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영릉에 있는 조선전기 세종 재위 기간의 주요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
개설
역사적 변천
1469년 3월 영릉을 여주(驪州)로 천릉(遷陵)하고 7월에는 구(舊) 영릉에 남아 있던 신도비와 잡상(雜像)을 묻었다. 1691년(숙종 17) 윤7월 신도비의 모습 일부가 땅 위로 드러나자 도로 흙을 덮었다. 1738년(영조 14) 9월 연성수(蓮城守) 이근(李槿)이 신도비를 찾아 내어 옮겨 세우자고 상소하였다. 10월에 왕명으로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땅을 3척쯤 파서 찾아 냈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다 마모되어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 1974년 3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백색 대리석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 비신과 이수를 발굴하였으나 귀부는 끝내 찾지 못하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세울 때 자연석을 비신 받침돌로 삼았다. 1999년 2월 귀부를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 비각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내용
특징
이수 앞뒤에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雙龍爭珠)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중국 당나라 양식을 따른 건원릉과 헌릉신도비의 이수와는 다른 조선시대만의 고유한 양식이다.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생동감이 넘친다. 규모도 거대하여 이전의 왕릉신도비들을 압도한다. 건립 완료를 보고 받은 문종이 “신도비가 매우 커서 세우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아 자나깨나 걱정이었는데 이제 일을 무사히 마쳤다니 매우 기쁘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어려운 역사(役事)였던 것이다. 영릉신도비의 비신과 이수 총 높이가 450㎝이고 건원릉신도비는 335㎝이며 헌릉신도비는 420㎝이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귀부가 있었다면 총 높이가 약 600㎝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역대 왕릉신도비 중에서 제일 거대한 규모이다.
의의와 평가
오랜 세월 땅 속에 매몰되어 비신 표면이 한 겹 떨어져 나갔으나 다행히 비문 글씨 몇 자와 전액은 확인된다. 비문과 전액 글씨를 쓴 안평대군은 송설체(松雪體)에 능했던 조선 전기 사대명필(四大名筆) 중 한 명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선 전기 서예사(書藝史)와 금석학(金石學) 연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Ⅱ(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 「조선시대 능비의 건립과 어필비의 등장」(황정연, 『문화재』42-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 「조선시대 능묘비에 관한 연구」(이민식, 한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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