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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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왕비. 계비.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예송논쟁
  • 본관양주(楊州)
  • 사망 연도1688년(숙종 14)
  • 성별여성
  • 출생 연도1624년(인조 2)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송정현 (전남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구리 동구릉 중 조선 장렬왕후 휘릉 우측 전경 미디어 정보

구리 동구릉 중 조선 장렬왕후 휘릉 우측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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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왕비. 계비.

개설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아버지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어 효종의 잠저인 의동본궁(義洞本宮)에서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자의(慈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입어야 할 복상(服喪) 문제가 정치문제화되었다. 당시 집권파인 서인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에 따라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이듬해인 1660년(현종 1) 남인 허목(許穆) 등이 그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며 서인을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고 인조의 둘째 왕자이므로 계모인 그의 복상은 기년설이 옳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에 남인 윤휴(尹鑴)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끝내 기년설을 고집해 기년복은 그대로 지켜지고, 서인 세력이 더욱 공고해졌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 장씨(仁宣大妃張氏)가 죽자 다시 서인과 남인 간에 그의 복상문제가 재연되었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을, 남인은 기년설을 각각 주장했다. 이 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 정권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64세를 일기로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죽었다.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시호는 자의공신휘헌강인정숙온혜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王后)이다. 능호는 휘릉(徽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참고문헌

  • - 『인조실록(仁祖實錄)』

  • - 『효종실록(孝宗實錄)』

  • - 『현종실록(顯宗實錄)』

  • - 『숙종실록(肅宗實錄)』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선원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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