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조선시대 실역에 복무하는 정군(正軍)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신역(身役)의 단위이다. 군역은 직접 군사 활동을 하는 정군과 정군의 군사 활동에 소요되는 재정적 뒷받침을 맡은 봉족(奉足) 또는 보인(保人)으로 구분되었다. 군역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봉족에게 배당하여 실역(實役)을 대신하게 했다. 3정 1호로 운영되었는데 이후 합리적 군역편성을 위해 2정을 1보로 묶는 보법으로 개편되었다. 보를 편성하기 위해서 호적을 토대로 군역 부과자를 별도로 추려서 군적을 작성하여 정군 또는 보인을 구별하였다.
조선시대 16세부터 60세에 이르는 양인 장정은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들의 그 복무 형태는 직접 군사 활동을 하는 정군과 정군의 군사 활동에 소요되는 재정적 뒷받침을 맡은 봉족(奉足 : 保人)의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조선 사회의 군사 제도는 현대처럼 군사가 군 복무를 하는 동안 그 재정적 부담을 국가가 일원적으로 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기 구입이나 왕복 여비 이외에 복무하는 동안의 경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군사 각자가 스스로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역 복무에 따른 반대 급부로서 토지를 지급 받지 못했던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 아래서 이와 같은 경제적 부담은 빈한한 군정(軍丁)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었다. 또한 대부분이 경작 농민이었던 그들이 징발되고 나면 경작 노동력의 고갈로 농사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군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경제적 부담의 실제 담당자로서 봉족이 일정하게 배당되었으며 봉족은 그로써 실역(實役)을 대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 말부터 구체적으로 법제화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초인 1394년(태조 3) 마병(馬兵)의 경우 5정(丁)이 1군(軍)을 내고 보졸(步卒)의 경우 3정이 1군을 내도록 하였다. 그 뒤 1397년(태조 6)에는 품관 마병의 경우 봉족 4명, 무직 마병의 경우 봉족 3명, 보졸의 경우 봉족 2명을 지급 받되 가능한 한 내외친족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 일반 군정으로서도 봉족을 삼도록 원칙이 정해졌다. 이러한 원칙은 고려시대 이래 3정 1호의 보편적 예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정군이 되고 아들과 사위가 봉족이 되어 호 단위로 농경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군 복무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데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3정보다 훨씬 많은 인정을 가진 부호에게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부담이 되었다. 이에 반해 2정밖에 없어서 정군을 내지 못하는 호는 각각 다른 호의 봉족이 되어 그 경제적 부담이 커지는 불공평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보다 합리적인 군역편성을 위해서는 호 단위보다 정 단위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인식에 따라 1464년(세조 10)에 봉족제를 보법으로 개편하였다. 즉 정을 기준으로 하여 2정을 1보로 하는 법이 마련되고 봉족 대신 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정을 1보로 한다. 둘째 토지 5결을 1정에 준하도록 한다. 셋째, 노자(奴子)도 봉족수로 계산한다. 넷째, 각 병종별 급보 단위는 갑사(甲士) 4보, 기정병(騎正兵) · 취라적(吹螺赤) 3보, 평노위(平虜衛) · 파적위(破敵衛) · 근장(近仗) · 별군(別軍) · 보정병(步正兵) · 대평소(大平簫) · 기선군(騎船軍) 2보, 봉수군(烽燧軍) · 방패(防牌) · 섭육십(攝六十) 1보이다. 다섯째, 누정 · 누호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도록 되어 있다.
이 원칙으로 가족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2정을 보라는 단위로 묶음으로써 인정이 많은 호는 여러 개의 보로 짜여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단정(單丁)의 호는 토지 준정(準丁)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한 다른 호와 어울려서 보를 이룰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 보법을 통해 나타난 두드러진 점은 군역 편성에 있어서 자연호와 별도로 하고 토지의 준정 및 노자를 봉족으로 간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약간의 모순을 해결하면서 군액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군역의 부담이 전반적으로 과다해지게 되었다. 더욱이, 호를 무시하고 보법이 성립되었으므로 혈통 관계를 도외시한 단위 설정이 문제가 되었다. 또 토지로써 준정하였으므로 대토지소유자인 양반들의 반대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몇 가지를 참작, 법제화한 『경국대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게 되었다. 즉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게 차등을 두어 보를 주는데 있어 첫째, 2정을 1보로 하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자연호와의 연관을 어느 정도 되찾아서 정군으로 나가는 호 안에 지정된 보수를 넘는 정인(丁人)이 있더라도 2정까지는 인정하며, 수군의 경우 3정호는 1정을 보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둘째, 토지 준정의 규정을 폐지하고 노자의 경우 준정한 수의 절반만 보로 계산한다. 셋째, 각 병종별 급보 수는 ① 갑사와 장번의 환관은 2보, 양계갑사는 2보 1정, ② 기정병 · 취라적 · 대평소 · 수군 · 출입번하는 환관 · 기잡색군, 서울에 머무는 제주자제는 1보 1정, ③ 보정병 · 장용위 · 파적위 · 대졸 · 팽배 · 파진군 · 조졸 · 봉수군 · 차비군 · 어부 · 보잡색군 · 제주의 기정병 · 보정병수군은 1보로 한다. 넷째, 보인의 경제적 부담은 정군이 복무하는 동안 매월 면포 1필씩으로 한다. 다섯째, 보인으로서 시취(試取)에 합격한 자는 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고 규정하였다.
위의 규정에서는 보인의 경제적 부담을 면포 1필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호와 유리된 보의 체제 아래서 정군과 보인과의 사이는 실제에 있어서 수탈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군은 더욱 많은 베를 요구하거나 복무 자체를 보인에게 떠맡기는 경우가 많아 뒷날 수포대립제(收布代立制)가 성행케 되었고 이로써 초기의 군사 제도가 붕괴되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보의 편성을 위해서는 군적(軍籍)이 정비되어야 하고 군적의 작성은 호적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호적은 백성의 신고에 의해 호구안이 마련되고 이를 바탕으로 3년마다 성적(成籍)해 호조 · 본도 · 본읍에 비치되고 각 호에서도 1부를 가지게 된다. 호적이 작성되면 한성의 5부와 외방의 절도사가 그 가운데서 군역 부과자를 별도로 추려서 6년마다 군적을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당해인의 정군 또는 보인의 구별과 정군의 경우 병종까지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적은 병조에 1부를 보내고 관찰사도 주진(主鎭) · 거진(巨鎭) · 제진(諸鎭)에 각각 1부씩 비치하였다. 1477년(성종 8)의 강원 · 영안도를 제외한 6도의 군적을 보면 정군 13만4973명, 보인 33만2746명 도합 46만7719명으로 집계되어 있어 정군과 보인의 비율은 1 : 2.5로 산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