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천용(天用). 원래 원나라의 고창(高昌) 사람으로서 고려에 귀화하였다. 아버지는 숭문감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이며, 설장수(偰長壽)의 아우이다.
1376년(우왕 2)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었다. 그 뒤 공조전서(工曹典書)·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중군총제(中軍摠制)·병조참지·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지의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03년에는 계품사(啓稟使)로, 1406년에는 성절사로, 이듬해에는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후 1408년에 사은사, 1409년에 성절사로 두 차례 더 사행을 가서 모두 다섯 번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는 설미수가 중국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인데, 항상 마필이나 금·은 등 공물의 감면을 주선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1407년에는 참지의정부사로 재직 중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고, 호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쳐, 1410년 예조판서,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효우(孝友)가 뛰어나 항상 공손하고 근신하였으며, 네 형이 모두 먼저 죽자 어린 조카들을 잘 돌보아 길렀다. 의정부에 재직했을 때는 관대함을 숭상하였고, 분경(奔競: 大官이나 勢道家에 출입하면서 獵官이나 利權運動을 하는 행위)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호는 공후(恭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