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은 경전을 해석하는 학문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중국 당송 시대를 거치며 확정된 유교 경전 13경을 대상으로 하는 해석 학문을 의미한다. 진 · 한 시대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거치면서, 경전의 본래 의미를 충실히 탐구하려는 기풍이 한 · 당대에 일어났는데, 이를 훈고학적 경학이라 한다. 송 · 원 · 명대를 거치면서는 훈고적 검토에서 더 나아가, 경전에 담긴 경세적 의미를 탐구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는데, 이를 의리학적 경학이라고 한다. 명대에 지나치게 개성적인 해석이 경전의 본래 의미를 훼손하였다는 각성 아래 청대에는 고증학적 경학이 나타났는데, 이는 훈고학의 성과를 활용하였다.
한국의 경우, 중국 경학의 성쇠와 보조를 맞추며 발전해 왔다. 원대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송대 의리학의 학문 정신을 담은 주자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로 대표되는 조선 주자학은 의리학적 해석을 생활문화와 국가 경영에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에서는 특히 주자학의 영향으로, 주자의 해석이 제시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중심으로 경학이 연구되었으며, 주자가 중시한 『소학(小學)』과 퇴계가 존숭한 『심경(心經)』도 널리 연구되었다. 예학 분야에서도 주자의 영향으로 『가례(家禮)』가 집중적으로 탐구되어, 조선시대의 정치 이상과 생활 관념이 동아시아 어느 나라보다 잘 발달하게 되었다.
경학(經學)의 ‘경(經)’은 유교의 경전을 가리킨다. 불교의 경전인 불경(佛經)이나 도교의 경전인 도경(道經), 기독교의 성경(聖經)도 모두 ‘경전’이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을 경학이라고 통칭한다. 경서를 ‘경’으로 부른 것은 『장자(莊子)』 「천운(天運)」 편에서 비롯되었고, ‘경학’이라는 용어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이다. 구양생(歐陽生)으로부터 『상서(尙書)』를 배우고, 공안국(孔安國)에게서 학문을 익힌 예관(倪寬)이 “무제(武帝)를 처음 만났을 때 경학을 논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는 한나라 무제 때의 일이다. 한 무제는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경전별로 전문 과정을 두었는데, 이른바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그것이다.
후한 시대의 학술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에는 『역(易)』, 『서(書)』, 『시(詩)』, 『예(禮)』, 『악(樂)』을 오경(五經)이라 일컫고 있으나, 당(唐)의 서견(徐堅) 등이 지은 『초학기(初學記)』에는 『악경』은 사라지고 『시』, 『서』, 『역』, 『춘추(春秋)』, 『예기(禮記)』 만을 오경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예』는 한 무제 때에는 『의례(儀禮)』를 지칭하였던 것이 뒤에는 『예기』로 바뀌었으며, 『춘추』는 『공양전(公羊傳)』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뒤에 『좌씨전(左氏傳)』으로 바뀌었다.
육경 또는 오경 외에도 경학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구경과 십삼경이 있다. 구경은 몇 가지 이설이 있는데, 그중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서록(經典釋文序錄)』에 따르면 『역』, 『서』, 『시』, 『주례(周禮)』, 『의례』, 『예기』, 『춘추』, 『효경(孝經)』, 『논어』의 아홉 가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역』, 『서』, 『시』에 삼례(三禮)인 『주례』, 『의례』, 『예기』와 춘추삼전(春秋三傳)인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穀梁傳)』을 합하여 구경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다.
청나라의 피석서(皮錫瑞)는 『경학역사(經學歷史)』에서 “당 때에 삼례(三禮)와 삼전(三傳)을 나누고 여기에 『역』, 『서』, 『시』를 합하여 구경으로 삼고, 송 때에 여기에 『논어』, 『효경』, 『맹자』, 『이아(爾雅)』를 보태어 십삼경을 삼았다.”고 하였거니와 십삼경은 이른바 경의 총칭으로 『역경』, 『서경』, 『시경』,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주례』, 『의례』, 『예기』, 『효경』, 『논어』, 『맹자』, 『이아』의 13종을 말한다.
학자들 중에는 이 13종 경서를 모두 정식 ‘경’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춘추』는 당연히 ‘경’이지만, 『예기』는 ‘기(記)’, 『춘추좌전』 · 『춘추공양전』 · 『춘추곡량전』은 모두 ‘전(傳)’이며, 『논어』도 ‘기’에 해당한다. 『효경』과 『이아』 역시 『예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맹자』는 송나라 이전까지 『순자(荀子)』와 함께 제자류(諸子類)에 속하였으므로 본래는 ‘경’에 포함되지 않았다. 『효경』의 경우는 더욱 논란이 있다. 육경 가운데 ‘경’을 명시한 책이 없는데, 증자(曾子)가 효를 물은 답변을 기록한 것을 ‘경’이라 칭한 점은 의심스럽다. 요컨대 이들은 육경의 부속으로 볼 수는 있지만, 곧바로 ‘경’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편 사서(四書)는 오경과 거의 동등한 지위를 지녔다. 과거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에는 사서를 읽는 소리가 집집마다 들렸다고 한다. 이른 바 사서는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이다. 이들은 남송 효종 순희 연간[1174~1189] 연간에 주희(朱熹)가 정한 것이다. 『대학』 · 『중용』은 본래 『예기』에 속해 있었으나, 주희가 스승의 뜻을 이어 특별히 이 두 편을 뽑아 『논어』와 『맹자』와 함께 사서로 편성하였다. 그는 『대학』은 증자가 지은 것이고, 『중용』은 자사의 작품이고, 『논어』는 본래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고, 『맹자』도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라 여겼다. 그는 공자에서 증자와 자사를 지나 맹자로 이어지는 하나의 도통을 생각하였고, 이 네 종의 책이 공자 문하의 정통적 결정품이라 주1
주희는 이들 네 종의 책에 대해 『예기』에 속해 있던 『대학』과 『중용』은 경(經)과 전(傳)으로 나누어 ‘장구(章句)’를 만들고 『논어』와 『맹자』는 기존의 주석을 집성하여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주희의 재전 제자인 허형(許衡) 등에 의해 원대 과거제도의 표준 해석서로 받아들여지면서, 이후 중국, 한국, 베트남 등 과거를 시행하는 동아시아 유교 국가에서 600년 이상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며 광범위한 영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경서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관학의 책[官書]’이라는 주장과 ‘성인(聖人)의 제작’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중국 고대에는 학문이 관청에 소속되어 있어 일반인은 사적으로 책을 서술할 수 없었다. 이른 바 경(經)은 모두 관찬서(官撰書)로서 사관(史官)이 관장하였다. 경서와 법률서는 모두 2척 4촌의 큰 간책에 기록하였는데, 그것들이 관서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주공(周公)의 구전(舊典)으로 보는 관점이다. 공자는 조술(祖述)하기만 하였을 뿐이라는 관점이다.
한편, 성인의 제작이라고 보는 시각은 『박물지(博物志)』에서 “성인(聖人)이 제작한 것을 경(經)이라고 하고, 현자가 저술한 것을 전(傳)이라고 한다.”라는 설명이 가장 대표적이다. 정현은 『효경』의 주에서 “경(經)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남북조 시대에 『논어의소』를 지은 황간(皇侃)은 “경(經)은 변함없다는 뜻으로 법을 말한다.”고 하였다. 『문심조룡(文心雕龍)』 「종경(宗經)」에서는 “경(經)이란 항구적인 지극한 도이며, 깎아버릴 수 없는 큰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하늘이 불변하듯 도(道) 도 변하지 않는다.”는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육경을 공자가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공자가 육경을 지어 만세에 가르침을 남겨 불변의 상도가 되었기 때문에 ‘경’이란 성인이 지은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육경의 효용에 대해 말한 최초의 문헌은 『장자』 「천하」 편으로 “『시경』으로 뜻을 말하고, 『서경』으로 일을 말하고, 『예경』으로 행실을 말하고, 『악경』으로 조화를 말하고, 『역경』으로 음양을 말하고, 『춘추』로서 명분을 말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부연한 것이 사마천의 『사기』 「태사공자서」인데 공자의 말로 인용되어 있다. “『역경』은 천지 · 음양 · 사시(四時) · 오행(五行)을 드러내기 때문에 변화를 아는 데 장점이 있다. 『예경(禮經)』은 인륜을 바로 세우기 때문에 행실에 장점이 있으며, 『서경』은 선왕의 일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행실에 장점이 있으며, 『시경』은 산천 · 계곡 · 금수(禽獸) · 초목 · 빈모(牝牡) · 자웅(雌雄)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풍화(風化)에 장점이 있으며, 『악경』은 즐거움을 통해 자신을 세울 만하기 때문에 조화에 장점이 있으며, 『춘추』는 시비를 분변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다스리는 데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예경』으로 사람을 절도 있게 하고, 『악경』으로 조화를 발하며, 『서경』으로 정사를 말하고, 『시경』으로 뜻을 전달하고, 『역경』으로 변화를 설명하고, 『춘추』로 대의를 드러낸다.”고 그 효용을 부연하였다.
육경의 순서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배열법이 있다. 육경을 주공(周公)의 구전(舊典)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책이 지어진 시대 순으로 선후를 정하는데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역경』은 팔괘를 근원하였고, 『서경』 제1편 『제전(帝典)』은 요순의 일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두 번째 배열하였다. 『시경』의 빈풍(豳風) 「칠월」은 주나라가 빈(豳) 땅을 떠나 기(岐) 땅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작품이며, 상송(商頌)은 상나라 때 교제(郊祭)의 악장이기 때문에 세 번째에 배열하였다. 『예경』 · 『악경』은 주공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 배열하였다. 『춘추』는 공자가 노나라 역사에 근거하여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여섯 번째에 배열하였다.
육경을 공자의 가르침으로 보는 학자들은 경전의 얕고 깊은 정도에 따라 순서를 정한다. 『시경』 · 『서경』은 문자적 교육으로 교육 수준이 비교적 얕기 때문에 맨 앞에 배열하였다. 『예경』은 사람들의 행위를 단속하는 내용이고, 『악경』은 사람들의 품성을 도야시키는 내용으로 진일보한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배열하였다. 『역경』은 음양의 변화를 밝히고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궁구하는 것으로, 요즘 말로 하자면 우주론에서 인생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춘추』는 공자의 정치 주장으로 지난 일을 포장(褒獎)하거나 폄하하는 방식을 빌어 그 미언대의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하에서 문학으로 이름났던 자유(子游) · 자하(子夏)조차도 ‘쓸 것은 쓰고 뺄 것은 뺐다’는 공자의 저술에 대해 한마디 말도 거들지 못하였다. 이 두 책은 수준이 매우 높고 깊기 때문에 맨 뒤에 배열하였다.
육경을 주공의 구전으로 보아 경전을 관찬서로 여기고 시대의 상후로 순서를 삼아 육경을 『역경』 · 『서경』 · 『시경』 · 『예경』 · 『악경』 · 『춘추』로 배열하는 것과 『악경』이 진시황의 분서 때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고문 경학가들의 주장이다. 육경을 공자가 지은 것으로 보고, 정도의 얕고 깊은 순서를 삼아 육경을 『시경』 · 『서경』 · 『예경』 · 『악경』 · 『역경』 · 『춘추』로 배열하는 것과 악본(樂本)은 경이 없고 원래 『시경』에 덧붙여져 있었다는 것은 금문 경학가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차이는 각각 존신하는 경전의 판본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금문(今文)’이란 전한(前漢) 시대에 통용되던 예서(隸書)로 기록된 경전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유생들이 스승에게서 전해 받은 내용을 베껴 쓴 판본이다. 반면, ‘고문(古文)’이란 진한(秦漢) 이전에 쓰이던 고문대전(古文大篆)으로 기록된 경전을 말하며, 이는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판본이다.
금고문의 분쟁은 진나라 때 벌어진 분서갱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가 정책에 대해 사사로운 의견을 내는 유학자들의 경전을 모두 불태우고, 관련 논의를 하는 유학자들을 처벌하였다. 이때 많은 경적(經籍)이 소실되었으며, 한나라 혜제(惠帝) 때 협서율(挾書律)이 폐지될 때까지 책을 소장할 수 없었다. 한 문제 때 유학자들이 보았던 경전은, 노숙한 유학자들이 전해 준 내용을 당대의 글씨인 예서로 기록한 판본이었다. 이후 한 성제(成帝) 때 유흠(劉歆) 등이 국가 도서관인 중비부(中秘府)에 소장된 경적을 교정하였고, 한 애제(哀帝)는 유흠에게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완성하게 하였다. 유흠은 책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당시 경학박사들이 가르치던 판본과 다른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옛날의 전서(篆書)로 작성된 경서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경(古文經)’이다. 이에 따라, 한나라 때 통용되던 예서 판본을 ‘금문경(今文經)’이라고 구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결국 진나라의 분서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였다.
경전별로 상황을 보면, 『주역』과 『시경』은 금문과 고문 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주례』는 고문본만 존재하고 금문본은 없었다. 이를 제외한 『상서』, 『의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춘추좌씨전』, 그리고 『논어』, 『효경』은 고문본이 금문본보다 편장(篇章)이 더 많았다. 이 때문에 고문학파는 금문경을 진나라의 분서로 훼손된 불완전한 판본이라고 보았다. 반면, 고문경의 출처는 공자가 살던 집의 벽 속에서 발견되었거나 민간에서 얻었거나, 혹은 유흠이 보관한 비서(祕書)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한 시대에 학관에서 세워 박사들이 교수하던 판본은 아니었다. 따라서 금문학파는 고문경을 유흠이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이유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는 물과 불처럼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후한의 정현(鄭玄)은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경학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업적을 남겼다. 그의 주석은 단순한 해설을 넘어, 오경의 무류성과 자기 완결성에 대한 보증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현은 뛰어난 문자학을 바탕으로 경(經)뿐 아니라 이를 보완하는 전(傳)까지 포함한 경학의 모든 근본 문헌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그는 ‘예(禮)’의 관념을 중심으로 경학 전체를 체계화하는 데 힘썼으며, 이는 곧 그의 사상과 철학 체계로 평가될 만하다. 이로 인해 경학의 국가적 기능과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강화되었다. 정현의 성과는 금문과 고문을 아우르는 종합적 이해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위진 시대에는 현학(玄學), 노장사상, 불교가 유행하며 유교의 지위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유교는 시대적 사상 성과를 오경 해석 속에 흡수하고, 이를 통해 경서의 권위를 재무장함으로써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당나라 초기에 공영달(孔穎達) 등이 편찬한 『오경정의(五經正義)』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오경정의』는 육조 시대의 노장과 불교사상을 반영하면서도 유교 경학의 정통성을 유지한 대표적인 주석서였다.
남송 시대에 주희는 북송의 학문은 물론, 불교의 학문적 자양분을 유학에 접목시켜 종래와는 구별되는 신유학(新儒學)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서장구집주』는 오경 중심에서 사서 중심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저술이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인식론적 성장을 진전시킨 새로운 철학을 담고 있다.
명대 초기에 영락제에 의해 완성된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은 송 · 원 · 명대의 주자학적 성과를 망라한 국가적 사업으로, 이후 종합적 주자학의 교과서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졸속적인 편찬으로 인해 고염무(顧炎武) 등 학자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명대 학술의 특징은 왕양명의 『대학』 해석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양명학의 번성이다. 양명학은 경전에 대한 정교한 지적 탐구를 중시하는 도문학(道問學)적 접근보다, 경전에 대한 성찰적 해석을 통해 마음을 함양하는 존덕성(尊德性)적 접근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을 성인의 마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 이탁오의 경학처럼 지나친 주관주의로 흐르기도 하였다.
명말청초의 3대 거유로 통칭되는 고염무, 왕부지(王夫之), 그리고 명대 학술의 지나친 주관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학자 개인의 견해를 사상적으로 억압한 청대 초기의 문자옥(文字獄)은 경전 해석에서 경전의 본령에 대한 관심과 경전 자체로의 학술적 전환을 촉진시켜, 훈고학적 해석을 중시하는 고증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청대 정부의 후원을 받아 완성된 『사고전서(四庫全書)』 작업의 성과는 이러한 학술적 흐름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고증학적 해석의 선구로 평가되는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은 고증학적 작업에도 불구하고 의리학적 지향을 상당 부분 드러내어, 청대 고증학이 단순히 훈고학의 입장만으로 점철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고증학적 경학의 부흥으로 훈고학의 원류인 문자학, 음운학, 사전학이 발전하였으며, 고문헌의 진위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교감학과 교수학이 훈고학의 새로운 분야로 부상하였다.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372년의 일이었다. 『북사(北史)』 고구려조나 『구당서(舊唐書)』 동이전 고려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학문은 경학, 사학, 문학의 세 방면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의 유교는 이미 이른바 본원유가(本原儒家)의 범주를 넘어 오경 중심의 경학화, 한학화 경향을 보인다.
백제의 경우, 오경박사라는 칭호가 있었으며, 『구당서』 동이전 백제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중국 양(梁)나라와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나라 측 기록에는 백제가 오경을 강론할 수 있는 학자를 보내 달라 요청한 사례도 전한다. 백제 근초고왕[?~375]은 일본에 왕인을 보내 유교를 전수하였는데, 이때 왕인은 『천자문』과 함께 『논어』 10권을 가지고 갔다. 이러한 기록은 백제가 국제 교류를 통해 경학을 적극적으로 진작하였음을 보여 준다.
신라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다. 여기에 “시경과 상서, 예전을 윤독하여 삼년을 기약한다[詩尙書禮傳倫得 誓三年]”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두 사람이 3년을 기한으로 『시경』, 『상서』, 『예전(禮傳)』[예기]을 차례로 습득할 것을 서약한 내용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설치하고 『논어』와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였다. 이는 입당(入唐) 유학생이 처음 출국한 해[640년]보다 40년 뒤의 일이다. 신라 국학은 당의 제도를 모방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교과 과목으로는 경서와 『문선(文選)』이 중심이 되었고, 산학(算學), 삼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가 보조 과목이었다.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설치되었다. 이때 활용된 경전은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논어』, 『효경』, 『곡례』였으며, 오경, 삼사, 제자백가서 전반에 능통한 자는 특별히 발탁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현존은 22조], 그리고 김심언(金審言)의 봉사이조(封事二條) 등에는 제사와 관련된 구절이나 군신 관계에 대한 정치 이념이 등장하는데, 이는 상당 부분 유교 경전에서 비롯된 내용들이다.
교학(敎學)에서 고려 유학을 집대성한 사람은 최충(崔冲)이다. 최충은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설치하고 학도들을 모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 그의 재명(齋名)을 통해 오경 외에도 『예기』 속의 『대학』과 『중용』을 교과의 중심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주희가 『예기』에서 『대학』과 『중용』을 빼내어 『논어』, 『맹자』와 묶어 사서로 확정, 명명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구재학당은 고려시대의 본격적인 존경(尊經)과 강론풍(講論風)을 연 예종 때의 관학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고려 중기 유학의 학풍은 예종 · 인종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지제고(知制誥) 최약(崔瀹)은 “제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아하여 날마다 유신들과 경사를 토론하고, 정리(政理)를 자취(咨取)하여 화민성속(化民成俗)에 흠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이는 예종 시대 경학의 진지한 강론 풍조를 보여 준다.
『고려사절요』 예종 · 인종 · 의종 연간 기록에서 강경(講經) 사례만도 41회에 이르며, 강경에 참여한 학자는 약 20명에 달한다. 저명한 학자로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을 비롯하여, 『역해(易解)』의 윤언이(尹彦頤),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의 최윤의(崔允儀), 『논어신의(論語新義)』의 김인존(金仁存) 등이 있으나, 이들의 저술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 중후기 경학에서 중요한 변화는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가 수용된 점이다.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따르면, 13세기 중엽에는 고려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권부(權溥: 12621346)에 의해 간행된 이후 고려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이후 성균관의 좨주로서 활동한 이색(李穡: 13281396)은 『논어집주』를 능숙하게 활용하였고, 정몽주와 권근 등 여말선초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정몽주는 원대 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의 내용을 능숙하게 사서 해석에 적용하였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학자로는 권근이 있다. 그는 조선 유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학문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권근의 경학 연구 범위는 오경과 사서를 아우르며, 그의 학문적 성향은 분석과 종합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깊이와 폭이 넓은 학문 세계를 보여 준다. 『입학도설(入學圖說)』, 『시서춘추천견록(詩書春秋淺見錄)』,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동국사략(東國史略)』, 『오경구결(五經口訣)』 등은 그의 학문 범위와 관심사를 잘 드러낸다. 특히 『예기천견록』은 저자가 40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19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방대한 저술로, 다른 저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량이 방대하다. 권근은 고려 오경 유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직 경험을 통해 확보한 경세학적 이상을 경전 해석에 투영함으로써 사회 안정과 사상의 통일을 추구하였다. 그의 『입학도설』은 도설(圖說) 형식으로 유학 체계를 풀어냈으며, 이는 후에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4도 「대학도」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동시대 학자 정도전은 체계적인 경전 주석을 남기지 않았음에도 『조선경국전』과 『경세문편』 등에 경세론적 경전 해석의 경향을 반영하였다. 그는 강력한 벽이단론을 전개하면서 조선 초기 학술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불리며,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등의 만년 저작에서 주희의 『대학』 해석과 차별화된 객관적이고 자유로운 주자학의 연구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는 주자학이 교조화되기 이전 조선 경학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종대 이후 사림들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주자의 『소학』은 유학 실천의 중요한 경전으로 인식되었다. 사림들은 『대학』에 앞서 『소학』을 읽는 것을 중요한 학습 과정으로 여겼으며, 그 결과 조선에서는 다양한 『소학』 판본과 조선화된 속집인 『해동소학』 등이 출간되었다. 이에 『소학』은 13경 외에 조선에서 특히 주목받은 의미심장한 유교 경전으로 자리 잡았다.
1415년 명 영락제가 완성한 『사서오경대전』은 송원대 주자학파의 해석을 집성한 것이다. 이 책은 간행 후 4년 뒤인 1419년 세종 원년에 조선에 수입되었으며, 이후 1429년 목판본으로, 1490년에는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 『논어집주대전』의 경우 10행 22자본으로 20권 7책의 형태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간되면서 한양의 성균관, 함경도 감영, 경상도 감영 등에서 간행되었고, 전주에서는 사판본(私版本)으로도 간행되었다.
조선 경학에서 경전 간행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경전의 국가 표준 번역인 경서 언해이다. 언해의 서두에는, 한문을 읽을 때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해 조사와 어미를 첨가한 구결(口訣)이 있다. 구결은 삼국시대 이래 경전 학습에 활용되었으며, 세조대에 사서의 구결이 정리되었고, 조선 말기 학자 전우(田愚)에게도 경서 구결이 전해진다. 구결 다음에는 석의(釋義)가 위치한다. 석의는 경전의 난해한 구절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으로, 퇴계 이황의 『사서삼경석의(四書三經釋義)』가 대표적이다. 석의에서는 한자, 한자의 음과 훈, 구결, 우리말 번역 등의 다양한 사례가 소개되어 학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석의는 언해보다 학술적 가치가 높은 측면이 있다.
한편 언해는 유교 경전의 완전한 우리말 번역이다. 한 구절에 하나의 번역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자의 주석과 주자의 주석이 상이했던 『주역』의 경우 논란이 많았다. 경서 언해는 선조대 미암 유희춘이 이황과 이이의 경전 해석을 기초로, 『대학』과 『논어』에서 시작하여 광해군 때 최종적으로 33명의 교정청(校正廳) 학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로써 주자학적 해석이 통일되어 『어록해(語錄解)』를 통해 사서오경본의 소주(小注)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체계가 확립되었다. 경서 언해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국가가 경전 해석의 권위를 확보하고 이를 과거 시험의 표준 자료로 활용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경전 주석서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경서 언해가 미친 거대한 학술적 영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조선 사회는 국가의 지도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사상 체계에 대한 회의를 경험하며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은 학문적 독창성을 발휘하여 단조롭던 당시 학계를 흔들었고, 일부에서는 이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기도 하였다. 이 두 학자는 17세기 조선에서 자주적 학풍의 태동을 이끌었다.
윤휴는 그의 『독서기(讀書記)』에서 『중용』, 『대학』, 『효경』, 『시경』, 『서경』, 『주례』, 『예기』, 『춘추』 등 주요 경서를 폭넓게 연구하였다. 그는 경서의 서차(序次)를 분석하고, 장구를 주해하며, 실오(失誤)를 고증하는 등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견해를 보였다. 특히 『중용』 연구에서는 『중용주자장구보록(中庸朱子章句補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에도 주자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분장주설(分章註說)을 제시한 부분이 많았다. 또한 『대학고본별록(大學古本別錄)』, 『대학후설(大學後說)』과 앞서 1667년에 저술한 『대학설(大學說)』에서는 격물의 ‘물(物)’을 명덕신민지사(明德新民之事), ‘격(格)’을 정의감통(精意感通)으로 풀이함으로써 자주적 경학 태도를 보여 주었다.
박세당은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을 비롯해 『노자』 주석서 『신주도덕경』, 『장자』 주석서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등을 저술하여 제자서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일명 『통설(通說)』이라고도 불리는 『사변록(思辨錄)』은 『대학사변록』, 『중용사변록』, 『논어사변록』, 『맹자사변록』, 『상서사변록』, 『시경사변록』[미완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정주(程朱)의 설에 구애되지 않는 독자적 경전 주석 태도를 보여 주었다.
한편 김장생(金長生)은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예학을,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아들 김집(金集)에게 계승시키고, 조선 예학의 태두로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또한 문하에서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을 배출하며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구축, 조선 유학계에서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경서변의(經書辨疑)』는 주자학적 시각에서 경전을 해석한 저술로, 주자의 집주에 부합하는지를 점검하며 ‘변의(辨疑)’하고자 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박세당이 지은 묘지문을 계기로, 김창협을 비롯한 송시열의 후학들은 박세당과 윤휴를 주자의 주와 다른 독자적 경전 해석을 시도한 학자로 보고 ‘사문난적’으로 지목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단순한 학술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측면에서 주도권 확보라는 현실적 목적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송시열과 그의 후학들은 주자학 문헌을 정리하고 집성함으로써 조선 주자학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송시열 자신이 당대에 완성한 저작 중 하나가 『논맹정의혹문통고(論孟精義或問通考)』이다. 이 책은 『논어』와 『맹자』에 대한 주희의 집주(集注)가 완성되기 이전에 활용된 『정의(精義)』와 당대 조선에서 이미 유행하던 『혹문(或問)』을 통합하여 구성되었다. 송시열은 주자의 생애를 따라가며 저작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어 재전 제자인 한원진이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 이의철이 완성한 『주자어류고문해의(朱子語類考文解義)』, 그리고 이후 250년간의 연구 성과가 집약되어 이항로(李恒老) 대에 완성된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은 모두 조선 주자학의 중요한 문헌학적 성과로 평가된다.
이러한 일련의 문헌 기획은 모두 송시열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의 주자학적 성과와 조선 주자학에 끼친 영향력을 보여 준다. 실제로 정조는 송시열을 조선 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송자(宋子)’로 칭하며, 국가 지원으로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조선 학술사에서 그가 차지한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
동암(東巖) 유장원(柳長源: 17241796)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문인으로, 이종수 · 김종덕 등과 함께 ‘호문삼로(湖門三老)’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가 57세 되던 1780년에 편집한 『사서찬주증해(四書纂註增補)』는 사서에 대한 중국 주자학의 해석을 집성한 저작이다. 대야(大野) 류건휴(柳健休: 1768~1834]는 유장원에게 사사하여 경학 연구에서 독자적인 학파를 이룬 학자이며, 그의 『동유사서집해평(東儒四書集解評)』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학자들의 경전 주석을 집성한 저작이다. 이는 주로 영남 지역에서 이루어진 경전 집성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우암학파의 집성적 성격을 잘 보여 주는 문헌으로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1846~1918)의 『사서집주상설(四書集註詳說)』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소주(小註)에서 필요한 내용을 골라 주자주(朱子註)에 맞추어 끼워 넣고, 중국 역대 주자학자부터 조선 선현에 이르기까지 경전 주석 가운데 도움이 될 만한 해석을 취하였으며, 간간이 자신의 의견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집주를 사전적 형태로 정리하였다는 데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논어집주상설』을 보면, 『논어』 해석에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 사례는 드물지만, 『논어집주』의 난해한 글자나 구절에 대한 의문을 간명하고 명쾌하게 해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우암학파가 조선에서 지속해 온 주자학 문헌 정리 작업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경전에 대한 완결판적 의미를 주7
실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익(李瀷)은 『역』, 『서』, 『시』, 『논어』, 『맹자』 등에 대한 경서질서(經書疾書)를 저술하였다. 그는 “주자를 잘 배우는 것은 그의 경전 해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경전을 해석할 때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라는 인식 아래 『집주』에 얽매이지 않고, 경문(經文)의 본지(本旨)를 자득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익이 경문의 본지(本旨)를 추구한 방법론은 『춘추좌씨전』을 비롯한 오경(五經)의 기록에 의거하여 본의(本義)와 이면적 정황을 세밀히 추적하는 것이었다. 즉, 경전의 사례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법[以經證經], 역사적 사실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법[以史證經]을 구사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경전을 궁구한 성과가 세상의 쓰임에 활용되어야 한다는 궁경치용(窮經致用)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이는 『성호사설』의 「경사문(經史門)」과 『곽우록(藿憂錄)』 등에서 나타나는 경세학적 실천 의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익의 경학 정신을 사숙하여 계승한 정약용(丁若鏞)은 육경사서(六經四書) 전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경학 연구를 경세학으로 연결해 당대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유배 시절에는 특히 육경 연구에 몰두하여 『시경강의』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고, 1812년 이후에는 사서와 더불어 『소학』과 『심경』까지 연구하였다. 그의 경학 연구 성과를 집성한 경집은 총 232권에 달한다. 정약용은 경학 연구 성과를 실천으로 연결해 일표이서(一表二書)라 불리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저술하였다. 경전 해석에 있어서도 독창적인 견해를 다수 제시하였는데, 예컨대 『중용』의 천명(天命)에서 ‘천’을 인격신으로 해석하고, 『대학』의 명덕(明德)을 효(孝) · 제(弟) · 자(慈) 등의 구체적 덕목으로 이해하였다.
그의 고증학적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 『매씨서평(梅氏書平)』에서는 『서경』 속 매색(梅賾)의 상주(上奏) 25편을 위서로 고증하였으며,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는 한 · 중 · 일 고금의 주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유학의 원의를 중심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맹자요의』에서는 인간 심성에 대한 주자학적 해석을 넘어, 권형(權衡)과 자주지권(自主之權)을 지닌 구체적 도덕 갈등 상황의 인간을 상정하고, 주체적 도덕 실천을 강조하였다. 또한 『상서고훈』은 조선 경전 해석의 고증학적 성과를 극대화한 저작이며, 『주역사전』은 한송(漢宋) 역학을 절충하면서 효변설과 추이설을 효과적으로 결합시켜 정합적 해석 체계를 세웠다. 『상례사전』은 고례(古禮)의 원의를 탐구하면서도 현실에 맞게 변용하려는 시도로, 『국조전례고』와 함께 상례(喪禮)의 사례(士禮)와 방국례(邦國禮)를 아우르는 체계를 완성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경학 저작을 남긴 정약용은 조선 최대의 경학자로 주6
정조 시대에 이루어진 경사 강의는 규장각 각신, 성균관 · 사학(四學) 및 지방 유생, 경연관 등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주요 대상은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啟文臣)이었다. 초계문신 제도는 1781년(정조 5) 여름 처음 시행되었으며, 혹서나 혹한기에는 이문원(摛文院)에서 강의를 중단하고 문신 각자가 집에서 과제물을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조가 내린 질문[御製條問]과 초계문신의 답안[在家條對] 가운데 우수한 자료를 편집한 것이 바로 경사 주5
『홍재전서(弘齋全書)』 권64에서 권119까지 총 5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서춘기(鄒書春記)」[권120121], 「노론하전(魯論夏箋)」[권122125], 「증전추록(曾傳秋錄)」[권126], 「유의평례(類義評例)」[권127~128] 등 기타 경학 관련 저술들과 함께 총 184권 중 1/3 이상을 차지하는 주4
1781년 『근사록』과 『심경』을 시작으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등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여러 당색 강원들의 답안을 폭넓게 수록하고 있다. 이는 18세기 후반 정조와 문신들의 학문적 논쟁과 논의 수준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경사 강의에는 정조 본인뿐 아니라 노소론계[이시수, 서용보, 이노춘, 이서구, 김재찬, 김조순, 김근순, 정민시, 서형수, 서정수, 서유구 등] 및 남인계[홍인호, 정약용 등] 지식인들의 학문 경향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는 이익이나 홍대용 개인 문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여러 관점의 역동적 교류를 보여 준다.
따라서 경사 강의는 18세기 조선 학술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확고한 주자학적 학문관을 정위한 정조가 자신의 경학관을 관철시킨 결과물이지만, 한편으로는 군신 간 지식 격차로 인한 지나친 교도 가능성과 정조의 학술적 자신감에서 비롯된 독단적 해석의 여지도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경사 강의를 통해 육성된 정약용, 윤행임, 서유구 등의 학자들의 등장은, 이 저술이 18~19세기 조선 경학의 중요한 분수령임을 보여 준다.
근래 발견된 심대윤(沈大允)의 경학 관련 자료로는 『대학고정』, 『시경집전변정』, 『서경집전변정』, 『춘추사전속전』 등이 있다. 이외에도 그의 사상을 집약한 『복리전서』 44권, 역사서인 『동사』 6권, 『전사』 58권, 문집류인 『백운시초』 3권과 『한중수필』 2권 등이 전해지며, 지금까지 발견된 저작물은 총 120여 권에 이른다.
심대윤의 사상은 수공업과 상업 등 실생활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으로, “학문을 인간의 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시킨 실학사상가”로 평가된다. 동시대의 최한기(1803~1875)가 기철학을 통해 실학을 완성하였다면, 심대윤은 공리주의 사상을 통해 실학을 현실에 접목시킨 학자였다. 특히 그의 경학 사상은 인간의 이욕을 긍정하고 공리(公利)를 강조하며, 현실적인 인간의 욕망을 수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심대윤은 19세기 서학과 대응하는 조선 경학의 중요한 한 축으로 주목할 만하다.
박문호의 『시집전상설』이 『시집전』의 체제와 해석 구도 안에서 『시경』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면, 김황(金榥)의 『시경여의』는 『시집전』의 체제와 해석 구도에 대한 의문과 검토 과정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석정 이정직의 『시경』 접근법은 모시, 정현, 공영달의 주석과 주자 『시집전』 간의 비교와 변별을 중심으로, 주자 시경학의 ‘절충(折中)’의 면모에 주목하였다. 반면, 김황의 『시경』 접근은 주자 시경학에 내재한 회의정신(懷疑精神)과 신중한 궐의(闕疑)의 태도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시설(詩說)을 비판적 · 회의적으로 검토하며 ‘절중(折中)’에 주목하였다. 특히 김황이 정약용의 시설을 다른 전통 시경학자들의 설과 동등한 위치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한 점은, 조선시대 『시경』 읽기가 한국 근대 시기를 거쳐 현대까지 적극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주2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도 상당한 경학 업적을 남겼다. 이원조(李源祚)는 『성경(性經)』을 편찬하였고, 이진상(李震相)은 『춘추집전(春秋集傳)』과 『춘추익전(春秋翼傳)』을 저술하여 『춘추』 연구를 체계화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은 『다전경의답문(茶田經義答問)』을, 김황은 오경과 사서, 그리고 『소학』을 각각 1도(圖)씩 도상으로 체계화하여 『경학십도(經學十圖)』를 편찬하였다. 또한 이항로는 『주역전의동이석의(周易傳義同異釋義)』, 송병선(宋秉璿)은 『근사속록(近思續錄)』, 김평묵(金平默)은 『근사록부주(近思錄附註)』, 기정진(奇正鎭)은 『답문유편(答問類編)』, 전우(田愚)는 『대학기의(大學記疑)』 등을 저술하여 조선 후기 경학 연구를 체계화하였다.
조선조의 춘추학 저서로는 이항복(李恒福)의 『노사영언(魯史零言)』, 이유장(李惟樟)의 『춘추집주(春秋輯註)』, 박세채(朴世采)의 『춘추보편(春秋補編)』, 정약용의 『춘추고징(春秋考徵)』, 심대윤의 『춘추사전속전』과 『춘추사전주소초선(春秋四傳註疏抄選)』, 이진상의 『춘추집전』, 서수석(徐壽錫)의 『춘추전주초찬(春秋傳註抄纂)』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이 저서들은 기존 춘추 이론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 각자의 독창적인 주장을 펼친 역작으로 평가된다. 특히 저자들은 주장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이론을 인용하거나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론을 비판하거나 분석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 이유장의 『춘추집주』에서는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두예의 『춘추좌전경전집해』, 호안국의 『춘추전』, 장흡의 『춘추집주』, 고항(高閌)의 『춘추집주』, 조방(趙汸)의 『춘추집전』, 호광 등의 『춘추집전대전』 등 대표적인 춘추 주석서를 거의 망라하고 있다. [^3]
또한, 『춘추』와 관련한 주희의 저작이 없었던 점은 오히려 주자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논의를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조선 학자들이 주자학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때 보여줄 수 있는 학술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