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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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개념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하는 학문.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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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하는 학문. 유학.
개설

경학(經學)의 ‘경(經)’은 유교의 경전을 말한다. 또한 경전은 경서(經書)라고도 일컫는다. 처음에는 ‘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논어≫나 ≪맹자≫에서도 보통명사를 그대로 고유명사화하여 ≪시(詩)≫ 또는 ≪서(書)≫라고만 불렀으며, 여기에 ‘경’자를 붙여 ≪시경≫이니 ≪서경≫이니 하고 부르지 않았다.

하나 하나의 경서의 호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서경≫의 경우만을 예로 들면 고대에는 ≪서≫라고만 하다가, 한나라 때부터 ≪상서(尙書)≫라 하였고, 명나라 이후로 ≪서경(書經)≫이라는 칭호가 확정되었다. 하나 하나의 경서에 ‘경’자를 붙인 것은 아니라도 경서를 ‘경’으로 통칭한 것은 ≪장자(莊子)≫의 천운(天運)편에서부터의 일이다.

유가 가운데서 ‘경’으로 부른 것은 역시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荀子)가 처음으로 생각된다. 전국시대에도 도가, 법가, 묵가의 학문에 대립한 유(儒), 즉 유학만 있었지 경학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경학’이라는 두 글자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이다. 구양생(歐陽生)으로부터 ≪상서≫, 즉 ≪서경≫의 학(學)을 받고, 또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한 예관(倪寬)이 “무제(武帝)를 처음 만났을 때 경학을 말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경학’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정착한 것은 전한(前漢) 무제시대이다. 이는 경서의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 성립된 것과 관련된다.

진화(秦火 : 진시황이 전적을 불사른 사실)로 ≪악경(樂經)≫이 망실되어 전한 초에 오경(五經)의 일컬음이 있다가 후한 이후로는 ‘경’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왔다. 흔히 진시황(秦始皇) 시대를 경학의 공백 시대로 보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진시황은 사상 최초의 군현제 통일국가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하여 유능한 지식 관료의 필요성을 느끼고, ‘박사관(博士官)’이라고 일컫는 학술 교육 담당기관을 중앙에 설치하는 한편, 유학을 포함한 백가(百家)의 문헌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막대한 장서가 뒤에 학술 상 대단히 유용하게 되었다. 비록 진나라 때에 학문은 지배층의 독점물이 되었지만, 학문 그 자체가 부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한 초에 금문상서(今文尙書) 29편을 전수한 복생(伏生)은 본래 진의 박사였다.

후한 반고(班固)의 ≪백호통 白虎通≫에는 ≪역(易)≫, ≪서≫, ≪시≫, ≪예 禮≫, ≪악(樂)≫을 오경이라 일컫고 있으나, 당(唐)의 서견(徐堅) 등이 찬한 ≪초학기 初學記≫에 수록된 ≪악경≫은 진화 뒤로 없어져 ≪시≫, ≪서≫, ≪역≫, ≪춘추 春秋≫, ≪예기 禮記≫의 5종을 총칭하여 오경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오경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예≫는 전한 무제 때에는 ≪의례(儀禮)≫를 지칭했던 것이 후세에 와서는 ≪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춘추≫는 ≪공양전(公羊傳)≫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뒤에 ≪좌씨전(左氏傳)≫으로 바뀌었다.

진의 행정 지배 기구는 전한에 와서도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건국 후 70년, 충실한 국력을 토대로 등장한 무제는 춘추학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유학중심의 사상통제와 그 추진기관으로서의 ‘오경박사(五經博士)’의 설치를 단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유교의 국교화(國敎化)이다.

이 때의 오경은 ≪역≫, ≪서≫, ≪시≫의 삼경에 ≪춘추≫(공양전)와 ≪예≫(의례)이다. 이 오경, 즉 5종의 경서를 유학 최고의 기본 문헌으로 인정하고, 그것에 ‘경’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여 전문 학자를 박사로 임용하고 여기에 연구생을 배치하였다. 학문의 국가 관리 일환으로 경의 범위가 명확하게 규정됨에 따라 경학은 비로소 충분한 조건을 갖추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한 무제 이후 선제(宣帝) 때에는 학자들에게 명하여 오경의 이동(異同)을 석거각(石渠閣)에서 강론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육경을 일컫는 경우가 있었는데, 후한의 반고가 ≪백호통≫을 편술하고 나서 오경의 칭호가 보편화 되었다.

육경 또는 오경 이외에 삼경, 사경, 칠경, 구경, 십경, 십일경, 십이경, 십삼경, 십사경, 십칠경, 이십일경 등의 통칭이 있으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으로는 삼경(詩, 書, 易)과 구경과 십삼경이 있다.

구경은 몇 가지 이설이 있는데, 그 중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서록 經典釋文序錄≫에 따르면 ≪역≫, ≪서≫, ≪시≫, ≪주례(周禮)≫, ≪의례≫, ≪예기≫, ≪춘추≫, ≪효경 孝經≫, ≪논어≫의 아홉 가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역≫, ≪서≫, ≪시≫에 삼례(三禮 : 주례, 의례, 예기)와 춘추삼전(春秋三傳 :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을 합하여 구경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다.

청나라의 피석서(皮錫瑞)는 ≪경학역사 經學歷史≫에서 “당 때에 삼례와 삼전을 나누고 여기에 ≪역≫, ≪서≫, ≪시≫를 합하여 구경으로 삼고, 송 때에 여기에 ≪논어≫, ≪효경≫, ≪맹자≫, ≪이아(爾雅)≫를 보태어 십삼경을 삼았다.”고 하였거니와 십삼경은 이른바 경의 총칭으로 ≪역경 易經≫, ≪상서, 서경≫, ≪모시(毛詩), 시경≫,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주례≫, ≪의례≫, ≪예기≫, ≪효경≫, ≪논어≫, ≪맹자≫, ≪이아≫의 13종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경서를 읽을 때에는 이 13경에 상세한 주석을 가한 ≪13경주소 十三經注疏≫가 기본적인 참고서가 된다. 경에 대한 1차 주석으로서의 주(注 : 실제로는 傳, 箋, 集, 解, 解詁 등으로도 불렀음.)와 주석의 주석 혹은 2차 주석으로서의 소(疏 : 正義라고도 함.)를 합한 것이 주소(注疏)인데, 한·진(晉) 때는 주가, 당·송 때는 소가 성행하였다.

전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오경은 서양에 있어서의 성경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경(經)이란 본래 직물(織物)의 ‘세로지른 실’이다. 뜻이 굴러 ‘사물의 줄거리’ 또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오경은 곧 경으로 존숭되는 한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된다. 우주론(易), 정치학(書, 禮, 詩), 윤리학(禮), 역사철학(春秋), 문학(詩) 등 천하 국가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은 오경 속에 완전히 구비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오경의 무류성(無謬性)과 자기 완결성은 오경의 작자가 성인이라는 사실로서 보증되고 있다.

후한 정현(鄭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 작업은 이 보증의 작업이며, 그의 주석학은 곧 그의 사상 체계이고 철학 체계라고도 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 초부터 청나라 말에 이르기까지 2,000년에 걸쳐 유교는 국교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므로 오경의 한 글자 한 구절은 지식인의 상식이 되었고, 그들의 시문에서 모든 사람의 이해를 전제로 오경이 사용되어 왔다. 이런 이유로 중국학이나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싫든 좋든 오경의 소양 없이는 원문 해독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경학에는 숙명처럼 붙어 다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다툼이다. 행정 능률의 향상을 위해 진대에 만들어지고 한대에 개량된 간체문자(簡體文字), 즉 예서(隷書)를 금문이라 하고 그 이전의 구체문자(舊體文字)를 고문이라 한다.

경학 성립의 시기(전한 초기)에는 같은 경서에 금문(新體字)과 고문(舊體字)의 두 계통이 병존하고 있었다. 진대 박사관이나 한대 오경박사 계통의 관학이 주로 신체자 계통이고, 분서(焚書)를 면한 민간 계통이 주로 구체자의 계통이었다.

자체의 차이는 먼저 해석의 차이를 낳고 나아가 학파의 대립으로 번져서 결국에는 정치 세력까지 껴안은 항쟁으로 확대되어 경학은 내란 시대에 돌입하게까지 된다.

전한 무제가 인가한 오경박사는 물론 금문파이었는데, 그 뒤로부터 200년 가까이 걸친 고문파의 반격은 정치면에서 신(新)이라는 독자 정권의 수립을 가져올 정도로 금문파와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금문파와 고문파 사이의 화해 조건도 서서히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후한 정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 작업은 확실히 오경의 무류성과 자기 완결성에 대한 보증 작업이었다. 이처럼 경학 사상 유례 없는 큰 업적을 남긴 정현은, 첫째로는 경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경에 대한 보완적 성격을 가지는 전(傳)까지를 포함한 경학의 모든 근본 문헌에 대하여 뛰어난 문자학에 근거한 종합적 해석을 확립하였다.

둘째로 그는 독특한 ‘예(禮)’의 관념을 축으로 하는 경학 전 영역의 체계화에 힘썼다. 경학이 곧 사상 체계이고 철학 체계이었듯이, 경학에 기대되는 국가에의 공헌도는 여기에서 비약적으로 상승되었다.

이것은 금문파와 고문파의 화해 조건이 서서히 성숙되어온 결과이기도 했지만, 이와 함께 정현의 학문적인 넓은 시야 속에서 금문학, 고문학의 후유증 없는 합작이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후에 노장(老莊)과 불교 등의 유행으로 유교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유교는 그때마다 시대의 호상(好尙)을 오경의 해석학 속에 도입하여 경서의 권위를 재무장함으로써 권위를 지켜 나갔다.

예를 들어 당초(唐初)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지은 흠정(欽定)의 주석서 ≪오경정의 五經正義≫에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노불(老佛) 유행기의 영향인 듯한 해석이 보이고 있다.

또한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오경 중심으로부터 사서 중심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저술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노·불을 받아들여 지양한 새로운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죽은 사자의 뱃속에 토끼가 여러 마리 들어있음이 해부 결과 드러났다고 해서 사자를 토끼라고 할 수 없듯이, 아무리 노·불의 영향이 크다 해도 이와 같은 새로운 해석으로 철학적인 재무장을 한 유교를 유교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부를 수는 없다.

요컨대, 경서 주석의 역사는 곧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일면임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철학적으로 면모를 일신한 송대 이후의 성리학 등을 거쳐 청대의 사상사학(思想史學)의 전반적 연구의 발전은 경학의 독자성의 확보라는 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다.

오경은 흔히 ≪역≫, ≪서≫, ≪시≫, ≪예기≫, ≪춘추≫ 또는 ≪시≫, ≪서≫, ≪역≫, ≪예기≫, ≪춘추≫의 순서로 일컫는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 나라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독서장≫의 순서는 ≪시경≫, ≪예기≫, ≪서경≫, ≪역경≫, ≪춘추≫의 순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의 경학의 흐름을 이상 개관하였거니와, 우리나라에서의 경학 연구의 흐름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본다.

조선조 초기 권근(權近)의 학문 속에는 오경 중심의 경학과 사서 중심의 이학(理學)의 공존 현상을 볼 수 있다. 권근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이전의 경학은 오경 중심인 데 비해, 그 뒤의 경학은 사서 중심의 이학의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성리학 전성기의 경학의 주제는 주로 사서,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와서는 이른바 실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학의 연구 범위는 다시 크게 확대되기에 이른다.

청대의 사상 사학과 고증학(考證學)이 실학자들의 경학연구에 크게 참고가 되었다. 우리 나라 경학사의 특기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본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의 경학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372년의 일이었다. 이 태학의 제도가 어떠하였는지는 지금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중국의 태학제도가 박사(博士, 敎授)를 두어 경사(經史)를 가르치게 하고, 특히 오경으로써 중요 과목을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태학 제도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실제로 ≪북사(北史)≫ 고구려조의 기록이나 ≪구당서(舊唐書)≫ 동이전 고려조의 기록 등을 통해 고구려의 학문이 경학, 사학, 문학의 세 방면을 고루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사군을 통해 한족(漢族)의 문화에 크게 자극되어서인지 고구려 사람들은 서적을 좋아하고, 비록 비천한 촌구석일지라도 경당(扃堂)이라는 서당을 설치하여 자제들의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교는 이미 이른바 본원유가(本原儒家)의 범주를 넘어 오경 중심으로 경학화, 한학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일본서기(日本書記)≫ 게이타이왕(繼軆天皇) 7년의 기록과 10년의 기록, 그리고 긴메이왕(欽明天皇) 15년의 기록에서 백제에 오경박사의 제도가 있음을 볼 때, 이 시기 유학의 중심이 오경 연구에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백제에 태학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관해서는 고증할 만한 문헌이 없다. 다만, 백제 때 오경박사의 칭호가 있었으며, ≪구당서≫ 동이전 백제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중국 양(梁)나라와 문화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양나라 측의 기록에 백제에서 오경을 강론할 수 있는 학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의 유학이 경서의 강론에 치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백제도 역시 태학을 설치하고 박사를 두어 자제들을 교육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 통일 이전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문화적 후진성을 면할 수 없었다. 6세기 초 이전의 신라는 선진(先秦)시대의 학술이나 고유 문화의 바탕 위에 있었던 것 같고, 그 뒤 순장 풍속을 금하고 율령과 관제를 갖춘 것을 보면 한대 문화는 6세기 초 이후에 들어온 것 같다.

따라서 신라의 경학을 논의하려면 아무래도 신라에 국학(國學)이 처음으로 세워진 682년(신문왕 2) 이후, 즉 통일신라 이후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유명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다. ‘ 무명씨이인서기석(無名氏二人誓記石)’이라고도 불리는 이 서기석 속에 보이는 임신년과 신미년이 어느 왕의 대에 속하는 것인지가 문제되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통일 이전 신라 흥륭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임신서기석 속에는 “시상서 예전윤득 서삼년(詩尙書 禮傳倫得 誓三年)”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두 사람이 3년을 기한으로 ≪시≫와 ≪상서≫와 ≪예전≫(禮傳, 禮記)을 차례로 습득할 것을 서약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 국학을 둔 것은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삼국통일 이후인 신문왕 2년의 일이다.

이는 입당유학생(入唐留學生)이 처음 출국한 해(640년)보다 40년이나 뒤이다. 따라서 신라 국학의 운영은 자연히 당의 제도를 모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과 과목으로는 역시 경서와 ≪문선(文選)≫이 주가되었고, 산학(算學), 삼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가 부(副)가 되었다. 또한 이것은 다음과 같은 3과(科)로 분류되어 각기 그 진로도 달랐던 것이다.

① 갑 : ≪예기≫, ≪주역≫, ≪논어≫, ≪효경≫ ② 을 : ≪좌전≫, ≪모시≫, ≪논어≫, ≪효경≫ ③ 병 : ≪상서≫, ≪문선≫, ≪논어≫, ≪효경≫으로서 3과에 있어 ≪논어≫와 ≪효경≫은 공통 과목이며 각 과에 따라 중점을 달리하고 있다.

중국 당제의 경우에는 대경(大經), 중경(中經), 소경(小經) 등으로 구분하여, ① 대경 : ≪예기≫, ≪춘추좌씨전≫ ② 중경 : ≪시경≫, ≪주역≫, ≪의례≫ ③ 소경 : ≪주례≫, ≪상서≫,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의 경우와 약간 다르다.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삼품과 : ≪춘추좌씨전≫을 읽고 ≪예기≫와 ≪문선≫의 뜻에 능통하며,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 ② 중품과 : ≪곡례≫와 ≪논어≫와 ≪효경≫을 읽고 통달한 자 ③ 하품과 : ≪곡례≫와 ≪효경≫에 능통한 자, 이밖에도 오경, 삼사(三史), 제자백가서 전반에 걸쳐 능통한 자는 삼품과와 관계없이 특별히 발탁되었다.

통일신라 이후의 유학교육은 ≪논어≫와 ≪효경≫ 등을 중심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근본 덕목의 함양에 주력하였고, 또한 한대 이후의 오경 강독이 전공 과목으로 취급되었으며, 문장학의 대표적인 서적인 ≪문선≫이라든가 역사와 사리를 밝게 하는 사자서(史子書)가 교양과목처럼 취급되었다.

고려시대의 경학

조선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는 ≪북학의(北學議)≫의 서문에서 민생의 곤궁을 방관함은 사대부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면서, 그와 같은 민본정신의 연원을 신라의 최치원(崔致遠)과 조선조의 조헌(趙憲)에서 찾고 있다.

최치원의 경우는 그의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가 현재 전하고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박제가에 의해 그토록 높이 평가되었다면 그 속에 유교의 민본 사상에 입각한 정치 철학이 담겨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최치원 사상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고려 초엽 유신(儒臣)들의 사상 속에는 유교의 민본 사상이 연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현존은 22조), 그리고 김심언(金審言)의 봉사이조(封事二條) 등에서 우리는 분명히 그 명맥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정교(政敎)면에서 확립된 고려 유학의 토대 위에서 교학(敎學)의 측면에서 고려 유학을 대성한 사람은 최충(崔冲)이다. 최충이 학도들을 모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고려사≫ 열전(列傳)에 보인다.

여기서 그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재명(齋名)을 통해 진학 과정이나 교과 내용을 유추한다면, 최충은 이미 오경 이외에 ≪예기≫ 속의 ≪대학≫과 ≪중용≫을 교과의 중심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점은 중국에서 ≪예기≫ 중에서 ≪대학≫과 ≪중용≫을 빼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묶어 사서로 확정, 명명하기 훨씬 전의 일이어서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본격적인 존경(尊經)과 강론풍(講論風)은 예종 때 관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일어났다. 구재학당의 교과 내용은 그런 학풍을 여는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다.

고려 중기는 유학 중에서도 특히 경학의 전성기이었다. 고려 유학의 학풍은 예종·인종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을 존중하는 경향으로 발전하여, 그에 따른 강론변의(講論辨義)의 진지한 학풍이 성행하였다.

“제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아하여 날마다 유신들과 더불어 경사를 토론하고 정리(政理)를 자취(咨取)하여 화민성속(化民成俗)에 흠이 없도록 하여야 하거늘, 어찌 어린아이들과 같은 조충(雕蟲)을 일삼아 경박한 사신(詞臣)들과 더불어 음풍소월함으로써 천성의 순정(淳正)함을 잃으려 하십니까?”라고 한 지제고(知制誥) 최약(崔瀹)의 간언이 예종으로 하여금 존경 강학의 흐름을 열게 하는 데 획기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예종·인종·의종 연간의 사록(史錄)에서 찾아지는 강경 기록만도 41회나 된다. 강경에 동원되었던 학자의 수는 근 20명이다. 이 중에 유명한 학자는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이다.

강경 때의 문난(問難)은 주로 김부식을 주축으로 하는 개경파(開京派)와 정지상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파(西京派)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주로 문난을 하는 쪽은 서경파요 이를 받는 쪽은 개경파였다고 하며, 문난은 주로 ≪주역≫을 둘러싸고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문난, 즉 질의문답이 얼마나 진지하였던가를 알 수 있으며, 따라서 학자들의 경학 연구 태도가 얼마나 치밀하고 깊이가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강경의 내용은 주로 ≪주역≫, ≪서경≫, ≪시경≫, ≪예기≫ 등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것은 ≪서경≫으로 22강(講)이고, 그 다음으로 ≪예기≫ 11강, ≪주역≫ 9강, ≪시경≫ 5강의 순이다.

≪서경≫은 태조의 훈요십조 속에서 무일편(無逸篇) 등이 언급될 만큼 크게 영향을 미친 주요 경전으로서 민본 사상 등 유교의 정치 철학이 담긴 책이다.

≪서경 ≫ 22강을 다시 세분하면 <홍범(洪範)> 강의가 6회, <열명(說命)> 강의가 6회, <무일> 강의가 4회, <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의 강의가 각 2회, 그리고 <요전(堯典)>, <고요모(皐陶謨)>, <익직(益稷)>, <태갑(太甲)>의 강의가 각 1회로 되어 있다. ≪예기≫와 ≪주역≫과 ≪시경≫의 경우에도 주제가 세분화되어 강의가 이루어졌다.

예종, 인종, 의종 3대의 약 40년에 걸쳐 성행되었던 이와 같은 존경 강학의 학풍은 당시의 학문 수준을 높여 많은 저술이 나오도록 하였다.

이때 저술된 책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윤언이(尹彦頤)의 ≪역해 易解≫, 최윤의(崔允儀)의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김인존(金仁存)의 ≪논어신의(論語新義)≫ 등이 특히 유명하지만, 이 중 ≪삼국사기≫만이 현존한다.

조선시대 초기의 경학

조선 초기의 권근은 조선조 유학의 터전을 닦았고 학문탐구의 신기원을 연 선구적인 학자이다. 그가 다룬 경학연구의 범위는 오경과 사서를 아울렀으며, 그의 학문취향은 분석과 종합을 함께 갖추고 있어, 넓은 학문의 깊이와 폭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저술 또한 방대하다. 문집 외에도 ≪입학도설(入學圖說)≫, ≪시서춘추천견록(詩書春秋淺見錄)≫,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동국사략(東國史略)≫, ≪오경구결(五經口訣)≫이 있다.

그의 저서 가운데 ≪오경구결≫은 지금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여러 판본 가운데서 특히 진주판 단행본이 보급되어 있는 ≪입학도설≫과 수장가의 손에서 조금씩 공개되기 시작한 ≪오경천견록≫은 신중을 기한 경학서로서 권근의 저술 가운데 백미라 할만하다.

≪오경천견록≫ 가운데서도 특히 ≪예기천견록≫은 저자의 나이가 40세가 되던 해로부터 죽을 때까지 약 19년 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된 책이어서 그 양에 있어 다른 저서들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권근은 오경을, 전체로 합일한 오경체용합일론(五經體用合一論)과 각 경마다 체용을 논한 오경각분체용론(五經各分體用論)으로 이분하여 오경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구성하고 있다.

원나라의 오징(吳澄)의 ≪역찬언(易纂言)≫에 영향을 받기도 한 ≪주역천견록≫에서는 ≪주역≫을 오경 전체의 체(體)로서 이해하고 있고, ≪춘추천견록≫에서는 ≪춘추≫를 오경 전체의 용(用)으로서 이해하고 있으며, ≪시천견록≫에서는 ‘사무사(思無邪)’를 체로, ‘감발선심(感發善心)’, ‘징창일지(懲創逸志)’를 용으로 해석하고, ≪서천견록≫에서는 왕도 정치의 귀감을 ≪서경≫에서 발견하고 있다.

또한 원나라 진호(陳澔)의 ≪예기집설(禮記集說)≫을 통하여 ≪예기≫의 절차를 고정(考定)하는 방법을 택하였다고 생각되는 ≪예기천견록≫에서는 ‘무불경(毋不敬)’을 체로 삼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中)으로써 용을 삼아 ≪예기≫의 체용관계를 서술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경학에 대한 권근의 주요 관심사는 사회의 안정과 사상의 통일을 희구하는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에 있는데, 이 대일통의 사상은 곧 그의 경학의 궁극적인 지상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대일통 사상의 실현은 곧 도(道)의 실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예기≫ 예운편(禮運篇)의 대동사회(大同社會)의 건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정도전(鄭道傳)의 ≪삼봉집(三峯集)≫ 심기리편(心氣理篇)에 대한 권근의 주(註)에서 그의 철학이 지닌 이(理) 중심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권근에게 이는 자연계의 법칙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법칙성이기도 하였으며, 윤리 도덕의 근원으로서 그 규범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권근이 추구한 이 중심의 철학은 주리설의 선구가 되었는데, 이황(李滉)의 이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유학의 체계를 도설(圖說)로 풀이한 권근의 ≪입학도설≫이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큰데, ≪성학십도≫의 제4도 <대학도>에는 ≪입학도설≫의 <대학도(大學圖)>가 채택되어 들어 있다.

≪성학십도≫의 제4도설에서 이황은 “이상은 공씨의 유서의 수장인데 국초에 신 권근이 이 도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약간의 자구 수정만 하고 ≪입학도설≫ 중의 <대학도>를 그대로 채용하고 있다.

이언적(李彦迪)은 이황보다 10년 연상이고, 16세기 전반기의 다난한 세상을 살았던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사상가요 경세가이었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황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언적은 사림파 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달성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조한보(曺漢輔)와의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辨)’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경학 사상을 볼 수 있는 것으로는 합본 전1책 속에 들어 있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이 있다. 이 두 저술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서 그의 만년(59세)의 역저이다.

≪속대학혹문≫은 역시 주자의 ≪대학혹문(大學或問)≫의 예를 모방하여 붙인 이름으로서 ≪대학장구보유≫에 대한 해설서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장구보유≫가 이언적의 개본대학(改本大學)이라면, ≪속대학혹문≫은 개본대학의 개편(改編)에 대한 설명이다.

만년에 귀양간 강계(江界)에서 저술된 ≪대학장구보유≫에서 이언적은 ≪대학≫의 저작자를 주자와 마찬가지로 증자(曾子)로 보고 있는 등 대체로 주자의 ≪대학장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 때문에 ‘보유(補遺)’라고 책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는 주자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주자가 ≪대학장구≫에서 격물조에 결락이 있다고 하여 <격물보전(格物補傳)> 134자(字)를 의작(擬作), 보충한 것에 대해 이언적은 주자의 관점을 부정하고 있다.

이언적은 격물치지의 대상으로서의 ‘지어지선(止於至善)’과 ‘지지(知止)’ 소절(小節)과의 연관성에 대한 정자(程子)나 주자의 설명을 주자의 ≪대학혹문≫ 속에서 찾아 그것을 근거로 주자의 <격물보전>을 부정하고, 오히려 ≪대학장구≫의 경 1장 속에 들어 있는 ‘지지(知止)’ 소절과 ‘물유본말(物有本末)’ 소절을 격물치지의 전(傳)으로 보았다.

이언적의 ≪대학≫ 연구에서는 그의 객관적이고 자유로운 주자학 연구태도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뒤의 조선 후기 주자학의 맹목적 수용에 의한 유학의 형해화(形骸化)와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경학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조선 사회는 국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적 사상 체계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는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은 이 시기에 학문적인 독창성을 발휘하여, 단조롭던 당시의 학계를 흔들고, 드디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누명까지 썼던 학자들이다. 이 두 학자에 의하여 17세기의 이른바 자주적 학풍은 태동되었던 것이다.

윤휴는 그의 ≪독서기(讀書記)≫ 속에서 ≪중용≫, ≪대학≫, ≪효경≫, ≪시경≫, ≪서경≫, ≪주례≫, ≪예기≫, ≪춘추≫ 등의 경서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고 있는데 혹은 서차(序次)를 분석하고 혹은 장구를 주해하고 혹은 실오(失誤)를 고증하는 등 그 견해가 매우 독창적이고 자주적이었다.

그는 그 가운데서도 ≪중용≫과 ≪대학≫의 두 경서에 특히 주력하였다. ≪중용≫ 연구에서는 이름을 비록 ≪중용주자장구보록(中庸朱子章句補錄)≫이라 했지만, 주자의 해석을 취하지 않고 분장주설(分章註說)도 독자적으로 한 부분이 많았다.

이것이 이른바 ‘윤휴중용개주(尹鑴中庸改註)’ 또는 ‘중용설(中庸說)’로 불렸고, 뒤에 송시열(宋時烈)에게 이단으로 배척을 당한 책이다.

윤휴는 또한 ≪서경≫의 <요전(堯典)>과 <홍범(洪範)> 등을 고정(考定)함에 있어 금문상서(今文尙書)를 주로 하고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위서(僞書)로서 배척하였으며, <순전(舜典)>은 마땅히 <요전>편에 합쳐서 한 전(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순전>편수(篇首)의 ‘왈약계고(曰若稽古)’ 이하의 28자는 후인의 위작이라 하여 마땅히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윤휴의 나이 55세인 1671년 ≪대학고본별록(大學古本別錄)≫, ≪대학후설(大學後說)≫이 저술되었고, 이보다 앞서 1667년 ≪대학설(大學說)≫이 지어졌는데, 윤휴에게 ≪대학≫의 격물의 훈해(訓解)는 하나의 경학상의 문제이었다.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은 격(格)을 한격(扞格)의 격으로 보아 격물을 격물욕(格物欲)이라 하였고, 주자는 격물을 궁지사물지리(窮至事物之理)라 해석하여 격에 이른다는 지(至)의 뜻으로 보았고,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은 물(物)을 의지용(意之用)이라 하고 격물을 뜻의 올바르지 못함을 바로잡는다고 하여 격을 바르다는 정(正)의 뜻으로 보았다.

하지만 윤휴는 ≪시≫, ≪서≫, ≪역≫ 등 여타 경전의 문자용례에 따라 물(物)은 명덕신민지사(明德新民之事), 격(格)은 정의감통(精意感通)의 뜻을 가진다고 풀이함으로써 자주적인 경학태도를 보였다.

박세당은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을 저술하고, ≪노자≫의 주석서 ≪신주도덕경≫과 ≪장자≫의 주석서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도가 철학의 주해는 둘 다 당시에 물의를 빚기고 했지만, 박세당의 대표적 저서인 일명 ≪통설 (通說)≫이라 불리는 ≪사변록(思辨錄)≫이 당시의 학계와 정계의 일대 문제로 된 것보다는 심하게 배척되지 않았다.

박세당은 41세 이후부터 관직에 뜻을 버리고 수락산(水落山) 아래 석천동(石泉洞)에 자주 퇴거하면서 강학과 경학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그 연구 결과가 52세부터 65세 사이에 나왔다. ≪사변록≫은 이 기간에 나온 그의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전 14책에 달하는 이 책의 구성은 ≪대학사변록≫, ≪중용사변록≫, ≪논어사변록≫, ≪맹자사변록≫, ≪상서사변록≫, ≪시경사변록≫(미완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의 경전 주석 태도는 정주(程朱)의 설에 구애되지 않는 독자성이 강하다.

이런 경향은 특히 ≪대학≫과 ≪중용≫의 주석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중용≫의 비은(費隱)장과 ≪대학≫의 격치설(格致說)의 주석에서 주자의 설을 취하지 않은 박세당은 이른바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에 대해서도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은 모두 지선(至善)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삼강령이 아닌 이강령이 되어야 한다 주장하고, 격물의 격(格)자의 뜻도 ‘칙(則)’이나 ‘정(正)’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여, 이 두 경우 모두 왕양명의 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사변록≫이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심하게 배척당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점에 있는 것이다.

김장생(金長生)은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 받고, 뒤에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킨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한 인물이다. 그는 문하에서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의 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는 ≪경서변의(經書辨疑)≫라고 하는 경학 연구서를 지었다. 이 저서는 그의 나이 71세 때 완성되었고 다른 유고(遺稿)보다 훨씬 앞선 1666년 단행본으로 초간된 바 있다. 그 내용은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서경≫, ≪주역≫, ≪예기≫ 등 경서 전반에 걸쳐 어려운 부분을 제가중설(諸家衆說)을 원용하여, 그 장단점을 취사선택한 경학연구서이다.

18세기로 접어들어서는 김원행(金元行)의 경학 연구가 돋보인다. 그는 1722년 신임사화에 종조부 창집(昌集)이 노론 네 대신의 한 사람으로 사약을 받아 죽고, 일가가 모두 유배되자 어머니의 유배 장소에 따라가 있으면서, ≪맹자≫와 이이, 송시열의 저서를 탐독했고, 1725년 할아버지가 신원(伸寃)된 뒤에도 시골에 파묻혀 학문에만 힘썼다.

당시 성리학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이간(李柬)의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반대하기도 한 그는 ≪독서잡록(讀書雜錄)≫, ≪중용문답(中庸問答)≫, ≪중용강설(庸講說)≫, ≪미호강의(渼湖講義)≫, ≪미상경의(渼上經義)≫ 등의 경학 연구의 단행본을 남겼다.

서명의 나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원행의 경학은 무엇보다도 ≪중용≫ 위주라는 특색을 지닌다. ≪중용문답≫, ≪중용강설≫은 말할 것도 없고, ≪독서잡록≫도 역시 그 내용은 ≪중용≫에 관한 것이며, ≪미호강의≫도 대학강록(大學講錄)과 중용의의(中庸疑義)가 중핵을 이루고 있으며, ≪미상경의≫만은 비록 사서삼경과 ≪근사록(近思錄)≫ 및 ≪심경(心經)≫을 폭넓게 다룬 것이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대학≫과 더불어 ≪중용≫을 논하는 것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언행록(言行錄)≫에서 ‘주자야말로 공자 이후의 일인’으로 믿고 있음을 보이고, 그 까닭에 “공맹의 도를 배우려는 사람은 주자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히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주자학에 두었던 학자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경학

이른바 실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익(李瀷)에게는 ≪역≫, ≪서≫, ≪시≫, ≪논어≫, ≪맹자≫ 등에 묘계질서(妙契疾書)한 경서질서(經書疾書)의 저술이 있다.

예를 들어 ≪맹자질서≫ 하나만 보더라도 이익은 명나라의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四書大全)≫에 대한 비판을 질서 저작의 한 동기로 하고 있어, 언뜻 보기에는 호광의 무리가 주자의 뜻을 정확하게 발전시키지 못한 점만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점은 그의 서문을 읽으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보다 주목할 부분은 이익의 세심하고 비판적인 태도는 주자설에 대한 이견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당시 집권층의 독경주의적(讀經主義的) 맹종(盲從)과 고루함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연장되고 있으며, 그것을 발판으로 주자설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조심스레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주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이를 사문난적으로 규문(糾問)하는 당시의 집권자 학자들을 은근히 지칭하면서 “금지학자(今之學者)는 유가지신상야(儒家之申商也)”라 하여 유가 중의 법가(法家)라고 비난하고, 그들을 신불해(申不害)나 상앙(商鞅)과 같은 혹독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성해응(成海應)은 영조, 정조 시대의 실학자로서 경학에 정통하였다. 그는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정신으로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절충한 ‘박정지묘(博精之妙)’를 경학 연구의 기본적인 태도로 삼았다. 따라서 그의 경학 연구의 대상은 사서와 오경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육경설(六經說)>에서 고금의 경학에 대한 비판적인 논술을 하고는, 한학에서는 천루(淺陋)함을 버리고 근저(根柢)가 있음을 취하고, 송학에서는 공소함을 버리고 정미함이 있음을 취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고증학을 몹시 배척한 홍석주(洪奭周)와 왕복논변을 통하여 고증학의 필요를 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이 “정주(程朱)중심의 송학에 있어 아직 정세(精細)를 다하지 못하였던 부분은 조선의 이황에 와서 그 완성을 보았다.”고 ≪조선상식문답≫에서 말하였듯이,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丁若鏞)에 이르기까지의 조선사상계는 약간의 반주자학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주자학에 덮여버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주자학의 낙원에 안주해 버린 시대였다. 그 평가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조선의 주자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주자학의 조선’이었다 라고 하는 평이 더 적절할 정도의 사상적 상황 속에서, ‘주자학의 조선’이 껴안고 있는 독특한 과제와 사상적으로, 경학적으로 진지한 씨름을 한 학자가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성론(性論)>에서 인간의 본성인 성(性)을 기호(嗜好)로 해석하여 “성이란 기호이니, 형구(形軀)의 기호가 있으며 영지(靈知)의 기호가 있는데 이것을 다같이 성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중용≫에 나오는 천명(天命)의 ‘천’을 인격신으로 이해하고, ≪대학≫의 명덕(明德)을 구체적 효제자(孝弟慈)의 덕목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매씨서평(梅氏書平)≫의 저술을 통해 ≪서경≫ 속의 매색(梅賾) 상주(上奏) 25편이 위서임을 고증하기도 하는 등 다채롭고 독자적인 견해를 많이 제시하였다.

이런 그의 연구성과는 당시의 국내외 경학 연구의 모든 업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정약용의 나이 52세인 1813년에 40권으로 완성된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를 살펴보면, 이 저술 속에서도 그가 한대로부터 송·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학자들의 주석들 가운데서 정수를 모두 집성했고, 더 나아가 당시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포용하지 않았던 일본 고학파(古學派) 학설의 정수까지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 그 집대성적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들도 상당한 경학의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원조(李源祚)는 ≪성경(性經)≫을 편찬하였고, 이진상(李震相)은 ≪춘추집전(春秋集傳)≫과 ≪춘추익전(春秋翼傳)≫을 지어 ≪춘추≫ 연구를 체계화하였으며, 곽종석(郭鍾錫)은 ≪다전경의답문(茶田經義答問)≫을 저술하였다.

김황(金榥)은 오경과 사서 및 ≪소학≫을 각각 1도(圖)씩 도상으로 체계화하여 ≪경학십도(經學十圖)≫를 저술하였고, 이항로(李恒老)는 ≪주역전의동이석의(周易傳義同異釋義)≫, 송병선(宋秉璿)은 ≪근사속록(近思續錄)≫, 김평묵(金平默)은 ≪근사록부주(近思錄附註)≫, 기정진(奇正鎭)은 ≪답문유편(答問類編)≫, 전우(田愚)는 ≪대학기의(大學記疑)≫ 등을 저술함으로써 경학연구를 체계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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