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과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에 15세의 나이로 선조의 계비가 되어 1603년에 정명공주(貞明公主)를,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선조가 사망한 후 대비로서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이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613년(광해 5)에 7명의 서자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은 유배되었다가 살해되고, 아버지 김제남과 형제들도 사사되었다. 인목왕후는 폐모가 되어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갇혔다.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된 정경은 서궁록에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목왕후 폐위와 서궁유폐는 광해군에게 폐륜이라는 올가미로 작용하여 결국 10년 후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서궁 생활 10년이 된 1623년 3월 13일 밤 인조가 반정을 끝내고 신하를 보내 즉위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인목왕후는 즉시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가 직접 서궁으로 가서 승인을 간청하자 비로소 광해군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받고 어보를 내주었다. 이 때문에 즉위식이 늦어지자 인목왕후는 직접 인조를 서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인조의 즉위가 창덕궁이 아닌 서궁에서 이루어진 것은 인목왕후의 의지적 대비권 행사로 인한 것이었다.
대왕대비로 복권된 후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명하여 한글로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해서체로 쓴 족자인 「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仁穆王后筆跡) 첩(帖)이 남아 있다. 계축옥사와 서궁 생활을 기록한 작자 미상의 『계축일기』가 있다.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이고, 능호는 목릉(穆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