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봉화(奉化). 첫 이름은 금극의(琴克儀), 자는 절지(節之).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용식(琴容式)의 후예이다. 고향은 원래 경상도 봉화현(奉化縣)인데, 나중에 계양(桂陽)의 김포현(金浦縣)으로 본적을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글짓기를 잘 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 청도(淸道)의 감무로 나갔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고 하였다.
1184년(명종 14)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고 내시(內侍)에 보직되었다. 최충헌(崔忠獻)이 문사를 구할 때 이종규(李宗揆)의 추천으로 발탁되자 요직을 거치고, 신종(神宗) 때에 상서우승 우간의대부 태자찬선대부가 되었으며, 한때 장작감(將作監)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희종(熙宗) 때 지주사(知奏事)·지이부사(知吏部事) 등을 지냈다.
1211년(강종 즉위년) 왕의 즉위에 대한 책명사의 접대에 공을 세우고 첨서추밀원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簽書樞密院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1215년(고종 2) 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修國史),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가 되고, 1220년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으며,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여러 번 지공거가 되어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으니,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한림별곡(翰林別曲)』에는 금학사(琴學士)로 되어 있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