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초명은 고당유(高唐愈), 호는 계림(鷄林). 우복야(右僕射) 고유(高維)의 아들이다.
성품은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였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시에도 능숙하였다. 예종 초 과거에 급제해 남방의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 청백(淸白)하게 공무를 보았다. 인조 때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이 승정(僧正) 자부(資富) 및 지수주사(知水州事) 봉우(奉佑)로 하여금 홍경원(弘慶院)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들은 주현(州縣)의 장정을 징발해 피해가 심하였다. 이자겸이 실각한 뒤 자부는 연좌되어 섬에 귀양갔으나, 봉우는 환관과 결탁해 벼슬자리를 누리고 있는 것을 상소해, 몇 차례 논박 끝에 임금의 뜻을 거슬려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으로 좌천되었다.
뒤에 다시 대관(臺官)이 되자, 이자겸의 일당이 제거되지 않은 것을 배척하고 파직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에 눌려 예부낭중에 임명됨으로써 대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147년(의종 1)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 1148년 정당문학판호부사(政堂文學判戶部事)가 되어 지공거(知貢擧)로서 유정견(柳廷堅) 등 25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이어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 · 참지정사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가 되었다.
1149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 판이부사(判吏部事), 1150년 판병부사(判兵部事), 1151년 중군병마판사 겸 서북면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兼西北面兵馬判事)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폐신(嬖臣) 김존중(金存中)에게 아부하던 끝에 탄핵을 받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작품으로 「진도벽파정(珍島碧波亭)」 이라는 시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