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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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청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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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五軍營) 중 왕을 호위하던 군영.
내용 요약

어영청은 조선 후기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 중 왕을 호위하던 군영이다. 인조반정 이후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표방한 인조는 후금을 친히 정벌할 계획의 일환으로 화포군을 골라 훈련하게 했는데 이것이 국왕의 호위부대로 남아 어영청으로 발전했다. 수도방어 책임을 진 훈련도감과 더불어 중앙군의 핵심이었다. 정묘·병자호란 이후 어영대장을 정점으로 하는 대규모의 체계적인 군영체제를 갖추면서 어영청이라는 관부로 자리잡았다. 1881년(고종 18) 총융청·금위영과 합쳐져 장어영이 되었고, 1884년에는 총어영으로 바뀌었다가 1894년에 폐지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五軍營) 중 왕을 호위하던 군영.
내용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국내 정세가 어수선하고 국제적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위급해진 가운데 설치되었다. 후금에 대해 강경책을 표방한 인조는 친정(親征)의 계획 아래 개성으로 나아갈 것에 대비하였다. 그 일환으로 개성유수 이귀(李貴)를 어융사(御戎使)로 임명해 260여 명의 화포군(火砲軍)을 골라 훈련하게 했는데, 이것이 어영군의 시초였다. 인조의 친정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귀가 모집한 군사는 해산시키지 않고, 1624년(인조 2) 정월 개성유수에서 물러난 이귀가 어영사(御營使)로서 그대로 거느려 국왕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어영군은 그 직후 이괄(李适)의 난을 맞아 국왕의 공주 파천에 호종하였다. 그곳에서 각지의 산척포수(山尺砲手)를 골라 뽑아 충원해 600여 명으로 늘어났고, 환도 후에는 1,000명에 달하였다. 이로써 어영군은 당시 수도 방어의 책임을 맡고 있던 훈련도감과 더불어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훈련도감처럼 서울에 상주시키지 못하고 양분해 500명씩 교대로 번상하게 하고, 번상시의 경비를 제공하는 보인(保人)을 지급하였다. 어영군은 잠시 총융사(摠戎使)에 소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 12월에는 그 수가 5,000명으로 늘어나 처음으로 청(廳)으로서의 관부를 가지고, 어영대장을 정점으로 하는 군영체제를 갖추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약 7,000명으로 늘어나 8번으로 나누어 겨울철에만 번상하였다. 어영군은 이후 효종 때에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효종은 1652년(효종 3) 군사전문가인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아, 군비 확충의 일차적인 사업의 하나로 어영군의 증강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이전보다 3배가 더 되는 2만 1000명으로 그 수를 증원하였다. 또한 6번으로 나누되 21개 집단으로 편성해 두 달씩 1,000명이 번상하게 하여 종래 겨울 결빙 때만 번상하던 것을 지양, 1,000명의 병력이 군영에 상주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효종 이후 국가 재정에 의한 운영 체제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지금까지 모병에 의해 유지하던 것을 평안 · 함경도를 제외한 6도 향군(鄕軍)이 의무적으로 번상하게 하는 체제로 바꾸는 동시에, 이를 돕는 보인(保人)의 수를 대폭 늘리게 되었다.

어영군은 설치 이후 한동안 속오법(束伍法)에 의해 5부(部) · 별삼사(別三司) · 별중초(別中哨)로 편제되었다. 이후 1704년(숙종 30) 12월에 1영(營)을 5부, 1부를 5사(司), 1사를 5초(哨)로 편제해 모두 125초에 1만 6300명으로 정비되었다. 또한 속오법의 기본단위인 초의 군총(軍摠)은 127명(1초=3기, 1기=3대, 1대=정군 10명, 화병 1명, 복마군 1명)으로 편제되었다. 이들 향군은 25번으로 나누어 5초씩 번상해 두 달 동안 복무하게 했으므로 약 700명이 서울에 상주하였다. 이와 같은 기본 병종인 향군 이외에도 기사(騎士) 150명, 별파진(別破陣) 160명과 각종 경표하군(京標下軍) 781명, 수문군(守門軍) 40명, 군포수직(軍鋪守直) 16명, 본아병(本牙兵) 301명, 현록아병(懸錄牙兵) 87명, 치중복마군(輜重卜馬軍) 50명, 양화진아병(楊花津牙兵) 100명, 교사(敎師) 9명, 겸별파진(兼別破陣) 40명, 향기사(鄕騎士) 700명, 표하군(標下軍) 56명 등 잡다한 병종을 향군보다 더 많이 두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표하군이나 수문군 같이 장발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필요할 때에만 사역하는 치중복마군, 이름만 있고 실상은 수포군(收布軍)인 향기사 등 그 종류는 여러 가지였다. 이러한 어영군을 유지하기 위해 설정된 보(保)는 자보(資保) 1만 7475명, 관보(官保) 5만 175명, 별파진보 980명, 기사보 3,729명 등 7만 2359명으로 향군의 약 4배에 달하였다. 하번인 군사들은 지역별로 무예에 능한 수령을 겸파총(兼把摠)으로 임명해 그 훈련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어영청 지휘부에는 정상적인 지휘계통 이외에 군무를 관장하는 낭청(郎廳 : 종사관) 2명, 군사훈련 담당관인 교련관(敎鍊官) 12명, 기패관(旗牌官) 10명이 있고, 본청군관 15명, 출신군관(出身軍官) 11명, 가전별초(駕前別抄) 52명, 별무사(別武士) · 마의(馬醫) 각 1명, 재경군관(在京軍官) 300명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마의처럼 필요한 장교도 있었으나, 재경군관처럼 무과의 합격자 남발로 인한 대우장교가 대부분이었다. 영종진(永宗鎭)이 그 속영으로서 영종첨사(永宗僉使)가 천총(千摠)을 겸하였다. 그 밑에 중군 1명, 파총 1명, 초관 1명, 방영군관(防營軍官) 160명, 대변군관(待變軍官) 300명, 교련관 8명, 기패관 15명, 별파진 18명, 별대군(別隊軍) 5초(731명)를 배치해 수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어영청은 1881년(고종 18) 총융청 · 금위영과 합쳐져 장어영(將禦營)이 되고, 1884년에는 총어영(總禦營)으로 바뀌었다가 1894년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육군본부, 한국군사연구실, 1977)
「조선후기중앙군제의 재편」(차문섭, 『한국사론』 9, 국사편찬위원회, 1981)
「어영청(御營廳)연구」(최효식, 『한국사연구』 40, 한국사연구회, 1983)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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