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1466년(세조 12) 부장(部將)으로 왕명에 따라 도성(都城) 안에 횡행하는 소도둑을 포획하였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도총사 이준(李浚)의 군관으로 토벌에 참가하고, 이어서 건주야인(建州野人) 정벌에 나아가 군공을 세워 노 · 비 아울러 6명이 하사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옥사(南怡獄事)에 연루되어 가산(家産)을 적몰당하고 관노가 되었다가 1470년성종의 즉위로 다시 기용, 가위장(假衛將)이 되고, 가산 · 노비 등을 환급받았다.
1472년 안주목사, 1475년 행호군(行護軍) 등을 역임하고 1478년 경흥도호부사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곧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변방근무를 피하기 위하여 병을 사칭하였다는 장령 임수경(林秀卿)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480년 다시 기용되어 치중장(輜重將)으로 야인정벌에 참전, 군공을 세워 가삼자(加三資)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 1483년 다시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484년 영안남도병마절도사(永安南道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도승지 등에게 초피(貂皮)를 뇌물로 바친 사실이 탄로나 파직당하였다.
1489년 고신(告身: 관직 임명사령장)을 환급받고 의주목사가 되었으며, 1494년 행호군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