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제16대(재위: 1623~1649) 국왕.
이칭
본명
이종(李倧)
군호
능양군(綾陽君)
시호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5년
사망 연도
1649년
본관
전주
출생지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관련 사건
인조반정|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인조는 조선 후기, 제16대(재위: 1623~1649) 국왕이다. 광해군과 북인(北人) 정권의 극단적인 정치에 반발하여 1623년 서인(西人)의 김류(金瑬) · 이귀(李貴) · 이괄(李适) 등과 '반정(反正)'을 일으킨 뒤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에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내외에서 전쟁을 치루었다.

정의
조선 후기, 제16대(재위: 1623~1649) 국왕.
가계 및 인적사항

1595년(선조 28)에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海州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1607년(선조 40)에 능양도정(綾陽都正)에 이어 능양군으로 봉해졌다.

주요활동

인조반정

광해군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정치 ·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광해군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유배시킨 뒤 이듬해인 1609년(광해 1)에 사사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자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南)을 연루시켜 사사하였다. 1616년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곧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살해하였다. 1615년에 능양군(훗날 인조)의 동생 능창군(綾昌君)을 폐서인시키고 곧이어 자결하게 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으로 만들어 서궁(西宮: 경운궁)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은 ‘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이 외에도 과도한 궁궐 공사, 대(對) 후금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였다.

1623년(광해군 15)에 서인(西人) 김류(金瑬) · 이귀(李貴) · 이괄(李适) 등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하고 강화도에 유폐시켰다. 능양군은 반정 세력의 지지를 받아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구금 상태에서 풀려난 인목대비가 이를 승인함으로써 왕위에 올랐다.

이괄의 난

왕으로 즉위한 뒤 정국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 이괄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괄은 반정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2등 공신에 머무른 점, 자신과 아들 이전(李栴)이 역모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당하여 조사를 받게 된 점 등에 불만을 품고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약 1달여 만에 서울 근교에서 진압되었지만, 인조가 서울을 떠나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이괄 군에 가담하였던 한윤(韓潤) 등은 후금으로 도망쳐 훗날 후금의 조선 침략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인조 연간의 국제 정세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후금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1619년(광해군 11) 사르후 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면서 요동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한편 가도(假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 세력은 후금과의 대결 과정에서 조선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이 후금과 단교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반정의 명분 중 하나로 내세운 만큼 반정 이후 후금과 단교에 해당하는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1626년(인조 4)에 홍타이지는 즉위 직후 내부의 정국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문룡 군을 제거하고 또 명나라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조선을 공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후금의 군대가 의주(義州)를 함락시킨 뒤 조선군의 방어를 뚫고 빠르게 남하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후 후금 측의 화의(和議) 요청에 응하여 1627년에 정묘화약(丁卯和約)을 체결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자, 청나라는 다시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청군의 신속한 진격과 정보의 혼란으로 인해 인조는 강화도로 이동하지 못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농성하였다. 곧이어 남한산성이 포위되었고 인조 정권은 전쟁과 화의를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는 속에서 1637년 2월(음력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된 후 곧 소식을 접하고 항복을 결정하였다.

국내 정세

이에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 의례를 치렀고,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한 왕족 및 전쟁을 지속할 것을 주장한 일부 신료들을 심양으로 보내는 것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병자호란의 패배는 이후 조선 국내 상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직후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조선에 군사와 군량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요구는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조선의 입장에서는 지원할 여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명나라와의 전쟁에 군사 · 군량을 지원한다는 정신적 부담도 갖게 되었다.

또한 1645년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 생활 끝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병이 위독해져서 사망하였고, 세자빈 강씨는 곧 인조를 독살하려고 하였다는 혐의로 폐서인된 후 사사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신(大臣)의 반열에까지 오른 심기원(沈器遠)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인조 연간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 속에서 다양한 군제(軍制) 개편이 이루어졌다. 1623년 즉위 직후 후금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어영군(御營軍)을 조직하였는데,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군의 규모를 확대하여 왕실 호위를 담당시키고, 정묘호란 이후에는 어영청(御營廳)을 창설하여 조직화하였다. 1624년(인조 2)에는 수도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서 총융청(摠戎廳)을 창설하였고, 1624년에 남한산성을 개축한 뒤 1626년(인조 4)에 수어청을 설립하여 남한산성의 방어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경제

경제 정책으로는 기존의 토지 비옥도 및 풍흉에 따라 등급을 구분해서 전세(田稅)를 거두는 방식을 폐지하고, 세금 부과의 효율성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민의 상황을 고려하여 낮은 등급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영정법(永定法)을 시행하였다. 또한 공물(貢物)의 부담을 줄이는 대동법(大同法)을 강원도로 확대, 실시하였다.

1634년(인조 12)에는 삼남(三南) 지역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정 확충을 꾀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회령(會寧) 및 경원(慶源)에 개시(開市)를 설치하였고, 이후 중강(中江)으로 확장하였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왕자는 소현세자,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 숭선군(崇善君), 낙선군(樂善君)이며, 왕녀는 효명옹주(孝明翁主)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청나라에서 하사한 시호는 장목왕(莊穆王)이다. 묘호는 인조(仁祖)이다. 능호는 장릉(長陵)이며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 2019)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1-인조대 정치론의 분화와 변통론』(혜안, 2006)

논문

장정수, 「17세기 전반 조선과 후금·청의 국교 수립 과정 연구」(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채홍병, 「정묘맹약(1627) 이후 조선의 대후금 관계 추이와 파탄」(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구범진, 이재경,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규모」(『한국문화』 7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5)
오수창, 「청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한국사 시민강좌』 36, 일조각, 2005)
한명기, 「조청관계의 추이」(『조선중기의 정치와 정책』, 아카넷, 2003)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김창수(전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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