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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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초기 국역(國役) 편성의 기본 조직으로 정정(正丁 : 16세이상 60세 이하의 장인 남자)을 돕게 하던 제도.
이칭
이칭
조정(助丁), 여정(餘丁), 솔정(率丁), 관하(管下), 인록(人祿)
내용 요약

봉족은 조선 초기 국역(國役) 편성의 기본 조직으로 정정(正丁)을 돕게 하던 제도이다. 조정(助丁), 여정(餘丁), 솔정(率丁) 등 이칭이 다양하다. 조선시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정정은 국역을 담당하였는데 그 역을 담당하지 않는 나머지 정(丁)으로 입역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정정과 봉족은 아들, 사위, 조카 등 족친(族親)으로 호주 명의 아래 공동책임을 지게 하였다. 그러나 호를 매개로 구성하는 데 따른 논란이 커지면서 인정 단위로 개편한 보법(保法)이 시행되었다. 보법의 시행과 함께 보인(保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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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초기 국역(國役) 편성의 기본 조직으로 정정(正丁 : 16세이상 60세 이하의 장인 남자)을 돕게 하던 제도.
내용

즉 정정(正丁) 1인에게 조정(助丁)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재력(財力)을 내게 하여 정정이 국역을 입역(立役)하는 데 그 을 직접 담당하지 않은 나머지 정(丁)으로 봉족을 삼아 입역을 위한 비용을 마련케 하였다. 따라서 국역을 지는 정정은 봉족의 도움을 얻어야만 부과된 역을 담당할 수 있었다.

정정은 호수(戶首) 또는 갑수(甲首)라 하고, 봉족은 조정(助丁) 혹은 여정(餘丁) 혹은 솔정(率丁)이라 하며, 또는 관하(管下 : 함경도) · 인록(人祿 : 제주도)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인정(人丁)에 대하여 부른 것이며, 호(戶)로서는 봉족호(奉足戶) 또는 조호(助戶)라고 하였다. 국역 부담의 단위로서의 호에는 많은 인정을 가진 큰 호도 있고, 단독으로는 입역이 불가능한 호인 불성호(不成戶)도 있어, 불성호는 3가를 1호로 삼는 것이 통례였다.

봉족제는 고려의 족정(足丁)과 관계가 있다. 고려에서는 한 군호(軍戶)가 족정이라는 일정한 전지의 결수(結數)를 받아 양호(養戶)에 의해 경영되었는데, 조선 초기의 봉족제는 고려의 이러한 양호제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봉족제는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으로 개편되어 봉족을 보인(保人)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보법이 성립된 이후에도 보인을 봉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봉족이 주어지는 대상은 태조 때에 갑사(甲士) · 시위군(侍衛軍) · 기선군(騎船軍) 등 군병(軍兵)에 한정되었다. 그 뒤 태종 이후에는 군병 이외에도 각사이전(各司吏典) · 향리 · 역리(驛吏) · 정리(丁吏) · 조례(皁隷) · 구종(驅從) · 원주(院主) · 진척(津尺) · 노비(奴婢) · 신백정(新白丁)에까지 적용되었다.

정정과 봉족은 자서제질족친(子婿弟姪族親)으로 호주 명의 아래 공동책임을 지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대체로 3가를 1호로 삼는 것이 통례라 하지만 인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호의 구성에 차이가 있었다. 호를 매개로 하는 정의 정급(定給)이란 명확한 시책이 아니어서, 호의 편성에는 단정(單丁)의 호보다 정이 많은 호에 유리하였다. 호 단위는 호의 세력기반뿐 아니라 지방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봉족의 정급에는 유역자(有役者)의 신분과 소유 전지(田地)의 다소 및 솔거인정(率居人丁)의 다과(多寡)에 의하도록 하였다. 유역자의 신분이 보다 높은 경우에는 봉족이 많이 주어지고, 반면에 낮은 신분의 경우에는 봉족이 적게 주어졌다. 병종(兵種)이나 역종(役種)에 따라 소유 전지의 기준에 차이가 있었고, 유력한 입역자일수록 봉족을 많이 점유하였다.

봉족호는 2, 3결 이하의 전지 소유자로 삼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부호(富戶)가 봉족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봉족은 실제 빈민으로 충급되며, 호수에게 경제적으로는 물론 경제외적 주종(主從)관계까지도 강요당하며, 점차 낮은 신분으로 충급되는 경향이 있었다. 호수는 심지어 봉족을 노비처럼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동류(同類)의 봉족호로 충급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못하였다.

봉족은 긴급할 때만 동원할 수 있고 평상시의 역에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봉족은 호수 대신으로 입역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봉족이 호수에게 뒷바라지를 위해 바치는 부담은 『경국대전』 「병전(兵典)」 급보조(給保條)에 “호수는 봉족으로부터 매월 면포(綿布) 1필 이상 거두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에 이르면 보포(保布)라 하여 보인의 부담이 당시 화폐의 기능을 담당하던 면포로 징수되고 있었다. 1464년 군병의 봉족이 보법으로 개편되고, 1466년에는 국역 전반의 봉족도 보법으로 개편되었다.

의의와 평가

봉족제에서 보법으로의 개편은 국역편성기준이 호 단위에서 인정 단위로 개혁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역 편성단위이던 호를 인정으로 개편한 것은 부강호(富强戶)가 반대할 입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관리의 농간이나 유력층의 사회적 기반을 무시할 수 없어 단한호(單寒戶)의 부담만 늘어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초기사회구조연구(朝鮮初期社會構造硏究)』(이재룡, 일조각, 1984)
『조선초기양반연구(朝鮮初期兩班硏究)』(이성무, 일조각, 1980)
「조선후기(造船後期)의 병역제도(兵役制度)」(이연수, 『학예지(學藝志)』2, 1991)
「조선후기(朝鮮後期) 봉족제(奉足制)의 추이(推移)와 실태(實態)」(이지우, 『경남사학(慶南史學)』5, 1991)
「보법(保法)의 추이(推移)와 실태(實態)」(이지우, 『경대사론(慶大史論)』6, 1991)
「조선후기(朝鮮後期) 봉족연구(奉足硏究)」(김갑주,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17, 1990)
「봉족(奉足)에 대하여」(이재룡,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Ⅱ, 전남대학교, 1964)
「이조초기(李朝初期) 국역편성(國役編成)의 기저(基底)」(김석형, 『진단학보(震檀學報)』14, 1941)
「李朝の軍役制度保の成立」(宮原兎一, 『朝鮮學報』28,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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