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년(효종 2) 세자빈에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에서 가례를 올렸다. 8년간 세자빈으로 생활하고, 1659년(현종 즉위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적극적인 성격으로 때로 조정의 일에 깊이 관여하였다.
1675년 숙종 즉위 초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삼형제가 궁녀를 간통하였다는 사실을 눈물로 알려 ‘ 홍수의 변(紅袖之變)’이 일어났다. 숙종은 삼형제를 유배 보냈으나 얼마되지 않아 풀어주었다. 그러나 5년 후 이 사건 처벌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입장 차이로 경신환국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0년 10월 며느리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튼튼히 한다는 명목으로 7개월 만에 계비 인현왕후를 맞아들였다. 또한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던 궁녀 장씨[희빈 장씨]를 경계하여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등 대비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하였다.
1683년 10월 숙종이 두창을 앓을 때 쾌유를 기원하며 날마다 찬물로 재계(齋戒)를 하였는데, 이것이 병이 되어 결국 그해 12월에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송시열의 지문에 의하면 죽기 전에 ‘초상부터 묻을 때까지 쓸 제구를 내가 다 만들었으니, 다시 유사(有司)를 번거롭히지 말고, 중외에서 진향하는 것도 다 멈추고, 아침 · 저녁 궤전(饋奠)의 그릇 수도 모두 태반을 줄이게 하라.’는 절약의 명을 내렸고, 숙종이 이를 잘 따랐다고 한다.
시호는 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이다. 능호는 숭릉(崇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