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신문고는 조선의 통치자인 국왕·관인이 그들을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를 유지하고, 동시에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정을 상달하고 원억을 펴게 함으로써 선정을 도모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청원·상소·고발 시설로서 제도화되었으나, 실제로는 엄격한 신문고 운영 규정 및 국가의 통치력과 관련되어 소수 지배층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데 쓰여졌다.
이 제도가 활발히 운영된 것은 태종∼문종대였으며, 그 이후는 격쟁의 이용과 함께 유명무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