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

대동여지도 중 전라북도 완주, 전주 부분
대동여지도 중 전라북도 완주, 전주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시.
정의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시.
개관

주변은 대부분이 완주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서남쪽의 일부가 김제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59′∼127°14′, 북위 35°43′∼35°53′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205.57㎢이고, 인구는 65만 228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구 33개 행정동(83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노송동에 있다.

자연환경

노령산맥과 만경평야의 경계부에 위치하여, 시의 남쪽에는 북동∼남서방향으로 모악산(母岳山, 794m)·고덕산(高德山, 603m)·묵방산(520m) 등의 노령산맥에 속하는 산지가 완주군과 경계를 이룬다. 시내에는 기린봉(麒麟峰, 306m)·남고산(南固山, 273m)·완산칠봉(完山七峰, 163m)·다가산(多佳山)·홍산(洪山, 216m)·천잠산(天蠶山, 153m)·남고산(南固山, 273m)·건지산(乾止山) 등의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시가지는 시의 남동쪽에 있는 기린봉·남고산·완산칠봉·다가산 등의 구릉지에 둘러싸인 전주천의 충적평야에서 시작하여 전주천 유역을 따라 북서쪽으로 점차 발달하였다. 기반암은 편마상화감암이 넓게 분포하며 대부분 지역은 풍화·침식되어 낮은 지대를 이루지만 남쪽에서 모악산·고덕산 등의 산지를 이루기도 한다.

남동쪽의 기린봉 주변 산지는 전주통으로 불리는 변성퇴적암인데, 승암산(僧巖山)에서 고산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규암이 노출되어 특이한 경관을 이룬다. 중앙의 홍산과 가련산 일대에는 석회암 등으로 이루어진 옥천층군의 변성퇴적암이 일부 분포하고 있다. 서부와 북부에는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이 넓게 분포하며, 이는 변성퇴적암의 분포지역보다 고도가 낮다.

만경강 본류는 북쪽에서, 소양천은 동쪽에서 각각 완주군과 경계를 이룬다. 시의 중앙에는 만경강의 지류인 전주천과 삼천천(三川川)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류하고 있다. 시가지의 중앙을 흐르는 전주천은 완주군 상관면과 임실군 관촌면의 경계인 슬치(瑟峙)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완주군 구이면 백여리 새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삼천천과 서신동에서 합류하여 추천(楸川)을 이룬 다음 삼례읍에서 만경강과 합류한다. 전주천과 삼천천의 충적평야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점차 넓어지다가 만경강 유역의 만경평야에 이어진다.

기후는 남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한다. 연평균기온 13°C, 1월 평균기온 -0.3°C, 8월 평균기온 27°C이며, 연강수량은 1,300㎜ 내외이다.

역사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해안지대인 고창·부안에 밀집하여 있다. 그것이 만경강·동진강을 거쳐 내륙지방까지 산재해 있는 것을 볼 때, 이 지방에도 초기의 농경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백제가 이 땅을 영유하면서 완산(完山)이라고 불렸다.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나 11년 뒤에 주가 폐지되었다. 백제시대의 완산은 아직 지방 행정도시로는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된 뒤 신라에 병합되어 685년(신문왕 5) 완산주가 다시 설치되었고 용원(龍元)을 주의 총관(摠管)으로 임명하면서부터 전주는 전라북도지방의 행정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뒤 757년(경덕왕 16)에 주군현의 명칭이 바뀔 때, 현재의 이름인 전주로 바뀌었다. 그 당시 전주는 1주 1소경 10군 31현을 통치하였다. 또한, 전주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의 중심지로서 완산정(完山停)이 있었다. 군사의 배치규모로 보아 한산정(漢山停: 현재의 서울지역) 다음으로 중시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5교 9산 중의 하나인 경복사(景福寺)는 열반종(涅槃宗)의 근본도량으로 이 지방 불교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892년(진성여왕 6)에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여 전주에 도읍하였으며, 936년 태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후백제의 국도가 되었다.

936년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이 지방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으나, 4년 뒤에 다시 전주로 개칭하였다. 983년(성종 2)전주목이 설치되어 지방관 파견과 함께 경학박사와 의학박사가 파견되어 지방의 문화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993년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가 두어졌고, 2년 뒤에 전국이 10도 12주로 나뉠 때 강남도(江南道)에 속하게 되어 순의군(順義軍)이라 칭해졌다. 그 뒤 1005년(목종 8) 전주절도사가 파견되었다.

1018년(현종 9) 전국적인 지방제도 개편 때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개칭되었으나, 1022년 다시 전주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전주목은 전라북도지방의 계수관(界首官)으로서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다. 1012년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에 파천하였다가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에서 7일간 머무르기도 하였다.

1182년(명종 12) 무인집권기에 하극상 풍조가 만연하는 등 사회가 혼란해지자 전주성에서 죽동(竹同)을 중심으로 한 관노들의 난이 일어났다. 1355년(공민왕 4)에는 전라도안렴사였던 정지상(鄭之祥)이 원나라의 어향사(御香使)인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감금시킨 사건으로 인해 부곡으로 강등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완산부로 승격되었다.

1380년(우왕 6)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다가 오목대(梧木臺)에서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1388년 안찰사 최유경(崔有慶)이 전주부성을 쌓았다. 고려시대의 전주는 호남지방의 인후부로서 전공주도(全公州道)와 산남도(山南道)에 속한 많은 역참(驛站)이 있었던 교통상의 요지였다.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자,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즉 왕의 고향으로 중시되어,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되었고 부윤은 전라도관찰사가 겸하였다. 1403년(태종 3)전주부로 개칭되어 조선 말까지 변동이 없었으나, 관찰지역은 고려시대보다 축소되었다.

1410년 이성계의 화상을 봉안한 어용전(御容殿)이 창건되어 진전(眞殿)이라 불리다가 1442년경기전(慶基殿)으로 개칭되었다. 1439년(세종 21)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설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손홍록(孫弘祿)·안의(安義) 등이 태조의 어용과 전주사고의 전적(典籍)을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하다가 다시 묘향산(妙香山)으로 옮겼다. 현존하는 조선왕조실록이 바로 전주사고본이다.

1589년(선조 22)에는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 이복남(李福南)·황박(黃僕)·정담(鄭湛) 등이 웅치(熊峙)에서, 권율(權慄)·황진(黃進)·공시억(孔時億) 등이 이치(梨峙)에서, 경상도에서 전라도지방으로 넘어오는 왜군을 맞아 싸워 물리쳤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하여 경기전 등을 파괴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이 설치되었으며, 당시 전라감사였던 이시방(李時昉)은 호소사(號召使) 정홍명(鄭弘溟)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공주까지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어 파하였다.

1734년(영조 10) 부성을 개축하고 남문을 명견루(明見樓)라 불렀으며, 1767년 화재로 성문루가 소실되었는데, 남문·서문을 중건하여 풍남문(豊南門)·패서문(沛西門)이라 칭하였다. 1771년에는 조경묘(肇慶廟)를 창건하여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75년 완동문(完東門)·공북문(拱北門)을 준공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남고산성(南固山城)을 중건하였다.

1791년 천주교 신도였던 윤지충(尹持忠)은 천주교 의식에 따라 어머니의 장례를 지냄으로 인해 외종형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사형을 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 전주성이 일시 함락되기도 하였다. 1896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전주부는 전주군으로 개편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주면으로 되었다가 1931년 전주읍으로, 1935년 전주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1889년 프랑스인 신부 보드네윤(Baudounet尹)이 부임하여 이 고장에 천주교를 전파하였고, 특히, 1914년 7년 동안에 걸친 공사 끝에 전동성당이 준공되었다. 또한, 개신교의 교육사업도 활발하여 1901년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가 설립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3월 3일에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3월 13일에는 천도교·기독교 교도가, 14일에는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5월까지 모두 21회의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1929년에는 전주∼이리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백낙구(白樂九), 전주지방의 3·1운동을 지휘했던 김인전(金仁全), 천주교를 전교하다가 1866년 순교한 손선지(孫善智), 서예가 이광렬(李光烈)·최규상(崔圭祥) 등이 있다.

1949년 8월 15일 전주시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의 일부가 우아동에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색장리 일원과 용진면 산정리 일부가 전주시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 완주군 조촌읍이 전주시에 편입되었으며, 덕진출장소와 완산출장소 등 2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9년 완주군 용진면 금상리·산정리와 구이면 석구리·원당리·중인리·용복리가 편입되고 완산·덕진 출장소가 각각 구로 승격되었다. 1990년 8월 1일에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와 중리가 전주시 완산구 상림동과 중동으로 편입되었다.

1994년 12월 26일에 김제군 용지면 남정리 일부와 김제군 백구면 도도리·강흥리·도덕리가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도도동·강흥동·도덕동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4월 12일에 완산구 중화산동 일부가 효자3동으로, 덕진구 전미동 일부가 호성동으로 동간경계가 조정되었다. 1996년 2월 26일에 완산구 평화동이 평화1·2동으로 행정동 분동되었고, 같은 해 3월 4일에 완산구 경원동·태평2동·동완산동 일부를 완산구 중노송2동·다가동·서서학동으로 하는 동간 경계조정을 거쳤다. 같은 해 9월 1일에 완산구 중앙동·다가동·고사동이 중앙동으로, 완산구 경원동·풍남동·전동이 풍남동으로, 완산구 태평1동과 태평2동이 태평동으로 각각 행정동 통합되었다. 또한 같은 날에 완산구 중화산동이 중화산1동과 중화산2동으로, 덕진구 송천동이 송천1동과 송천2동으로, 덕진구 우아동이 우아1동과 우아2동으로, 완산구 삼천2동이 삼천2동과 삼천3동으로, 완산구 효자3동이 효자3동과 효자4동으로 각각 행정동 분동되었다.

1998년 8월 1일에 완산구 동서학동과 남고동이 동서학동으로, 덕진구 전미동과 송천2동이 송천2동으로 각각 행정동 통합되었다.

2000년 2월 21일에 완산구 효자동1가 일부를 삼천동1가로, 완산구 효자동2가 일부를 효자동1가로, 완산구 중동 일부를 상림동으로 하는 동간 경계조정이 있었다.

유물·유적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효자동 출토 동검과 남고산 기슭에서 전주교육대학교 교정으로 이전된 지석묘 등 선사시대 유물이 있다.

산성으로는 완산구 동서학동에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산성이라 전해지는 남고산성(일명 고덕산성. 사적, 1981년 지정)과 교동에 동고산성(전라북도 기념물, 1981년 지정)을 비롯하여,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방산성지(黃尨山城址)가 있다.

읍성지로는 조선 초 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이 축성하고, 1734년(영조 10) 조현명(趙顯命)이 개축한 전주읍성이 있었다. 이 성의 성문으로는 판동문(判東門)·상서문(相西門)·풍남문(豊南門)·중차문(中車門) 등 4개의 성문이 있었다. 현재는 3개의 문이 소실되었고, 남문만이 완산구 전동에 있다. 풍남문(보물, 1963년 지정)의 현판에는 ‘湖南第一城(호남제일성)’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사찰로는 완산구 동서학동에 668년(문무왕 8)에 명덕화상(明德和尙)이 창건했다고 하는 남고사지(전라북도 기념물, 1985년 지정), 교동에 동고사(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완산구 평화동에 1786년(정조 10) 광혜(廣惠)가 창건한 학소암(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의 불교문화재로는 전봉림사지(傳鳳林寺址)의 석조미륵여래삼존불상과 석등의 지대석 및 대좌,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석조여래좌상 및 목판에 새겨진 여래불적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있으며, 완산구의 서서학동석불입상(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덕진구의 인후동석불입상(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풍남동에는 조선태조어진(국보, 2012년 지정)과 경기전(사적, 1991년 지정)이 있다.

또한 덕진구 덕진동에 1771년(영조 47) 전국 유생의 상소로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사공(新羅司空)이한(李翰)과 부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단(전라북도 기념물, 1973년 지정)과 완산구 풍남동에 위판(位板)을 봉안한 조경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예종대왕태실 및 비(전라북도 민속문화재, 1986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완산구 교동에 이성계가 1380년(우왕 6)에 남원의 운봉 황산지역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그의 시조들이 살다 떠난 옛 고향이라 하여 주연을 베푼 곳인 오목대와 이목대(전라북도 기념물, 1974년 지정) 등 조선왕실의 관향다운 유적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완산구 중화산동에 1624년(인조 2) 창건되었고 1662년(현종 3) 사액되었다가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화산서원을 비롯하여 화산서원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완산구 동서학동에 반곡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완산구 효자동에 황강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인봉사(麟峰祠)·서산사(西山祠), 덕진구 조촌동에 용강서원(龍岡書院), 완산구 중인동에 청하서원(淸河書院) 등이 있다.

그리고 1603년(선조 36) 장만(張晩)에 의해 완산구 교동에 이건된 전주향교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전주향교일원(사적, 1992년 지정)이 있다.

그 밖에도 완산구 교동에 조선 태종 때 최담(崔霮)이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후손을 교육할 목적으로 지은 한벽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을 비롯하여, 완산구 효자동에 문학대(전라북도 기념물, 1976년 지정), 덕진구 호성동에 지행당(전라북도 기념물, 1973년 지정)이 있다.

완산구 중화산동에 천양정(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중화산동에 다가정(多佳亭), 서완산동에 군자정(君子亭), 중앙동에 매월정(梅月亭), 교동에 학인당(전라북도 민속문화재, 1976년 지정), 덕진구 팔복동에 추천대(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완산구 동서학동에 관성묘(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대성동의 전주이씨고림군파종중문서(보물, 1981년 지정)·전주이씨칠산군파종중문서(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덕진동의 전북대학교 박물관에는 전주부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영산재(국가무형문화재, 1973년 지정)가 있으며, 지방 무형문화재로는 판소리(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984년 지정), 향토술담기(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 가곡(전라북도 무형문화재, 2013년 지정), 판소리장단고법(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992년 지정), 선자장(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993년 지정), 시조창(전라북도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 호남살풀이춤(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의 부분이 각각 기능보유자를 지정하여 보존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완산구 삼천동의 곰솔(천연기념물, 1988년 지정)이 있으며, 노거수로는 668년 명덕화상이 남고사를 창건할 당시 심었다고 전하는 남고사의 느티나무, 전동의 회화나무, 전주최씨 종대(宗垈)의 은행나무, 조경묘의 가죽나무 등이 있다.

대성동의 이형부인동래정씨의복(국가민속문화재, 1980년 지정)이 있다. 건축물로는 완산구에 1914년 완공된 로마네스크양식의 전주전동성당(사적, 1981년 지정)이 있으며, 역시 천주교 관계 유적으로는 덕진구 진북동에 천주교순교지인 숲정이(전라북도 기념물, 1984년 지정)와 완산구 대성동에 천주교순교자묘(전라북도 기념물, 1984년 지정)가 있다.

그 밖의 문화재로는 1471년(성종 2) 전주부성과 함께 건축되었고 1473년(성종 4)에 개축된 전주객사의 풍패지관(보물, 1975년 지정)이 완산구 중앙동에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354년(공민왕 3)에 창건되어 1603년(선조 36)에 교동으로 이건한 전주향교가 있다. 서원으로는 효자동에 황강서원, 동서학동에 반곡서원, 중인동에 청하서원(淸河書院)이 있다.

그 밖에 1578년(선조 11)에 설립되어 1658년(효종 9)에 사액된 화산서원, 1649년(인조 27)에 설립된 여봉서원, 1669년(현종 10)에 설립된 한계서원, 1586년 설립된 서산서원(西山書院) 등이 있었으나 모두 철폐되었다. 희현당(希顯堂)·오대사(梧臺祠)·인봉사·예산사(禮山祠) 등도 역시 1868년에 철폐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전북공립소학교가 최초로 1897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전주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13년에 완산초등학교의 전신인 전주제이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00년에 일본어 교육을 목적으로 삼남학당이 설립되었고 일진회가 설립한 일진학교가 있었다.

사립해성보통학교는 천주교재단 경영으로 1891년 프랑스인 보드네윤신부가 교동에 여학교를 창설한 것에서 시작되어 1938년 해성국민학교로 개편되었고 1946년 전주성심여자초급중학교로 승격, 개편되었다.

중등교육으로는 전주신흥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전주신흥학교가 1900년 미국 예수교 남장로파 조선선교회에 의해 개교하였다. 1902년 여선교사 전킨(Junkin, W.)에 의하여 여자청년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를 모체로 1907년 기전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10년 전주농림고등학교의 전신인 전주공립농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9년 전주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하여 전주북중학교로 개명한 뒤 1952년 전주고등학교와 전주북중학교로 분리되었다. 그 뒤 1924년에 전주여자중학교가 1926년에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가 1936년에 전주사범학교와 전주공립중학교가 개교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8개교, 중학교 38개교, 고등학교 29개교, 특수학교 5개교 전북대학교·전주교육대학교·전주대학교·예수대학교·전주비전대학교·전주기전대학·한국농수산대학 등이 있다.

중요 문화행사로는 전주지방에 전승되어오고 있는 민속음악·무용·무예놀이 등의 전수보전에 크게 기여하는 전주대사습놀이, 매년 단오에 시민의 날과 함께 열리는 풍남제(豊南祭)가 있다. 그 외에 전주한지문화축제,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세계소리축제, 세계서예전전주비엔날레 등도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기접놀이·다리밟기·덕진연못물맞이·단오난장 등을 들 수 있다.

용기(龍旗)놀이라고도 불리는 기접놀이는 칠석이나 백중에 평화동과 효자동의 12개 마을 중 한 마을의 초청에 의해 거행된다. 주최마을에서 영기(令旗)를 가지고 초청할 마을에 가면 이에 응하는 마을은 동구에 영기를 하나 꽂아놓고, 불응하는 마을은 영기 두 개를 꽂아놓는다.

놀이날이 되면 주최마을에서는 참가 마을 수대로 손님맞이반을 짜 중간지점까지 마중을 나가서 손님마을의 농악대와 합류하여 풍물을 울리며 행사장소로 모인다.

놀이의 순서는 ‘농악경연’, 계주식으로 농기를 들고 모악산(母嶽山) 중턱을 돌아오는 ‘용기달리기’, 기재사(旗才士)들이 기펼치기·기높이들기·기내려깔기 등의 재주를 겨루는 ‘용기놀이’순이며 이 경연 결과로 마을의 순위가 다시 결정된다. 그러면 모두 모여 합굿놀이를 벌이고 주최마을은 전송굿을 하며 초청마을을 떠나보낸다.

기접놀이의 구성인원은 좌상(座上) 1명, 공원(公員) 1명, 기재사 1명, 기수 1명, 사동(使童) 1명, 장정 10명, 농악대 30명 등이고, 용기는 대나무로 된 기주(旗柱)에 가로 3m, 세로 5m인 흰 천에 용을 그린 것인데 중평마을의 것은 1895년(고종 32)에 만든 것이라 한다.

단오에는 부녀들이 덕진 연못가에서 목욕을 하는데 이를 덕진연못물맞이라 한다. 연못 주위에는 창포가 무성하고 수면은 연꽃으로 덮여 있어서 이것들의 뿌리나 잎이 삭아 물에 녹아 있기 때문에 약이 된다고 한다. 이 때가 되면 다른 지역에서도 찾는 사람이 많아 포장과 천막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성황을 이룬다.

또한 단오 무렵에는 난장이 벌어진다. 기간은 대개 5∼10일간인데 이 기간 동안 원근지역 사람들이 운집하여 축제분위기가 조성된다. 돼지머리를 제단에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난장이 시작되면 시전(市廛)의 상행위는 물론이고 씨름·윷놀이·투전 등의 놀이판과 농악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난장은 지방산물의 전시와 판매로 상업을 활성화하고 사람들의 위안과 오락의 장이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터를 누르고 판을 벌임으로써 제재개운(除災開運)한다는 신앙적 요소도 깃들여 있다.

이 고장의 동제로는 당산제가 있는데 현재는 호성동 초포(草浦) 배미실 마을에서만 유일하게 존속되고 있다. 마을 앞 당산에 제단이 있어 매년 정월 초이튿날 밤에 제물을 진설하여 놓고 제를 지내는데 이를 천제(天祭)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 주민들은 모두 농사에 종사하고 있고 아직 당산에 대한 신심이 깊어 제일이 다가오면 어육을 금하는 등 엄격한 금기를 지킨 뒤 정성을 다하여 제를 지내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한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설화로는 「대사퇴치설화(大蛇退治說話)」와 「금송아지바위전설」 등을 들 수 있다.

「대사퇴치설화」는 옛날 가난한 집에 한 처녀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비오는 날 두꺼비 한 마리가 부엌으로 들어와 나가지 않으므로 처녀가 밥을 조금씩 나누어주었더니 두꺼비는 점점 자라 개만큼 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큰 뱀이 있어 해궂이를 하는 통에 마을사람들은 매년 처녀를 한 명씩 제물로 바쳤는데, 그 해에 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려 하자 두꺼비는 처녀를 따라가서 큰 뱀과 서로 독기를 뿜으며 싸우다가 함께 죽고 처녀는 무사히 구출되었다. 이에 두꺼비를 고이 묻어주고 큰 뱀은 불에 태우니 석달 열흘 동안 탔다고 하며, 이후로는 마을에 재앙이 없어지게 되었다 한다.

이와 비슷한 유형으로 한벽당 아래에 있던 지네를 퇴치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완산칠봉 중의 하나인 옥녀봉 정상에는 송아지 모양의 큼직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금송아지바위라 하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금사당(錦絲堂)골 안에 금송아지 한 마리가 살았는데 골짜기를 한 발짝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산신령의 분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천상의 옥녀가 금송아지를 불러 목에 단 금새끼 실가닥 하나만 빌려주면 대신 옥단지에 천상의 감로수를 담아주겠다고 하였다.

이 말에 혹한 금송아지는 골 안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산신령의 분부도 잊은 채 옥녀봉으로 올라가 옥녀에게 금새끼 실가닥을 건네주려다가 그만 바위로 변하고 말았다 한다. 이후 철종 때 가난을 견디다 못한 석공이 금송아지바위 속에 혹시 금이 있을까 하여 바위를 깨려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몸져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밖에도 신행길에 가마꾼이 발을 헛디뎌 신부가 여울 속으로 빠지자 신랑이 이를 구하려다 함께 빠져 죽는 바람에 원앙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각시바위와 신랑바위 전설」이 있다.

이 고장에는 노동요보다는 비기능요로서의 타령류 혹은 잡가들이 널리 전승되고 있다. 특히 「춘향전」의 ‘옥중가’처럼 판소리의 한 대목을 노래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담바구타령」·「주머니타령」·「꿩타령」·「소상팔경」·「백발가」·「새타령」·「유산가」·「언문뒤풀이」 등이 널리 불리고 있다.

기능요로서는 「모내기노래」·「밭매기노래」·「물레노래」·「달구질노래」 등이 불리고 있다.

「달강달강요」는 어른들이 아이를 어르면서 부르는 노래로 “……나라에는 충신동이/부모에는 효자동이/형제간에 우애동이/일가친척 화목동이/하늘같이 높았거라/천하같이 넓었어라.”처럼 부른다.

해학적인 노래로 「방구타령」을 들어보면 “시아버지 방구는 호령방구/시어머니 방구는 요망방구/서방님 방구는 부끄럼방구/시악시 방구는 도둑방구/머슴 방구는 대포방구…….”처럼 부르는데, 방귀를 통해서 각 인물들의 성격적 특성을 드러내는 재치가 있다.

「달구질노래」는 집을 지을 때, 큰 돌을 매달아 여럿이 땅을 다지면서 부르는 노래로 한 사람이 지휘를 하면서 앞소리를 하면 여럿이 ‘어여라 달고’라는 뒷소리로 받는다. “……이터를 다듬어 누가 잡었냐/어여라 달고/무학선생이 터를 잡었네/어여라 달고·사대문 짓고서 대궐을 지어라/어여라 달고…….”처럼 조선왕조의 터전을 닦듯이 터를 닦자는 의도를 노래하고 있다.

이 고장에서는 「파랑새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새야 새야 파랑새야/어디갔다왔냐/위겁에다 날리새야/잎은피어 청산이고/꽃은피어 화산이고/댓잎솔잎 푸르푸르려다가 떠니/백설이 펄펄나네.”와 같다.

환갑잔치 때 부르는 「환갑노래」가 있는데 “맹자는 내녕감/회자(孝子)충신은 내아들/지반화채는 내며느리/천하일색은 내딸이요/장안의 호걸은 내사우라.”처럼 세상의 좋은 것을 모두 다 차지하라는 축원의 노래이다.

산업·교통

전통적으로 서부의 김제평야·만경평야를 배후지로 한 농업의 중심지였으나 오늘날에는 도시화로 농업기능은 약하다.

2008년 현재 농가인구는 5,896명이며, 경지면적은 5,859㏊이고 이 중 논은 4,278㏊이다. 농업은 여의동·조촌동·전미동·호성동·우아동·평화동·삼천동·효자동 등 완주군과 인접한 변두리지역에서 주로 행해진다. 이들 지역에는 백석저수지·아중저수지 등이 있어 농업용수를 제공해주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옥수수·콩 등의 식량작물이다. 이 외에 복숭아·배·포도 등의 과수, 미나리·생강·파·고추 등의 양념채소, 화훼 등이 근교농업으로 약간 생산된다. 전주백도로 유명한 복숭아는 과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전주배를 이용한 이강주(梨薑酒)가 향토주로 생산되고 있다.

1992년까지 고령토를 생산하던 몇 개의 광산이 거의 모두 폐쇄되었으나 2004년에 다시 조금 생산되기도 하였다. 공업의 발달은 부진한 편이지만, 1969년에 팔복동에 전주제1공단이 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공업발전이 시작된 뒤, 1987년에는 제2공단이 그 서쪽에, 1990년대에는 전주제3공단이 완주군 봉동읍에 조성되면서 비교적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음식료·섬유·의복과 종이산업 등의 업종이 발전했다. 섬유산업은 화학섬유를 생산하는 ㈜삼양사와 면방직제품을 생산하는 ㈜대한방직 등을 중심으로, 의복산업은 ㈜백양과 ㈜쌍방울 등의 국내 유수의 내의생산업체를 중심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업체는 1980년대 후반 이후로 임금상승과 후발개도국의 성장으로 경쟁력이 약화되어,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 업체와의 하청거래에 주로 의존하던 중소기업들은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

신문용지를 중심으로 전국 생산량의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는 종이산업은 ㈜한솔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경공업의 쇠퇴에 비해 그 동안 발전이 부진했던 중화학공업은 1990년대 초에 제3공단에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입주하면서 비교적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에 인접한 완주군과 김제시 지역에도 많은 부품공장들이 입지하고 있다.

아직은 공업발전이 전국에 비해 미진하지만 이들 산업의 성장과 함께 앞으로 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오랜 문화적 전통과 함께 예로부터 한지·화선지·태극선·합죽선 등의 전통수공업이 발전하여 오늘날에도 중요한 특산품으로 생산되고 있다. 한지는 전국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주제1공단에는 한지협동단지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전라북도 서부 평야지방과 동부 산간지방의 경계지점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상업 중심지였다. 상업활동은 조선시대에 성 4대문 밖에 모두 시장이 있어 동·북문밖장은 음력 4·9일에 서·남문밖장은 2·7일에 각각 개시되었다. 일제시대에 이들 시장들은 점차 쇠퇴하다가 1923년에 상설시장인 남문시장으로 흡수되었다. 남문시장은 오늘날에도 전주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이지만 그 기능은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다.

현재에는 1948년에 개설된 중앙시장을 비롯하여 동부시장·북부시장·서부시장 등 총 10개소의 상설시장이 시가지 확장과 함께 개설되어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고 있다. 또한 이들 재래시장과 함께 백화점·연쇄점·대형할인매장 등의 현대적 유통망이 소비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도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원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도심상가 외에 효자동·금암동·서신동 등에 새로운 상업중심지가 형성되었다. 송천동에 전주농수산물 종합시장이 있다. 조선시대에 개설되었던 우시장과 약령시는 일제시대에 폐쇄되었다. 최근 시에서는 매년 약령시제전을 열고 있다.

전라북도 서부 평야지방과 동부 산간지방의 경계지점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고, 오늘날에도 전라북도의 각 시·군으로 연결되는 국도를 중심으로 많은 지방도가 개설된 전북의 교통요충지이다. 전주·익산·군산간의 도로는 1907년에 개설된 뒤 4차선 고속화도로로 확장되었다. 전주·임실·남원간, 전주·김제·부안간, 전주·진안·무주간의 도로도 4차선 고속화도로로 확장되었다.

이 밖에 전주·봉동·금산간, 전주·정읍·고창간의 도로가 있다. 국도 1호선인 전주·정읍·장성간의 도로는 호남고속도로 노선과 연결되는 일부 구간이 4차선화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1936년 개통된 익산∼여수간의 전라선철도와 1973년 개통된 대전∼순천간의 호남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관광

이 시는 동쪽 노령산지의 명승경관과 서쪽 해안의 명승경관을 끼고 그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에 명승지가 많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로 많은 유물유적을 보유하여 자연경관의 관광뿐만 아니라 역사유적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 산지와 해안의 관광명소를 찾는 이들이 전주를 거쳐 가는 일이 많아 연계관광지를 개발하면 관광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다.

시의 관문인 호남제일문을 지나 덕진에 이르면 덕진호반과 조경단, 어린이의 집, 동물원, 체련공원에 이르러 울창한 숲속에서 야유회를 즐길 수 있다. 덕진호반을 중심으로 시민공원인 덕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전주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가공원을 지나 완산칠봉에 이르면, 그 정상에 전주시가지와 모악산과 넓은 들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팔각정에 도달한다. 동남쪽의 시의 관문인 남고산에는 후백제견훤이 축조하였다는 남고산성이 있고 건너편에 천주교의 성지가 있어 찾는 이가 많다.

남고사에서 울려퍼지는 저녁 종소리와 전주천이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남대천(전주천)을 건너 한벽루를 지나 기린봉에 올라 전주시를 조망하면, 교동·풍남동·전동 일대의 전통 한옥군이 장관을 이룬다.

1999년 교동ㆍ풍남동 일대를 전통문화특구로 보존하기 위한 사업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으로 면적 298,260㎡에 ‘전주한옥마을’이 조성되었으며, 현재 947동의 건물 중 735동의 한옥을 보존하고 있다. 2012년 국보로 지정된 조선태조어진을 비롯해 전주 경기전(사적, 1991년 지정), 전주 전동성당(사적, 1981년 지정), 전주향교(사적, 1992년 지정) 등 사적 3종, 전주 풍남문(보물, 1963년 지정) 등 보물과 도 지정 문화재 3종이 있다. 2018년 현재 1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전주한옥마을은 조선조 시조의 본향이자 각종 현대적 문화행사가 제공되는 역사문화관광의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기린봉 밑 발산의 이목대와 오목대를 지나 시가지로 내려오면 경기전·풍남문·객사 등 조선시대의 문화권에 쉽게 접하게 된다. 시내에는 호텔 3개를 포함한 숙박시설과 각종 편의시설 및 전통음식을 즐길 수 있는 요식업소들이 갖추어져 있어 여정을 만끽할 수 있다.

전주는 전통의 고장, 국악의 고장, 맛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덕진공원부근에 국악당이 있고 전주대사습놀이, 농악경연대회 등이 해마다 열리고 풍남제가 열리고 있다. 전통음식이 유명하고 전주십미(全州十味)라 하여 파라시·열무·녹두묵·서초·애호박·모래무지·게·무·콩나물·미나리로 조리한 음식이 유명하다.

전주십경으로는 기린토월(麒麟吐月)·한벽청연(寒碧晴煙)·남고모종(南古暮鍾)·다가사후(多佳射帿)·비비낙안(飛費落雁)·덕진채련(德津採蓮)·위봉폭포(威鳳瀑布)·동포귀범(東浦歸帆) 등 전주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고 있다.

시에서는 현재 전통문화체험여행, 문화유적답사, 자전거여행 등의 테마여행을 마련하여 집중홍보하고 있다.

  1. 덕진구(德津區)

시의 북부에 위치한 구. 면적 110.92㎢, 인구 28만 6677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진북동이다. 본래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던 완주군 및 전주면의 일부 지역이다. 1931년 전주면이 읍으로, 1935년에는 전주부로 승격되어 완주군과 분리되었다.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된 뒤 1957년에 완주군 초포면·우전면 일원과 조촌면·용진읍의 일부가, 1973년·1983년에 각각 용진읍 일부가, 1987년에는 완주군 조촌읍이, 1989년에는 용진읍 일부가 편입되었다. 1988년 덕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에 덕진구로 승격되었다. 1994년 김제군 용지면·백구면 일부가 편입되었다.

1996년 9월 2일에 송천동이 송천1동과 송천2동으로 , 우아동이 우아1동과 우아2동으로 각각 행정동 분동되었고, 1998년 8월 1일에 전미동과 송천2동이 송천2동으로 행정동 통합되었다.

동서가 긴 형태로, 동남부의 우아동 일부는 묵방산과 기린봉 등의 산지를 이룬다. 나머지 대부분은 해발고도 50m 이하인 낮은 평야지대이며, 그 사이 사이에 나지막한 구릉들이 분포해 있다. 이들 구릉지 가운데 덕진동의 건지산 일대는 시의 대표적인 공원지구로 덕진공원이 있다.

구의 남부 중앙에서 전주천과 삼천천이 합류하여 이룬 추천(楸川)이 구의 중앙을 북류하여 만경강으로 흘러든다. 동부에서는 묵방산(521m) 서쪽 기슭에서 발원한 아중천이 소양천과 합류한 뒤, 완주군 용진읍과 경계를 이루면서 만경강으로 흘러든다. 기린봉 북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전주천으로 유입하는 모래내는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부분이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조촌동·여의동·전미동·호성동·우아동 등의 만경강·소양천·추천 유역은 낮은 충적지대로 농경지로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아중저수지·백석저수지·기지제 등의 관개용 저수지가 있다. 주변의 구릉지에서는 과수와 채소 등의 근교농업이 행해진다.

조선시대에 전주부성(府城)의 외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전주역이 위치해 있던 서노송동(2005년 완산구로 이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시가지의 대부분이 해방 이후에 발달하였다.

시가지의 확장은 1980년대 이후에 택지개발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981년에 시의 중심부를 통과하던 전라선철도의 외곽 이전 공사가 완료되고 전주역이 우아동으로 이전된 후, 전주역과 팔달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인 백제로를 중심으로 우아동·인후동·금암동 지역에 대규모 택지가 개발되었다. 도로변에 완주군청을 비롯한 많은 관공서와 기업체의 이전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업무지구를 형성하였다. 최근에는 호남고속도로 전주인터체인지와 완산구 색장동을 연결하는 동부우회도로가 완공되면서 이 일대 지역의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져 새로운 주택지구가 형성되고 있다.

1970년대까지도 전주공단을 중심으로 중심 시가지와 분리되어 발달하였던 팔복동지역은 그 사이에 위치한 덕진동지역의 발달과 함께 연속된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건지산 북쪽의 송천동 지역도 1990년대에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주택지구의 발달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구의 북쪽으로는 완주군 조촌읍이 전주시로 편입되면서 읍의 중심지였던 동산촌이 중심 시가지와 분리된 시가지로 발달하게 되었다. 시가지의 발달이 비교적 일찍 이루어졌던 서노송동(2005년 완산구로 이관)·금암동·진북동 지역에서는 철도·공장·창고 등이 이전되고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상업지구와 주택지구 등이 형성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금암동·덕진동·인후동·우아동지역으로의 시가지의 외연적 확장과 함께 새로운 중심지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상업중심지는 구의 남부지역으로 전주시청이 입지한 서노송동(2005년 완산구로 이관) 지역은 시의 중심업무지구에 포함되었고, 덕진동·금암동에는 미약하지만 부심의 형성이 진행되고 있다.

재래시장으로는 모래내·금암·우아시장 등이 있고, 현대적인 유통시설로는 신주택지를 중심으로 대규모 할인점·주상복합상가 등이 형성되어 있다. 송천동에는 도매유통시설인 농수산물종합시장이 있다.

교통은 대체로 원활한 편이다. 시가지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는 남북으로 통과하는 팔달로·기린로와, 동서로 통과하는 백제로가 있다. 시가지의 외곽에는 동·서에 각각 외곽순환도로인 동부우회도로와 서부우회도로가 있다. 구의 서쪽에는 호남고속도로가 통과한다. 전라선 철도는 북서∼동남방향으로 구의 외곽을 동부우회도로와 나란히 통과하고 있다.

관광위락시설로는 덕진공원·전주동물원·체련공원 등이 있다. 덕진공원은 시의 대표적 공원으로 덕진호반의 연꽃이 유명하며, 전주이씨의 시조묘소인 조경단이 있다. 문화유적은 여래불적도·전주부지도·조경단 등이 있다.

서노송(西老松)·진북(鎭北)·인후(麟後)·덕진(德津)·금암(金巖)·팔복(八福)·우아(牛牙)·산정(山亭)·금상(今上)·호성(湖城)·전미(全美)·송천(松川)·화전(花田)·용정(龍亭)·성덕(聖德)·반월(半月)·원(院)·남정(南井)·도도(道道)·강흥(江興)·도덕(道德)·고랑(古浪)·여의(如意)·장(長)·만성(萬成) 등 26개 법정동과 17개 행정동이 있다.

  1. 완산구(完山區)

시의 남부에 위치한 구. 면적 94.65㎢, 인구 36만 5605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효자동이다. 본래 전주군 전주면 지역으로 1931년 읍으로, 1935년 부로 승격되었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1957년에 완주군 우전면 일원과 상관면 일부가, 1983년에는 상관면 대성리·색장리 일원이, 1989년에는 구이면 중인리·용복리·석구리·원당리가, 1990년에는 이서면 상림리·중리가 각각 편입되었다. 1988년완산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에 완산구로 승격되었다. 인구 증가와 함께 구의 남서부지역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면서 1995년효자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6년 2월 26일에 평화동을 평화1동과 평화2동으로 행정동 분동하였고, 같은 해 9월1일에 중앙동·다가동·고사동이 중앙동으로, 경원동·풍남동·전동이 풍남동으로, 태평1동과 태평2동이 태평동으로 각각 행정동 통합되었다. 또한 같은 날에 중화산동이 중화산1동과 중화산2동으로, 삼천2동이 삼천2동과 삼천3동으로, 효자3동이 효자3동과 효자4동으로 각각 행정동 분동되었다.

1998년 8월 1일에 동서학동과 남고동이 동서학동으로 행정동 통합되었으며, 2000년 2월 21일에 효자동1가 일부를 삼천동1가로, 효자동2가 일부를 효자동1가로, 중동 일부를 상림동으로 하는 동간 경계조정이 있었다.

구의 남부에는 노령산맥의 줄기인 고덕산·모악산 등의 높은 산지가 김제시·완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그 북쪽으로 이들 산지의 끝자락인 기린봉·승암산·남고산·완산칠봉 등의 산지가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들 산지는 예로부터 남쪽지방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천연적인 요새 역할을 하였으며, 남고산과 승암산에는 각각 남고산성과 동고산성이 있다.

서부에는 천잠산·천장봉·황방산(또는 홍산) 등 해발고도 150∼200m의 구릉성 산지와 해발고도 50m 내외의 구릉이 넓게 발달해 있다. 구의 중앙에는 다가산·태극산·서산 등의 구릉이 전주천 서안에 분포해 있다. 중심시가지와 인접한 이들 구릉지는 다가공원 등 공원지역으로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전주천은 구의 남동쪽에서 북류하다가 승암산과 남고산 사이의 좁은 계곡인 좁은목에서 서쪽으로 크게 유로를 바꾸어 흐르며, 다시 다가산 앞의 완산교 부근에서 유로를 바꾸어 북류하다가 삼천천과 합류한다.

전주시의 발전은 전주천과 기린봉 사이의 저지대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전주부성(全州府城)이 위치했던 곳이다. 삼천천은 완주군 구이저수지에서 북류하다가 모악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중인천과 합류한 뒤 북류하여 전주천과 합류한다.

삼천천 유역의 충적지에서는 논농사가 행해지며, 주변의 넓은 구릉지에서는 과수·채소재배 등의 근교농업이 행해진다. 이 구는 조선시대에 전주부성이 위치해 있던 곳으로 전주시의 중심업무지구가 발달해 있다. 중심업무지구는 부성이 위치했던 전동·다가동·중앙동·고사동·경원동·풍남동과 태평동 그리고 서노송동 일부 지역으로, 도청·경찰청·은행·백화점 등 각종 관공서·사무실·상가 등이 밀집해 있다. 현재 전북도청, 전북경찰청, 농어촌공사, KBS 전주방송총국, 전북체신청 등 관공서와 공공기관은 효자동에 있다.

중심업무지구를 통과하는 간선도로인 팔달로와 충경로(또는 관통로)의 교차지점인 관통로사거리 주변은 전주시의 최고지가지대이다. 역사가 오랜 다른 도시와는 달리 중심업무지구는 직교상 가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1906년 성곽을 철거하고 근대적인 도시계획에 따라 시가지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중심업무지구 주위의 풍남동·교동·노송동·서학동·완산동 등은 주거지역으로, 단독주택을 중심으로 한 저밀도 주거지역으로 주로 이루어져 있다. 경기전·향교 등 조선시대의 유적이 많은 교동 일대는 1977년 한옥보전지구로 지정하여 전통경관을 보전하고 있었으나, 주민생활의 불편이 커 1997년 한옥보전지구를 해제하고, 전통문화특구로 지정하여 전통문화지역으로 개발하였다.

이상의 지역을 제외한 전주천 서쪽과 남쪽지역은 주로 1980년대 이후에 조성된 신시가지이다. 신시가지의 발전은 1970년대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개발된 효자동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효자동·삼천동·서신동·중화산동·평화동 일대에는 대단위 아파트단지·개인주택단지가 형성되었다. 현재에도 택지개발을 중심으로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

1990년대에는 신시가지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는 반면, 전동·다가동·중앙동·고사동·경원동 등 기존의 중심 시가지의 인구는 감소하는 인구공동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삼천천 서쪽의 서부신시가지로 도청 등 관공서의 이전도 이루어질 계획이므로 이러한 이심화현상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재래시장으로는 전주의 대표적 시장으로 조선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동부시장·서부시장, 서노송동의 중앙시장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전주객사 일대에서는 은기(銀器)·목재가구·부채·죽세공품 등의 제조가 활발했으며, 오늘날에는 합죽선·태극선 등 전주부채는 특산품으로 꼽힌다.

구의 중심부는 간선도로인 팔달로·충경로를 제외하고는 노폭이 좁아 교통이 혼잡한 편이다. 중심업무지구의 외곽도로인 서천로·기린로는 중심부의 교통혼잡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구의 외곽을 통과하는 간선도로로는 백제로와 동부순환도로가 있다. 서부신시가지를 통과하는 백제로 주위에는 사무업무기능과 상업기능의 집중이 나타나기도 한다.

문화유적은 풍남문·객사·향교·경기전·오목대·한벽당·남고산성 등이 있다. 효자동에 전주국립박물관이 있으며, 교동에는 동학혁명기념관과 강암서예관이 있다.

중앙(中央)·경원(慶園)·풍남(豊南)·전(殿)·다가(多佳)·고사(高士)·교(校)·태평(太平)·중노송(中老松)·남노송(南老松)·동완산(東完山)·서완산(西完山)·동서학(東棲鶴)·서서학(西棲鶴)·중화산(中華山)·평화(平和)·석구(石九)·원당(院堂)·대성(大聖)·색장(色長)·서신(西新)·삼천(三川)·중인(中仁)·용복(龍伏)·효자(孝子)·상림(上林)·중(中) 등 27개 법정동과 23개 행정동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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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www.jeonbuk.go.kr)
통계청(nso.go.kr)
전주시(www.jeonju.go.kr)
집필자
최창조·이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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