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은(三隱)은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혹은 도은(陶隱) 이숭인) 등 은(隱)으로 끝나는 호를 가진 고려시대 후기의 세 학자를 일컫는다. 그 연원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구전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기록은 20세기 초에 제작된 「삼은각비문(三隱閣碑文)」이다. 그런데 1954년에 이병도의 『국사대관』에서 여러 사료를 소개하며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포함시켰다. 일제강점기 때의 학자, 문일평도 이병도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 학계에서는 두 가지 설이 모두 통용되고 있다.
종래 이색 · 정몽주 · 길재를 삼은이라고 부른 것이 언제부터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것으로 보아 수백 년 동안 관습적으로 구전되어 온 듯하다. 그 기록이 보이는 것은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동학사(東鶴寺) 경내의 「삼은각비문(三隱閣碑文)」이다.
비문에 따르면, 1394년(태조 2) 길재가 동학사 경내에 들어가서 단(壇)을 모아 고려 국왕과 정몽주의 혼을 초혼(招魂)해 제사했다고 한다. 그 뒤 1399년(정종 1)에는 유방택(柳方澤)이 또한 이곳을 찾아와 이색과 길재를 추배(追配)해 제사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제단을 설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 이정간(李貞幹)이 공주의 지주사(知州事)로 도임하면서 그 제단에 삼은각을 창건하고 삼은을 제사하였다. 이 사실이 전주 유림(儒林)에 알려져 삼은이란 칭호가 생기게 되고, 이색 · 정몽주 · 길재를 삼은으로 일컫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소 무리가 있다고 지적되는 대목은 삼은각이 창건된 1399년 당시 아직 야은이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비문의 제작 연대가 20세기 초로서 김영한(金寗漢)이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쓴 것으로 보아, 이전에 확실한 문헌도 없이 내려오던 전설에 의지해 기록한 비문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적 근거야 어떻든 길재를 삼은으로 불러 온 지 오래되었고, 여기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삼은에 관해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54년에 이병도(李丙燾)가 『국사대관(國史大觀)』을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이병도는 여기에서 길재 대신 이숭인을 삼은의 한 사람으로 내세웠다. 즉, 『국사대관』에는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전래(傳來)와 성행(盛行)에 관해 이런 언급이 실려 있다. “그 뒤 여말의 삼은, 즉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포은 정몽주와 같은 이학(理學)의 태두(泰斗)를 내었던 것이다.”
이병도는 한 신문에다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주장을 해명하였다. 고려 말에 이숭인은 문장(文章) · 경술(經術)로써 이색 · 정몽주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당시 태학(太學)에서 경학(經學)을 강론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이색 · 정몽주와 함께 수사(修史)사업에도 참여해, 삼은이야말로 당시 학계에서 경술 · 문장 · 사가(史家)를 겸한 삼거벽(三巨擘)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사료도 상세히 소개하였다.
한편, 길재에 대해서는 고려 말의 한 유자(儒者)이지만, 고려 말보다는 조선 초에 더 유명했다고 하였다. 길재는 이색 · 정몽주 · 권근을 사사해 유학연원(儒學淵源)을 이은 인물이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고 해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않고 경상도 구미의 금오산(金烏山) 아래에서 자제를 교육하였다.
이로써 조선시대 사학의 대연원을 일으킨 업적이 컸는데, 후세에서 그의 절의와 교육의 공적을 높이 산 결과, 길재 · 정몽주와 더불어 흔히 삼은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그의 존재가 이숭인과 같이 그리 크지 못했다는 게 이병도의 주장이다. 이숭인을 삼은으로 보는 견해는 이미일제강점기 시기의 학자, 문일평(文一平)의 주장에서도 발견된 바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무엇이 정설이라고 판명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아직 학계에서는 두 가지 설이 다 통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