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간(權幹), 자는 백도(伯道), 호는 쌍당(雙塘) · 송설헌(松雪軒). 아버지는 참찬문하부사 균(鈞)이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보(溥)의 증손자이다.
1382년(우왕 8) 과거에 급제, 춘추관검열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전직한 뒤 사헌규정(司憲糾正)이 되었다.
1388년 우정언(右正言)에 오르고 이조 · 병조의 좌랑을 지낸 뒤, 1391년(공양왕 3)에 우헌납(右獻納)으로 옮겼으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하다가 면직당하였다. 그로 인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 장류(杖流)에 처하여졌다.
1400년(정종 2)에 좌보궐(左補闕)에 임명되고 사헌시사(司憲侍史)로 승진되었다가, 성균악정(成均樂正)으로 옮겨진 뒤 1402년(태종 2) 딸이 태종의 빈이 되자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1404년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를 거쳐, 1407년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갔고, 1410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2년 태조의 후손이 아니면서 재내제군(在內諸君) · 원윤(元尹) · 정윤(正尹)에 책봉되는 것과 외척으로 봉군되는 것을 혁파하는 정책으로 인해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로 고쳐 제수되었다.
1413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1414년 판한성부사, 1417년 판돈녕부사, 1418년 예조판서를 지냈다. 1423년(세종 5)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곧 치사(致仕)하였다. 1432년 원묘(原廟)와 종학(宗學)에 비(碑) · 갈(碣)을 세우고 태조 이하 역대 군왕을 찬미하자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433년 유관(柳寬) 등과 함께 기영회(耆英會)를 조직하였다. 문학에 뛰어나고 전서 · 예서에 능해 낙천정기(樂天亭記), 헌릉(獻陵) · 문묘(文廟) · 기자사(箕子祠)의 비문을 썼다. 문집으로 『쌍당집(雙塘集)』이 전하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