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0년 7월에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광주군 대모산 남쪽에 터를 잡았다. 청평부원군 이백강을 산릉도감 제조로 삼고, 박자청과 서선으로 제조를 삼았다. 오른편을 비워 두어 후일에 태종의 자리를 예비하였으며, 9월 17일에 국장하여 이때부터 능호를 헌릉(獻陵)이라 불렀다.
1422년에 태종이 승하하자 이백강을 산릉도감의 도제조로 임명하고, 박자청과 심보(沈寶)를 제조로 삼았다. 박자청은 인부 1만 명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기근이 심하여 인력을 대폭 줄여 약 2천 명을 동원하되, 소 수백 마리와 수레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하였다. 1422년 9월 6일에 태종의 재궁이 석실에 안치되어 쌍릉으로 완성되었다.
1424년에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성개(成槪)가 글씨를 쓰고, 권홍의 글씨로 전액을 세겨 신도비를 세웠다. 1694년에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이 능행하여 보니, 비석의 문자가 마멸되어 새롭게 신도비를 세우고 비각(碑閣)을 갖추었다. 1664년(현종 5)에 정자각을 중건하였으나, 1748년(영조 24)에 다시 고쳐 짓고 상량하였다.
1446년에 헌릉의 서쪽에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의 합장릉으로 영릉(英陵)을 조성하였으나 1469년에 여주로 옮겨졌다. 1856년(철종 7)에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의 인릉(仁陵)이 천릉하여 서쪽에 자리잡게 되어, 오늘날 헌인릉으로 알려졌다. 사적 정식 명칭은 ‘ 서울 헌릉과 인릉’으로, 2013년 7월에 ‘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경왕후의 능과 태종의 능은 각각 별도의 석실과 봉릉을 갖춘 동원이봉릉으로 조성되었다. 양릉의 석실 내부는 너비 8자, 높이 7자, 길이 11자로 규모가 같으며, 봉릉의 높이도 13자 7치(약 5.36m)의 같은 높이로 조성되었다.
병풍석(屛風石)의 면석(面石)에는 구름문양 중심에 십이지신을 조각하여 12방향을 상징하고, 귓돌의 왼쪽에는 영저(靈杵)를, 오른쪽에는 영탁(靈鐸)을 조각하였다. 난간석(欄干石)으로 왕과 왕후의 능을 연결하였다. 제향 공간으로 정청(正廳) 3칸에 배위청(配位廳) 2칸 규모의 정자각이 있으며, 동쪽에는 비각을 갖추고 2개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졌다.
1420년에 원경왕후의 석실을 만들 때 태종은 덮개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채석장에서부터 산릉까지 운반하는 과정에서 부역민이 고통받는 것을 애석히 여겨, 직접 채석장으로 달려가 덮개석을 반으로 조각내었던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조선 후기까지 전해져서 1개의 큰 돌을 사용할 곳에 반으로 잘라 2개의 돌을 이어 붙여 사용하는 전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