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

목차
조선시대사
사건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내용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북방 정세와 부원수 임명 경위 등으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다. 당시는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정세였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장만(張晩)의 도원수직 못지 않게 부원수직은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임무로서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인물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이괄의 택정은 그만큼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출진한 뒤에 군사조련, 성책(城柵) 보수, 진(鎭)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의 하나였다.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아들 전(栴),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이 불측한 생각으로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를 하였다.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는 묵살하였으나, 군중(軍中)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의 사자(使者)들을 목베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전 계획에 의한 반란이라기보다는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 즉, 난의 원인은 이괄 자신 못지않게 집권층의 잘못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한 인물로서 이 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월 22일 이괄은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하였다.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고 샛길로 곧장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당시 장만은 이괄의 반란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휘하의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해 이괄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괄의 반란군은 개천·자산 등지를 거쳐 26일에는 강동의 신창(新倉)에 주둔하고, 28일에는 삼등(三登)을 지나 상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괄군이 관군과 처음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薪橋)에서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인 박영서(朴永緖)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돈(遯)을 능지처참하였다. 이괄은 서울로의 진격을 쉬지 않았다. 그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라 관군측에서는 소재조차 확인하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이괄은 평산에 관군의 방비가 엄한 것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시켜 마탄(馬灘 : 예성강 상류, 지금의 猪灘)에서 또 한차례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臨津)을 지키고 있던 관군을 기습공격해 붕괴시켰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공주로 피난하였다. 2월 11일 이괄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興安君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들로 하여금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鞍峴]에 진을 쳤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이괄은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날 밤 이괄·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 지금의 光熙門)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관군의 추격으로 이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과 한명련 등은 그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의 행재(行在)에 이른 뒤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인조는 환도한 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야집요(朝野輯要)』
『난중잡록(亂中雜錄)』
『묵재일기(默齋日記)』
「길마재에 꿈을 묻고-이괄(李适)-」(하현강,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65)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