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경왕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제21대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의 왕비.
이칭
봉호
혜경궁 홍씨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735년(영조 11)
사망 연도
1815년(순조 15)
본관
풍산(豊山)
주요 저서
한중록(恨中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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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본관은 풍산(豊山). 아버지는 영의정 홍봉한, 어머니는 한산이씨이다. 사도세자의 부인이고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10세에 세자빈이 되고, 16세에 의소세손, 18세에 정조를 낳았다. 1762년 29세에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홀로 됐고, 1815(순조 15) 81세로 사망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제21대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의 왕비.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풍산(豊山). 아버지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1743년(영조 20) 9세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세자빈(世子嬪) 삼간택에 뽑혔고, 10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세에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았으나 곧 죽었고, 2년 후 정조(正祖)를 낳았다. 그리고 이어서 2년 터울로 청연공주(淸衍公主), 청선공주(淸璿公主) 등을 낳았다.

주요 활동

20대 초반부터는 사도세자의 병증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762년 29세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맞있으나 혜빈(惠嬪)로 추서되면서 세자빈의 위치를 그대로는 유지하였다. 이후 아들 정조를 할아버지 영조에게 보내 함께 기거하면서 왕세손 수업을 받게 하였다. 정조가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는 정조를 자신에게 보낸 것이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효를 다한 것이라고 하며 갸륵하다는 뜻에서 ‘가효당(嘉孝堂)’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라 혜경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순조(純祖) 즉위 초부터 정조의 유지임을 강조하면서 아버지 홍봉한과 친정 집안의 신원(伸冤)을 요청하였고, 순조 14년(1814) 신원과 복권을 받았다. 1815년 창경궁에서 81세로 사망하였으며,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에 남편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학문과 저술

1795년 환갑에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서술한 『한중록(恨中錄)』을 펴냈다.

상훈과 추모

고종의 5대조 추존에서 장종과 함께 헌경왕후(獻敬王后)가 되었고, 대한제국 때는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다시 격상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이며,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융릉(隆陵)이다.

참고문헌

원전

『선원보감(璿源寶鑑)』
『순조실록(純祖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한중록(恨中錄)』

단행본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역사문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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