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척(禾尺)·양수척(楊水尺, 또는 水尺)·봉화간(烽火干) 등 대개 어미(語尾)에 ‘간’ 또는 ‘척’자를 붙여 부르던 부류의 사람들로 그 유래는 매우 오래이다.
후삼국시대부터 수초(水草)를 따라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며 사냥 또는 고리[柳器]를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무자리들을 양수척 또는 화척이라 불렀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칠 때 제어하기 어려웠던 부류였다.
대개 여진(女眞 : 韃靼)의 포로 또는 귀화인의 후예로 본관과 부역이 없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채 촌락 변두리에 그들끼리만 무리를 지어 살았다. 거란족의 침입 때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하고, 왜인(倭人)을 가장해 동해안 일대에서 난동을 부려 조정에서는 이들의 단속에 고심하였다.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아 관기(官妓) 가운데 대부분은 이들의 후예였으며, 점차 가축도살·수육상(獸肉商) 등 독특한 직업을 겸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들 뿐만 아니라 잡기(雜伎)를 업으로 삼는 재인(才人)·봉군·수군(水軍) 등 그 신분은 양인이나 천한 일에 종사해 사회적 멸시를 받는 부류의 사람들을 보통 ‘간’·‘척’이라 불렀다.
1423년(세종 5) 이들의 명칭을 백정(白丁)으로 고치고 사회적 대우를 고쳐주려 했으나 오랜 유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끼리만 무리를 지어 살면서 가축도살·걸식·도둑질 등을 일삼음으로써 이들에 대한 조처가 때때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1415년(태종 15)에는 간·척 3천인을 보충대(補充隊)에 입속시키고 6천인을 봉족(奉足)으로 하여 1천일 동안의 복역을 마치면 종9품 잡직에 임명, 벼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그 뒤 이들은 점차 그 자체의 신분, 예컨대 백정·봉군·수군·역보 등 신량역천(身良役賤)의 한 신분으로 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