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숙(大叔)·언부(彦夫), 호는 해화당(海華堂)·신당(莘堂).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고, 대관서영 서염(徐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내부시사 서진(徐璡)이고, 아버지는 현령 서원(徐遠)이다. 어머니는 정윤 최홍의(崔洪義)의 딸이다. 원천석(元天錫)의 문인이다.
1393년(태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396년에 문과에 급제, 이듬해 부봉사(副奉事)아 되었다. 1398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400년 문하주서가 되고, 이듬해 주부(注簿), 병조좌랑·이조좌랑 겸 지제교,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으나, 계사(啓事)의 잘못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 죽산(竹山)에 유배되었다.
1405년(태종 5) 전사시영·세자시강원좌문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그리고 1408년 동부대언·경연참찬관·보문각직제학·지제교(知製敎)·춘추관편수관 겸 군기감사, 지공조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1411년 우부대언 겸 군자감사, 지호조사가 되고, 이듬해 좌부대언·집현전직제학 겸 판사재감사·지형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에 우사간이 되어서도 말을 잘못해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로 좌천되었다. 1415년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어 동료들과 서얼의 차별 대우를 진언하였다. 그 뒤 예조우참의·우대언을 거쳐, 141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419년(세종 1)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 뒤 경기도·경상도·전라도 등의 관찰사와 형조·예조·이조의 참판 등 내외직을 지내고, 142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429년 판한성부사로 절일사(節日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31년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마음가짐이 굳세고 자신이 맡은 관직에 부지런하며 정성스러웠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이천의 설봉서원(雪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