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원왕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
이칭
시호
혜순자경헌렬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定懿章穆仁元王后)
혜순(惠順)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687(숙종 13)
사망 연도
1757(영조 33)
본관
경주(慶州)
내용 요약

인원왕후(仁元王后)는 조선시대,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이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3대손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과 가림부부인(嘉林府夫人) 임천 조씨(林川 趙氏)의 딸이다. 1702년 16세에 숙종의 세 번째 간택 왕비가 되었다. 소생은 없었고 연잉군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세제(世弟)가 된 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71세에 사망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
주요활동

1687년(숙종 13)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 어머니는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 임천 조씨(林川 趙氏)이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1702년(숙종 28)에 16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천연두를 앓았으나 소생하였고, 2년 뒤에 혜순(惠順)이라는 호를 받았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대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721년(경종 1)에 경종의 후사를 정해 두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청이 있자 언문 교서로서 “ 효종 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오?” 라며 연잉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이어서 연잉군을 입후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고 세제가 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각종 역모에서도 연잉군을 적극 비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 중에 당색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원왕후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영조와 정성왕후로부터 극진한 효도를 받았다. 71세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사망하였는데 영조는 직접 행장을 썼다. 매사에 엄격하고 강한 결단력으로 조선 후기 궁중의 법도를 바로잡았으며, 그 예로 윗사람 앞에 앉을 때에 공경하는 뜻으로 마주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는 곡좌(曲坐)의 예법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혜순자경헌렬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定懿章穆仁元王后)이고, 능호은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 묘역 내에 있다.

참고문헌

원전

『경종실록(景宗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단행본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영조세가』(역사문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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