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서울 )

서예
유적
국가유산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릉에 있는 조선전기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신도비.
이칭
이칭
헌릉비, 獻陵碑, 헌릉비석, 獻陵碑石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2013년 07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내곡동, 헌인능관리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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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릉에 있는 조선전기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신도비.
개설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 내에 위치한 헌릉 신도비는 1424년(세종 6) 5월에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세종의 명을 받들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비문을 예조참의 성개(成槪)가 글씨를 썼으며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권홍(權弘)이 전액(篆額)을 맡았다. 비석 뒷면에 새기는 글인 비음기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회(尹淮)가 글을 지었고 성개가 글씨를 썼다.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어 1695년(숙종 21)에 귀부이수 양식을 갖춘 신도비를 별도로 중건하였다. 이때 변계량이 지은 비문과 윤회가 지은 비음기를 그대로 다시 사용하였다. 그리고 예조판서 박태상(朴泰尙)이 중건 과정을 기록한 추기를 첨부하여 병조참의 이덕성(李德成)이 글씨를 썼으며 병조참지(兵曹參知) 홍수주(洪受疇)가 전액(篆額)을 담당하였다. 이덕성이 글씨를 쓴 중건비의 비문 원본은 부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비(原碑)와 중건비는 비각 안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데, 이 중 원비가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헌릉을 조성한지 한 달 만인 1422년 10월에 세종의 지시로 신도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1423년 1월 신도비의 크기를 예조와 논의해 정하였고 3월에는 강화부에서 캐낸 비신을 수로로 운반하였으며 10월에는 세종이 친히 신도비 공사 현장을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격려하였다. 1424년 5월 능상(陵上) 아래 동남쪽 63보 지점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참찬 안순(安純)이 비각 건립 공사를 감독하였다. 7월에 헌릉의 비문을 담당한 변계량과 성개에게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고 전액을 쓴 권홍에게는 말을 하사하여 공로를 표창하였다. 이어서 9월에는 신도비 조성을 감독한 총제(摠制) 이천(李蕆)에게도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1426년 11월 세종이 예조판서 신상(申商)에게 비문의 일부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신도비와 비각이 훼손되자 1694년 2월 중건청(重建廳)을 설치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 해 5월 신도비와 비각을 다시 중건하였으며 비각 안에 원비와 중건비를 나란히 안치하였다. 1902년(광무 6) 6월 고종이 비각과 정자각의 수리를 지시하였다.

내용

신도비 비신의 앞면에 기록된 비문의 내용은 태종이 1367년에 태어나서 역경을 딛고 1400년 왕으로 즉위하기까지의 과정들을 담고 있다. 또한 1405년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으로 환도한 이후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등 태종의 치적에 관한 내용, 그리고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이 되어서도 군권을 행사하여 1419년 대마도 정벌을 주도한 내용 등이 쓰여 있다.

신도비 비신 뒷면의 비음기에는 세종의 특명으로 건원릉 신도비처럼 개국공신(開國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 등 3대 공신의 총 명단을 수록하였다. 중건비에는 비음기 다음에 추기를 첨부하여 신도비의 중건 과정을 기록하였다.

특징

헌릉 신도비는 건원릉 신도비의 장대한 귀부이수 양식과 규모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귀부는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 버렸지만 일부 잔존한 귀갑(龜甲)의 6각형 문양마다 ‘왕(王)’자를 양각으로 새겨 놓아 왕릉 신도비의 귀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수는 건원릉 신도비의 이수 구도와 거의 동일하다. 총 4마리의 용이 좌우로 2마리씩 나뉘어 비신의 상단을 입에 물고 승천하는 형상을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이수 가운데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전액(篆額)을 배치하였다. 이수와 비신은 강화도 마리산(摩利山, 또는 摩尼山) 서쪽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백색 계통의 대리석인 청란석(靑蘭石) 한 덩어리를 건원릉 신도비의 비신보다 좀 더 큰 규모로 다듬어 수로로 운반하였다. 병화를 거치며 훼손되어 비신의 표면은 많이 박락되었고 색상도 불에 그을린 듯 붉게 변색된 상태이다.

1695년 중건된 신도비는 왕릉 신도비의 전통에 따라 귀부이수 양식을 갖추었지만 조선시대만의 고유한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수의 앞뒤에는 각각 용 2마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1개의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쌍룡쟁주(雙龍爭珠) 구도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귀부에는 머리에 뿔이 2개 솟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송곳니를 크게 드러내는 등의 역동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어 이전의 왕릉 신도비와 양식상 확연한 차이가 난다.

의의와 평가

헌릉 신도비는 건원릉 신도비로부터 시작된 왕릉 신도비의 전통을 계승한 신도비이자 이후 건립되는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의 앞선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왕릉 신도비중에서 유일하게 처음 세웠던 원비(原碑)와 후대에 다시 세운 중건비가 함께 남아 있어 15세기부터 17세까지의 왕릉 신도비 조성 과정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헌릉지(獻陵誌)』(1798)
『헌릉비석중건청의궤(獻陵碑石重建廳儀軌)』(1695)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조선시대 능비의 건립과 어필비의 등장」(황정연, 『문화재』42-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조선시대 능묘비에 관한 연구」(이민식, 한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집필자
이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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