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각은 왕릉 앞에 지어진 ‘丁’자형의 제사 건물이다.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향로와 어로가 있다. 향어로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연원은 고려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대부분이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5칸 정자각이다. 숭릉·익릉·휘릉·의릉 정자각만이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8칸인데 이는 광릉에서 시작되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정자각은 숭릉, 익릉, 휘릉, 의릉 정자각만이 정전 5칸에 배위청 3칸이 덧붙은 8칸 정자각이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5칸 정자각이다. 그러나 1674년 영악전의 기능이 통합되면서 8칸 정자각이 보편화되었던 시기도 있으며, 18세기 후반에는 퇴구(退構) 공간이 정전 안으로 들어오면서 정전의 남북 폭이 커지다가 제구(祭具)가 규격화되면서, 1800년부터는 지금과 같은 정전 남북 폭이 24척로 규격화하고 규모는 5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를 참고하면 정자각은 17세기 초에는 모두 5칸이며, 8칸 정자각은 1673년 효종의 영릉(寧陵)을 천릉(遷陵)할 때부터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46년 소혜왕후의 영릉(英陵)을 지을 때는 8칸으로 지었던 기록이 있다. 또 광릉(光陵) 정자각은 정전 좌우와 배위청에 각각 한 칸씩 달아내어 모두 8칸이 되었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8칸 정자각은 광릉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효종 영릉의 천릉(1673)시에 이를 모방하여 8칸 정자각을 지었으며, 이듬해에 지어지는 현종의 숭릉도 8칸 정자각으로 하였고 1680년 인경왕후의 익릉, 1683년 명성왕후의 숭릉, 1688년 장렬왕후의 휘릉, 1701년 인원왕후의 명릉, 1724년 경종의 의릉에서 8칸 정자각은 이어져 갔다.
1674년에는 흉례인 영악전 기능이 정자각에 흡수되면서 정자각 규모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이때는 5칸, 8칸의 문제보다는 제구를 설치하기 위한 정전의 남북 폭이 문제가 되었다. 이후 제구의 크기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규격화하여 1800년부터 지금과 같은 정전의 남북폭이 24척인 5칸 정자각이 정착되었다.
규격화된 5칸 정자각은 대개 초익공과 이익공을 사용한 익공계 건물이고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다. 정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이며 내부에는 고주가 없는 2평주5량가 형식이고 양측면은 3평주5량가로 구성하였다. 배위청은 삼량가 맞배지붕으로 박공면에는 모두 풍판(風板)을 설치하였다. 정전과 배위청 바닥에는 모두 방전을 깔았으며 배위청은 사방이 트여있다.
흉례시에는 정전 쪽 한 칸을 임시로 창호로 막아 사용했지만 길례와 평상시에는 트여있는 것이 보통이다. 정전은 전면 3칸은 모두 분합문을 달며 뒤쪽은 어칸만 분합문을 달고 양쪽 협칸과 측면은 화방벽을 설치한다. 지금은 내외부 벽은 모두 단청으로 마감했으나 의궤 기록에는 내부벽은 모두 백릉화지를 바르고 청릉화지로 띠를 돌렸다. 외부는 중방이상은 단청을 하고 이하는 화방벽을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