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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 초상
이귀 초상
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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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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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내용

1575년(선조 8) 동·서로 분파되어 생긴 붕당이다. 동·서 분당은 당시 기성사류로 권세가였던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 심의겸(沈義謙)과 신진사류 김효원(金孝元)과의 반목·질시가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류가 동인,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류들이 서인이 되었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전랑직(銓郎職)을 둘러싼 대립이 직접적인 분란의 동기였다. 즉 심의겸은 전랑에 천거된 김효원이 일찍이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권세에 아부한 소인이므로 적임자가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전랑에 취임했는데, 그 뒤 김효원이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옮기게 되자 그 자리에 심의겸의 아우인 충겸(忠謙)이 천거되었다. 이번에는 김효원이 왕의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전랑직에 앉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전랑직을 둘러싼 두 사람의 불화를 계기로 당시 벼슬아치와 사류들이 두 부류로 갈라져 정치적·이념적 성격을 띤 붕당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었으므로 그를 지지하는 파들을 서인이라 지칭하였다. 이로써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동인과 구별하게 되었다.

이들 서인의 사상적 배경과 학통은 주기철학(主氣哲學)에 입각한 기호학파(畿湖學派)였다. 즉 기호학파의 중심학자인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유 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이 서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서로 갈라진 뒤, 대사헌 이이의 건의와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주청으로 동·서 두 당의 충돌을 극소화하기 위한 조처가 내려졌다. 즉, 심의겸과 김효원을 각각 외직인 개성유수와 경흥부사로 물러앉게 한 것이다. 따라서 김효원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번에는 조정의 처분이 문제가 되어 김효원·심의겸의 시비가 조신(朝臣)간에 공공연한 논란이 되었고, 이로써 지지·비판 세력의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결국 이이의 분쟁 조정의 노력이 오히려 동서인명목(東西人名目)의 성립을 가져오게 한 셈이 되었다.

동·서 분당 뒤, 첫 정치적 충돌은 동인인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심의겸을 탄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이의 중재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584년 중재자 구실을 했던 이이가 죽자, 동인과 서인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발(李潑) 등이 심의겸을 탄핵, 파직시켜 서인 세력이 크게 꺾이는 형세가 된 것이다.

그 뒤 1589년(선조 22) 동인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서인의 정철(鄭澈)이 국옥(鞠獄)을 주관, 한때 정권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1년에 정철이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실각하여 다시 세력을 잃어버렸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서인의 실세시대(失勢時代)가 지속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다시 정권을 주도하게 된 서인은 반정공신파와 관망파로 갈라졌다. 이에 전자를 공서(功西, 또는 勳西)라고 하며, 그 중심 인물은 김류(金瑬)·심기원(沈器遠)·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신경진(申景禛) 등이다. 그리고 후자를 청서(淸西)라고 하며 김상헌(金尙憲)을 수령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공서와 청서로 분파된 서인은 다시 공서는 노서(老西), 청서는 소서(少西)로 갈라졌다. 이 분파는 김류가 북인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등용하려 할 때, 이에 반대하는 소장파와의 대립이 발단이 되었다.

김류를 지지하는 노장파를 노서, 반대하는 소장파를 소서라 하였다. 노서의 중심 인물은 김류·김경징(金慶徵)부자와 신흠(申欽) 등이고, 소서의 중심 인물은 이귀를 비롯, 나만갑(羅萬甲)·이기조(李基祚)·정홍명(鄭弘溟)·장유(張維)·박정(朴炡)·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 등이다.

노서와 소서로 분열되기는 했으나, 인조대는 서인 천하였다. 인조 말에는 사림을 대표하는 송시열(宋時烈) 등을 중심으로 산당(山黨)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한강 이북에 거주하고 중앙 정계와 유대를 맺으면서, 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맺는 권력지향적인 한당(漢黨)이 성립되었다. 이 당의 수령은 김육(金堉)·김석주(金錫胄)였다.

또 원두표(元斗杓)의 원당(原黨)과 김자점의 낙당(洛黨)이 분파되어 서인은 산당·한당과 함께 4분파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효종 때에 들어와 송시열이 다시 정계에 등장하면서 스승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를 중심으로 서인을 재규합, 새로운 조직체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통합된 서인은 숙종 때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이로써 남인·북인과 더불어 사색의 정쟁이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붕당록(朋黨錄)』
『당의통략(黨議通略)』
『이조당쟁사연구』(강주진,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조선후기 붕당론의 전개와 그 성격」(정만조,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정여립 모반사건의 진상과 기축옥의 성격」(우인수, 『역사교육론집』12, 1988)
「사화와 당쟁과의 관계」(홍순창,『대구사학』7·8, 1973)
「한국당쟁사」(성락훈, 『한국문화사대계』Ⅱ,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65)
『韓國政爭志』(幣原坦, 三省堂, 1907)
「東西分黨に於ける先輩後輩の對立について」(大谷森繁, 『朝鮮學報』14, 1959)
「朝鮮成宗時代の新舊對立」(申奭鎬, 『近代朝鮮史硏究』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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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홍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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